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19년 11월 1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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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558쪽 | 754g | 150*220*26mm |
ISBN13 | 9791196830113 |
ISBN10 | 1196830118 |
발행일 | 2019년 11월 1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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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558쪽 | 754g | 150*220*26mm |
ISBN13 | 9791196830113 |
ISBN10 | 1196830118 |
서론 1장 동서 살롱에서 “마자르인-유대인 잡종” 비유대적 유대인의 모순 다뉴브의 블룸즈버리: 급진적인 반문화 코즈모폴리턴의 논리, 기독교적 결론 2장 전쟁의 십자가를 지고 “황무지” 되살리기 부르주아 급진주의: 헤게모니 프로젝트 고통스러운 정신과 끔찍한 기계 덧없이 스러진 국화 노예 반란과 카바레 3장 붉은 빈의 승리와 비극 길드 사회주의와 “기능의 왜곡” 초기 신자유주의와 계산논쟁 붉은 휘장이 드리운 도시 침몰하는 배의 선장 4장 도전과 응전 파시즘에서 달아나다 바이러스 진단하기 보조자운동 밸리얼 칼리지 마르크스주의: 기독교 정신의 완성 모스크바의 시련 미국의 해자 넓히기 심장과 집 “시장 체제에 대한 깊은 증오” 5장 대재앙과 그 기원 일생의 열정 살인의 메커니즘 신민주 헝가리 운동 전쟁 이후의 계획 6장 부정의와 비인간성 칼의 선택, 일로나의 시련 함께하는 방랑: 공동 연구 기계 속의 시장 경제학자의 진자 언덕 위의 도시 7장 존재의 위태로움 늙은 죄인 자유와 기술 형제의 데탕트 사회주의의 “정신적 재탄생” 공존, 《공존》 부다페스트의 땅거미 에필로그 - 사회주의라는 잃어버린 세계 감사의 말 주 해제 - ‘통합적’ 경제학과 ‘총체’로서의 인간 찾아보기 |
돌이켜 생각해보면 칼 폴라니라는 이름을 처음 접했던 때는 지금으로부터 약 9년 전인 2010년 <<인문 고전 강의>>(강유원)라는 책을 통해서였던 듯하다. 이 책에서는 여러 권의 고전을 다루고 있는데, 그 중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을 두 개 장에 걸쳐, 시장 자본주의의 ‘자기 조정 시장 신화’와 ‘소외된 노동’이라는 내용을 중심으로 독해하고 있다.
덕분에 마르크스 외에 경제적 측면과 역사적 측면 모두에서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칼 폴라니’라는 인물을 알게 되었다. 그 후 기회가 될 때마다 국내에 번역된 칼 폴라니의 저서들- <<거대한 전환>>, <<다호메이 왕국과 노예 무역>>, <<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 <<인간의 살림살이>>-을 구입하였으나 다 읽지는 못하고 서문이나 해제를 읽는 정도에 그쳤다. 그래서 최근 큰 결심을 하고 <<인간의 살림살이>>를 조금씩 읽어나가고 있는 찰나, 반갑게도 개러스 데일의 <<칼 폴라니 : 왼편의 삶>>이 출간되어 읽게 되었다.
개러스 데일은 격동의 20세기를 씨줄로, 칼 폴라니라는 인물을 날줄로 엮어가며 한 필의 멋진 테피스트리를 완성시켰다. 이 책은 시대순서의 서술 방식, 구체적으로는 칼 폴라니의 해외 이주(또는 망명)에 따른 주 활동장소의 변화에 따라 서술하고 있다. 1-2장은 헝가리 시절(1886-1919), 3장은 오스트리아 시절(1919-1933), 4-5장은 영국 시절(1933-1947), 6-7장은 북미 시절(1947-1964)을 주로 다루고 있다.
