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준의 이마에 파란 힘줄이 솟기 시작했다. 어젯밤, 아니 어찌 어젯밤 만이랴..... 자신의 신분이 얼마나 천한 쪽에 속하는가는 어머니의 눈물 속에서 수없이 보았었고 그 뼈저린 현실이 어머니의 경우만이 아닌 자기의 운명 위로도 굴러온 것을 확인하는 느낌이었다. 애초 허준의 머리에 얹힌 큰갓은 그의 신분에는 가당치도 않은 가짜였다. 생부가 용천 군수이기에 덤으로 글방에 드나들며 양반가문의 친구들과 사귀면서 그들과 어울릴 때는 자기도 머리에 얹고 다니던 일종의 객기의 소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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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신명과 스승님은 제 맹세를 들어주소서. 만일 이 허준이 베풀어주신 스승님의 은혜를 잠시라도 배반하거든 저를 벌하소서. 또 이 허준이 의원이 되는 길을 괴로워하거나 병든 이들을 구하는데 게을리 하거나 약과 침을 빙자하여 돈이나 명예를 탐하거든 저를 벌하소서. 이 고마움 맹세코 영원히 잊지 않으오리다.
--- p.251
'여덟 가지 의원 중에 그 제일을 심의로 친다. 심의란 대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늘 마음이 편안케 하는 인격을 지닌 인물로 병자가 그 의원의 눈빛만 보고도 마음의 안정을 느끼는 경지로서 그건 의원이 병자에 대하여 진실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가짐이 있고서야 가능한 품격이다.'
' 마음심자 심의(心醫)오니까.'
방안의 도지가 기록하며 묻는 소리가 났고 허준도 심의라는 글자를 입안에 되뇌었다.
--- p.143
'여기가 백회혈(百會穴) 정신을 맑게 하고 양기를 움직이는 곳.'
허준의 침머리가 그 병자의 정수리의 숫구멍을 찾아 박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머릿 속에는 일찍이 유의태가 아들 도지에게 침술의 정수를 가르치며 한 말이 비껴가고 있었다.
'신체에 이름 붙은 각 혈(穴)은 좁쌀 알갱이만하다. 그러나 그 좁쌀 알갱이 만한 면적 속에서도 가장 정(精)한 곳은 오직 한 군데 머리카락을 뽑으면 생기는 그런 작은 구멍 하나뿐이다.'
그때 도지나 물었다.
'왜 그러하오니까?'
'이치를 들으리라.'
물꼬가 막혀 종당에는 커다란 수로가 온갖 잡물로 뒤덥혀 거기 괸 물이 온통 썩어가는데 물꼬의 아무 곳이나 작대기로 쑤신대서 물꼬가 트이지 않는다. 안 쑤시는 것보다 변화는 줄 수 있되 전체의 물꼬를 확실히 열어주는 길은 애초 물꼬를 가로막은 한 개의 이물질을 들어내는 길이다. 그 한 개의 이물질의 위치가 곧 머리카락 뽑은 듯한 침혈(鍼穴)이다.
--- p.295
세상 아들 낳고자 안달하는 여자가 얼마나 많으며 그 소원이 얼마나 치열한 것인가를 허준도 안다. 확실하게 아들을 낳는 방법이라면 서낭당 돌귀신에도 빌고 무당들의 푸닥거리도 마다 않는 아이 벤 여자들이 의원의 이름을 내걸고 장담해 나선다면 누가 따르지 않겠으며 솔깃해하지 않으랴. 설사 방술대로 지시하여 실패한다 할지라도 부산포의 말처럼 어차피 세상에 태어나느 모습은 반이 남자요 반이 여자일진대 덮어놓고 사내아이라 우신들 크게 밑지는 확률은 아닐 것이다.
--- p.201
눈물을 지우고 시선을 들자 기암괴석 바위가 가파른 오도쪽 해안을 돌아 황포 쌍돛대가 마악 하나로 겹친 채 서해의 격랑 속으로 멀어가고 있었다.
'개 같은 새끼들!'
문득 허준의 입에서 배를 타고 멀어가는 그 양반 친구들 외 또 한 무리 그가 사귀는 천한 태생의 친구들과 어울려 놀 때 쓰는 된소리가 뱉어졌다.애써 비웃으려던 허준의 입이 씰룩였다.
'더러운 새끼들!'
허준의 입이 그의 진짜 모습인 상놈의 소리를 냈다. 물론 그 말들은 배를 타고 멀어지는 친구들을 욕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 친구들을 태생에서부터 갈라놓은 세상의 제도와 거기 높다랗게 다리를 꼬고 앉아 내노라 하는 세상 모든 양반들을 향한 욕지거리 였다.
'이따위 세상! 사그리 불태워버려!'
말끝에 허준의 호흡이 폭발했다.
--- p.9
'고금의 의서에 무불통지하고 보하고 사하는 의술을 통달하고도 의원으로서 더이상 갖출 무엇이 있단 말씀이온지....?'
'사랑이다.' 유의태의 대답이 짧았다.
--- p.142(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