나는 설거지물을 받다 말고 뒤를 돌아보며, 소파에서 쉬고 있는 그녀에게 물었다.
“나 오늘 무척 피곤해. 네가 설거지 좀 하면 안 되겠니?”
아마 내 말투와 표현은 질문이라기보다는 명령조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아무런 주저 없이, 다소 퉁명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나도 피곤해.”라고 내뱉었다.
그 착하디착하고 순진한 여자가 그 한마디를 하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기 일을 계속했다.
우리 어머니와 누나와 여동생은, 아버지나 형 또는 내가 그렇게 얘기했을 때 한번도 그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이런 생각도 했다. 우리는 젊은 시절에 학생운동을 한답시고 남녀평등을 부르짖곤 했는데, 그게 다 말뿐이었단 말인가?
나는 그날부터 남녀평등이라는 그 긴 길의 첫걸음을 스웨덴에서, 스웨덴 여자와 시작했다. 1990년 여름 나는 그 여자와 결혼했고, 아들딸을 셋이나 낳아 똥 기저귀를 같이 갈며, 남녀평등에 대해 수없이 많은 도전을 받으면서 오늘까지 살아왔다. 그 시간 동안 아이들에 대해, 가정에 대해, 인생에 대해 참 많이 배웠다.
만약 그렇게 살지 않았다면 나는 오늘 내 아이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내 삶은 얼마나 메마르고 나는 또 얼마나 부족한 사람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 pp.94-95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손가락질 받지 않고 사는 사회, 열심히 일하면서 언제나 가정을 최우선으로 하는 사회, 일을 하기 위해 사는 게 아니라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 일을 하는 사회, 청소부라도 멸시하지 않으며 오히려 열심히 사는 것을 존중하는 사회. 우리는 언제 그런 사회를 만들 것인가? 그런 질문을 나 자신에게 수없이 했다. 주입식, 암기식, 지식 위주의 공부, 경쟁에 적응 못하고 낙오자가 되어 학교폭력에 가담하고, 학교폭력에 시달리며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우리 젊은이들에게 왜 우리는 문?예?체?실습 교육을 통해 자신의 다른 재능을 계발할 기회와 탈출구를 만들어주지 못하는가? 어떻게 이론적 지식 위주의 공부만 우선시하고 다른 재능은 재능으로 인정하지 않는단 말인가?
나의 삶을 되돌아보니, 장군이 돼라, 대통령이 돼라, 뭐가 될 것이다 같은 얘기들이 업보처럼 따라다녔다. 차라리 내 아내처럼 “청소부가 되더라도 정직하게 열심히 살라.”고 하는 사회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 pp.144-145
이 출산대비 호흡과 긴장완화 운동은 분만 시에 큰 도움이 되었다. 큰 분만실에서 아내와 나 두 사람은 호흡을 고르면서 분만 초기 산통의 고비를 잘 넘겼다. 산파전문간호사가 우리를 보고는 자신이 필요 없는 것 같다며 분만 경과와 산모의 몸에 설치한 기기들의 작동을 체크하고는 분만실을 나가곤 했다.
그러나 애를 낳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푹신한 큰 자루백에 엎드려 산통이 올 때마다 힘을 주며 고통을 참는 아내의 모습은 나의 간장을 떼어 내는 것보다 더 아프고 고통스러웠다. 산통과 산통 사이 무릎을 꿇고 자루백에 앞으로 기대어 숨을 고를 때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고, 그때마다 내가 대신해주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그래도 나는 아내의 등을 쓰다듬으며, 산통의 주기 사이마다 열심히 아내의 호흡을 깊게 하고 몸의 긴장을 풀게 했다. 그래야 다음 산통 때 다시 힘을 모을 수가 있었다. 그렇게 하며 우리는 16~17 시간을 분만실에서 싸웠다. 아이를 낳는 게 얼마나 힘들었으면 내가 몇 번이나 “다시는 애를 낳지 않겠다.”고 중얼거렸다고 아내가 후에 일러줬다.
고통의 정도와 분만 시간의 차이는 있었으나, 나는 이렇게 세 명의 아이를 직접 분만실에서 아내와 함께 싸우며 받아냈다. 핏덩어리를 아내의 가슴에 올려놓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여자가 아이를 낳는 일이 이렇게 위대하고 성스러운 것이란 걸 내가 직접 겪어보지 않았으면 어떻게 알았을까? --- pp.161-162
나는 스웨덴과 한국 대학에서 있었던 이 두 사건을 보며, 우선 이 사건에 연루돼 있는 사람들 사이의 보수를 비교해봤다. 그때 당시 스웨덴의 원로 교수와 청소부 아주머니 사이의 보수는 원로 교수가 청소부 아주머니보다 약 2.5배 정도 더 받았다. 반면 홍익대 원로 교수는 홍익대 청소부 아주머니보다 10배 이상 더 받았다. 하지만 보수보다 더 큰 차이는, 아마 이 두 직업을 보는 두 나라 사이의 사회적 시각일 것이다. 물론 이 시각의 차이도 근본적으로는 보수의 차이와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겠지만 말이다.
물론 스웨덴에서도 사회적으로 대학 교수가 청소부보다는 존중받는다. 그러나 청소부에 대한 멸시와 사회적 낙오자라는 낙인이 한국보다는 훨씬 약하다. 즉, 직업에 따라 사람 자체를 평가하는 경향이 스웨덴에서보다 한국에서 훨씬 더 강하다는 것이다.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은 직업에 관계없이 인격체로 존중받아야 한다. 나아가 직업 간의 경제적 보수 차이도 지금보다는 훨씬 줄어들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사회적 계층 사이의 갈등이 적고, 더불어 사는 공동체 사회를 만들어 나가기를 원한다면 말이다.
--- p.1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