폴라니는 한 마디로 ‘극단의 시대’를 산 인물이다. 이 시대의 역사적 사건들-1차 세계 대전, 파시즘, 2차 세계 대전, 유럽 좌파의 활동과 역사, 냉전 시기 동유럽과 소련의 관계 등-에 대한 이해 없이는 그의 시장 사회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이해할 수 없다. 때문에 개러스 데일은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촘촘히 엮어 나가며, 그 속에서의 폴라니의 행동과 사유를 묘사한다. 폴라니의 시장 사회에 대한 독특한 비판은 헝가리에서 정치활동(갈리레이 서클), 1차 세계 대전의 발발과 참전, 오스트리아 망명 시절 수도 빈에서의 사회민주주의 노동당의 승리에 따른 급진적인 정책과 실패, 파시즘의 경험, 영국에서의 기독교 사회주의 운동과 노동자 교육협회에의 참여, 북미 시절 컬럼비아 대학교 객원교수로서의 강의와 연구 등 그의 다양한 활동과 경험들 속에서 형성되었음을 개러스 데일은 자세히 보여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폴라니의 다양한 인간적 면모- 사랑, 좌절, 희망, 분노 등-를 들여다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부분과 소소한 재미를 느꼈던 부분들이있다. 우선, 폴라니와 폴라니의 동생(마이클 폴라니)의 관계이다. 칼과 동생 마이클은 가족으로서 우애는 상당히 두터웠던 듯하나, 사상적 측면에서는 그러지 못했던 칼은 ‘케인즈주의에 입각한 동생의 자유주의보다 확실히 왼편에 있었’으며 더 급진적이었다. 둘은 서신을 통해 정치적 의제(예컨대 소련에 대한 태도)로 격렬한 논쟁을 자주 벌였는데, 심지어 병세가 위중한 칼이 런던에서 마이클을 만났을 때도 그칠 줄 모르고 옥신각신 했다는 묘사에서는 안타까움을 느꼈다. 때로는 사상이 피보다 진한 법이다.
폴라니의 출신(헝가리), 여러 차례의 해외 망명과 이주 그리고 왕성한 활동으로 그가 관계 맺었던 20세기의 뛰어난 사상가나 정치가와 관련된 이야기는 소소한 재미를 준다. 개인적으로 폴라니와 그의 고향 친구였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루카치, 영국시절 사상적인 교유를 맺었던 노동당의 토니와 콜, 폴라니의 기계에 대한 비판과 결이 비슷했던 루이스 멈퍼드, 미국 컬럼비아 시절 폴라니와 같이 연구했던 고대 연구로 유명한 모지스 핀리와의 일화들이 기억에 남는다.
내가 알기로 국내에 출간된 칼 폴라니의 전기는 이 책이 처음이다. 그만큼 의미가 있지만, 최초라는 명칭이 주는 장점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이 책의 가치는 분명하다. 개러스 데일은 20세기의 역사와 지성사 속에서 폴라니의 삶과 사상을 자리매김함으로써 폴라니라는 인물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때문에, 폴라니를 처음 읽는 사람뿐만 아니라 연구자들에게도 유용하리라 생각한다. 폴라니의 저서들을 읽을 때 그의 사유의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 옆에 두고 반드시 참고해야할 책이다.
마지막으로 폴라니의 딸이 회고록에 남긴 글을 인용하고자 한다. 그에 대한 아래의 짧은 묘사를 구체적이고 입체적으로 이해하고 싶다면 개러스 데일의 이 전기를 꼭 읽어보길 권한다.
“아버지는 평생 사회주의자였다. 그러나 어떤 정당과도 관련을 맺은 적이 없으며, 어떤 정치 운 동에도 관여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결코 어떤 교설의 주창자도 아니었지만, 유럽 사회주의 운동 내부의 주요 논쟁들에 수차례 영향을 미쳤다. 아버지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었지만 사회민주주의자는 더더욱 아니었다. 휴머니스트였지만, 탁월한 리얼리스트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사회의 실재와, 이 실재가 사회에서 삶을 꾸려나갈 수밖에 없는 우리 모두의 행동과 가치관, 이념을 어떻게 제약하고 속박하는가를 잘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내적 필연에 따라 행동과 사상의 자유를 실천하고 살았으며, 결코 결정론이나 숙명론에 굴복하지 않았다.”(<<인간의 살림살이>>에서 재인용)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칼 폴라니를 잘 몰랐다. 아마 이름만큼은 읽었을른지 모른다. 하지만 스쳐갔을 것이고, 강조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혹은 그 이름까지 기억하고, 염두에 둘 만큼 나의 상황이 여유롭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 이름은 낯설었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 칼 폴라니라는 이름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의 역사와 경제에 대한 설명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듯이. 마치 시대가 그를 불러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칼 폴라니.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봐야 했다.
그는 헝가리 태생의 유대인이었다. 헝가리에 애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헝가리라는 한 나라에 매몰되어 세상을 보지 않았고, 오히려 영국을 그리워했으며, 미국에 희망을 걸기도 했다. 또한 유대인으로서 자각도 별로 없었으며, 오히려 기독교도였다. 그러나 교회에 나가지 않고, 기도도 드리지 않는 기독교 신자였다. 제목에서 보듯이 그는 분명 ‘좌파’였다. 평생 ‘왼쪽’의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는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시장 경제를 비판했다. 산업혁명이라는 ‘거대한 전환’ 이후 인간과 자연이 상품화되어 버렸고 시장만능주의가 도래했다고 주장했다. 이 시장경제의 자본주의는 인간을 소외시키기 때문에 오래 지속될 수 없을 거라 생각했으며, 대신 비(非)시장의 여러 제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분명 사회주의를 옹호하고 그 시대가 오기를 갈망했지만, 그가 얘기한 사회주의는 지금 흔하고, 쉽게 얘기하는 사회주의와는 조금 다른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사회민주주의와도 다른, 말하자면 길드 사회주의, 혹은 노동조합 사회주의라고 수식어를 붙여야 조금 더 정확해지는, 그런 사회주의였다. 그가 추구한 노선은 별로 현실성이 없는 것이었고, 또 현대적이지 못한 느낌이 든다. 게다가 당대에 대한 그의 분석은 종종 빗나갔고, 그런 의미에서 그는 조금 때 지난 좌파의 느낌을 가질 수 밖에 없었고, 또 선명성이 각광받는 냉전의 시대에 더더욱 그의 이름을 불리워지지 않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왜 그의 이름이 다시 소환되고 있을까? 이미 50년도 더 전에 세상을 떠난 인물을.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의 홍기빈 소장은 바로 신자유주의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인간의 합리성에(만) 기초를 둔 현재의 경제학이 놓치고 있는 것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통합성’에 관한 인식이 필요한데, 바로 칼 폴라니가 그것을 지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칼 폴라니는 개인의 관점을 넘어서 대중의 관점에서, 평화와 공존을 꿈꾸는 인류의 관점에서 세계를 보았다는 것이다.
개러스 데일의 칼 폴라니 평전은 칼 폴라니의 삶을 연대기적으로 따라가면서 그의 사상적 편력과 함께 인간 관계, 정치적 부침 등을 세밀하게 적고 있다. 특히 그 시대와 관련한 다양한 정치가, 경제학자, 사회학자의 관점을 덧붙이면서 칼 폴라니가 그에 대한 어떤 대응을 했는지를 자세하게 덧붙이고 있다. 단지 칼 폴라니의 주장만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 그가 방대한 이론적, 실천적 흐름 속에 어떤 위치를 점했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다양한 인물들의 사상을 이해하고, 그 관계를 파악해야 해서 그렇게 간단히 이해할 수 있는 책은 아니다(그렇다고 난해한 책도 아니지만). 칼 폴라니의 생각을 명료하게 정리하는 것도 아니고, 이미 어느 정도는 그에 대한 사전 지식을 갖추고 있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어서 칼 폴라니의 주장이 명료하게 이해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의 이론과 비전도 조금은 선명해진다. 그는 편협함을 반대했으며, 파시즘을 거부했으며, 공존을 지향했다.
시장경제를 전환하는 거대한 시대는 올까
- 개러스 데일, 『칼 폴라니 - 왼편의 삶』
칼 폴라니는 세계시민을 지향했다. 코즈모폴리턴의 논리는 근원적으로 반유대주의 논리와 통한다. 그는 반유대주의를 전통에 세우고, 코즈모폴리턴의 논리를 그 반대편에 세웠다. 초국적 네트워크에 연결된 코즈모폴리턴은 외국에서도 편안함을 느낄 준비가 되어 있다. 유대주의가 유대 공동체라는 공고한 장소를 중심으로 움직인다면, 코즈모폴리턴은 공동체 너머에서 빛나는 보편윤리를 지향한다. 폴라니와 그 형제들은 어린 시절부터 여러 언어를 사용했다. 집에서는 주로 독일어를 썼다. 헝가리어와 영어, 프랑스어까지 종종 식탁에서 쓰이곤 했다. 폴라니는 말년에 언어가 “가난의 시기”에 자신에게 “학습의 세계를 꾸준히 열어주었다”고 회상한 적이 있다. 언어는 세계관의 지평을 넓힌다. 모국어에 갇힌 사람은 얻을 수 없는 세계의 지평을 다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코즈모폴리턴은 공통의 인간성을 특히 중시했다. 폴라니가 반유대주의를 비판한 것은, 유대주의는 무엇보다 특수한 정체성(선민의식 같은 것)을 본질로 몰고 가기 때문이다. 코즈모폴리턴은 정치적 통일성과 자유를 국가 규모에서 세계 규모로 확대하는 입장으로 옹호한다. 칸트가 말한 세계종교의 사상이 여기에는 스며들어 있다. 폴라니는 “나는 모든 존재의 자유를 옹호하는 코즈모폴리턴”이라고 선언했다. 동시에 그는 “나는 도서관만 있으면 어디든 편안함을 느낀다.”고도 얘기한 적이 있다. 그는 특수성이 아니라 보편성을 지향했다. 그 보편성으로 그는 어디에 가든 편안한 마음을 느끼는 존재가 되려고 했다. 책만 있다면 그는 낯선 것도 낯설지 않게 느꼈다. 그렇다고 그를 반국가주의자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는 “조국에 대한 불성실, 혹은 조국이 없기 때문에 어디서든 똑같이 편안함을 느끼는 무미건조한 존재”와 국제주의자를 명확히 구분하려고 했다.
이런 폴라니에게 파시즘은 공포의 대상이면서 투쟁의 대상이기도 했다. <거대한 전환>의 씨앗이 뿌려진, 전쟁이 할퀴고 간 갈리시아의 폐허에서 폴라니는 새로운 사회상이 나타나기 전에는 실효성 있는 윤리적 실천을 할 수 없을 거라고 예언했다. 그는 이 책을 저술하던 시절, 당대 학문의 쟁점들을 자유주의 세계질서의 몰락, 전체주의의 등장, 경계계획의 사회학, 대공황의 원인을 파악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골똘히 생각했다. 대공황의 근원은 무엇일까? 자유주의 문명과의 불화는 얼마나 대대적으로 빚어지고 있는 것일까? 자유주의 정치경제가 돌이 킬 수 없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고 있는 걸까? 경제적 자급자족, 협동조합주의, 계획경제로 전화하는 과정이 진행 중인 걸까? 그렇다면 가장 지독한 사례인 파시즘과 스탈린주의를 정반대 현상으로 이해해야 할까, 아니면 전체주의 쌍생아로 이해해야 할까? 불황에 타격을 입은 유권자들이 히틀러 쪽으로 돌아선다는 진부한 견해 외에 위기와 파시즘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245~246쪽)
<거대한 전환>에서 폴라니는 네 가지의 핵심 논지를 제시했다. 첫째는 인류학적 원칙이다. 자본주의 시장 원리는 전통적인 인간의 사회구조와 결별함으로써 기독교-사회주의적인 가치들을 짓밟았다. 둘째는 역사철학에 대한 주장이다. 서구 문명은 사회를 경제 영역과 정치 영역으로 분리함으로써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갈등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셋째는 보호주의에 대한 기독교 사회주의식 이해와 보호주의와 시장 체제의 양립 불가능에 대한 오스트리아식 분석을 독특하게 결합한 것이고, 넷째는 현대 역사에 대한 분석적인 조망이다. 그는 앞의 세 주장을 양차대전 사이의 정치경제와 연관 지어 국가 수준과 국제 수준의 정치, 경제 과정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꼼꼼히 살폈다. 그는 이 책에서 당시 세계 위기를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오늘날의 세계 위기는 궁극적으로 산업 문명의 첫 단계인 시장-경제 때문이다. 지난 25년은 시장경제를 발판으로 한 국제 경제체제가 파국을 맞은 결과였다. “경제적인” 사회는 유토피아다. 모든 인간 사회에서 경제는 전체 사회의 필요에 종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경제체제의 개혁은 사회 붕괴를 각오하고라도 이루어내야 한다. 민주적인 방식이냐 비민주적인 방식이냐라는 선택지가 놓여 있을 뿐이다. 유럽에서 민주적인 방식은 효과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결국 파시즘이 등장했다. 미국은 뉴딜의 처음 몇 년 때문에 예외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세계적인 과정이다. 국제적인 삶은 재통합될 것이다. (248~249쪽)
폴라니가 경제 제도와 사회질서의 관계를 묘사할 때 가장 빈번하게 사용한 단어는 “묻어들어 있음embeddedness”이다. 이 단어는 개인이 한 일이나 개인의 기술보다는 더 넓은 사회적 맥락에서 그것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항상 강조한다. 이를 통해 그는 “원시” 사회에서 인간의 역사 전반으로 조리개를 더 넓게 열고 일반적으로 경제행위가 물질적인 상품을 추구하는 이기적 욕망이 아닌, 자부심, 위신, 공적인 인정, 사적인 평판 같은 동기에 의해 지배되는 현실을 관찰했다. 18세기까지도 서유럽의 경제는 아직 사회 속에 “가라앉아” 혹은 “묻어들어” 있었다. 19세기 이후 자기조정 시장이 독립 체제로 확실히 자리 잡으면서, 사회는 시장 속으로 “묻어들어”가서 모든 제도가 시장의 장단에 춤을 추게 되었다. 이제 인류에게 절박한 과제는 산업 문명을 인간 존재의 요구에 맞춰 조정하는 일이 되었다.
이를 위해 폴라니는 경제결정론이 양산한 편견과 경제주의적 오류에 맞섰다. 그는 산업 문명에서 삶의 의미를 이해하는 새로운 토대를 이끌어내려고 했다. 그는 노동자들을 고난의 보편성으로 빠뜨리는 원천을 시장 경제에서 찾았다. 신자유주의가 주류가 되면서 시장화에 수반되는 도덕의 타락과 사회 혼란에 대한 혐오가 넘치지만 아직 시장 체제를 해체할 프로젝트는 마련되지 않고 있다. 자본주의를 견제하던 사회주의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지금 우리는 자본주의가 전일화된 사회를 살고 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완전한 승리라는 허구적인 신화로 자본가는 인류의 미래를 시장경제 체제에 종속시키려고 하고 있다. 이 체제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삶의 의미를 얻을 수 있을까? 이전의 경제결정론만큼이나 커다란 위험이 전일화된 시장경제 논리에도 그대로 내포되어 있다. 우리는 지금도 폴라니가 말한 ‘거대한 전환’을 여전히 사유해야 하는 상황에 있는 것이다.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