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시련이 쓸모 있기에 사랑해야 한다는 게 아니다. 나의 시련은 존재하기에 사랑해야 한다._시몬 베유, 《중력과 은총 Gravity and Grace》
ㅡ 시몬 베유Simone Weil(1909-1943) 나의 시련이 쓸모 있기에 사랑해야 한다는 게 아니다. 나의 시련은 존재하기에 사랑해야 한다.
ㅡ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1906-1975) 저는 한 번도 어떤 민족이나 집단을 ‘사랑’한 적이 없습니다. 저는 ‘오로지’ 친구들을 사랑하며 내가 알고 믿는 유일한 종류의 사랑은 개인에 대한 사랑입니다.
ㅡ 메리 매카시Mary McCarthy(1912-1989) 두 개인 사이에 노골적이고 직설적인 경합이 있어서는 안 된다. 유일성과 농도 짙은 복수성이 부딪치고 경합해야 한다.
ㅡ 수전 손택Susan Sontag(1933-2004) 연민을 느끼는 순간 우리는 고통을 초래한 원인과 공범자가 된다. 우리가 느끼는 연민이란 무기력이나 무지를 드러낼 뿐이다.
ㅡ 다이앤 아버스Diane Arbus(1923-1971) 사진 찍힌다는 것은, 조금, 상처가 되는 것 같아
ㅡ 조앤 디디온Joan Didion(1934-) 삶은 빨리 변한다. 삶은 한순간에 변한다. 저녁 식탁에 앉으면 당신이 아는 세상이 끝난다. 자기연민의 문제.
이 책은 감상주의를 배제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직시하는 미학적·정치적·도덕적 의무를 열정적으로 설파했던 여성 작가, 지식인 그리고 예술가들에 관한 책이다. 위기 상황에 도움을 구하기에는 이상한 캐릭터들을 캐스팅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여기 이렇게 그녀들이 있다. (…) 이들을 하나로 묶은 것은, 문체의 유사성과 함께 20세기 후반 미국을 사로잡았던 고통과 정서적 표현의 문제에 대해 공통적인 관점을 견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문제들은 여러모로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않고 지속되고 있다. 이 여성 작가들은 직접적이고 선명한 시각으로 위로도 보상도 없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직시하는 과업을 자발적으로 떠맡았기 때문에 터프하다. --- p.9-11 「들어가며」 중에서
천형이 “기독교의 중심”(SWR, 471)이라고 주장하며 베유는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인한 인류의 구원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번뇌 그 자체가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말한다. 베유가 보기에 구원은 도저히 견딜 수 없어야만 하는 천형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보상이다. 그리하여 천형을 통해 베유는 가톨릭 교회와 가장 큰 갈등을 빚은 주장으로 다가가게 된다. (…) 베유가 주목한 이단성은 구원이 아니라 ‘비극’이 하느님의 신성한 사랑의 증거라는 주장에서 나온다. “신앙을 막론하고 어떤 사람이든 허위의 심연으로 도피하는 대신 천형을 마주할 만큼 진리를 사랑한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일익을 담당한다.”(SWR, 463) --- p.75-76 「1. 시몬 베유」 중에서
아렌트는 수난이 눈멀고 귀먹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수난에 주목해야 할 의무를 거부한다. 자칫하면 사건이 아니라 사건에 대한 감정으로 주의를 분산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분명히 주장하듯, 이 재판에서 유대인의 수난이 설 자리가 없었던 건 논쟁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논란의 대상은 아이히만의 책임 여부였다. 그러나 《혁명론》에서 아렌트는 좀 더 보편적인 관점에서 수난을 공적 영역에서 추방한다. 그 이유는 인간이 수난에 무관심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도저히 무관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 p.133 「2. 한나 아렌트」 중에서
세계의 사실을 존중한다는 것은 나이브하고 단순하고 보수적이거나 그저 고집을 부리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사실은 종종 그 자체로 자명해서 더 이상의 해석이나 숙고, 행동이 불필요하다고 간주되기 때문이다. 매카시에게 하나의 사실은 논쟁을 해결하거나 정치적·미학적 참여를 매듭짓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의 시작이다. 사실들이 대화를, 탐구를, 쟁론을 시작한다. 사실의 저항성은 일상적 경험에서 사고, 예상치 못한 요소, 놀라운 것, “기적”을 밝혀 보여주는 데 있다. 이 때문에 사실주의 factualism가 매카시의 취향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 p.216-217 「3. 메리 매카시」 중에서
마비와 도덕적 무의미의 바로 뒷면인 유약한 작인은, ‘연민 sympathy’이라는 이름으로 더 친근하다. 자신의 연민이나 분노, 심지어 고통이라는 느낌에서 쾌감을 도출하든 단순히 즐기기만 하든 관객이 보는 행위를 할 때, 타자의 수난은 연민의 예술이 낳은 효과로 25년 이상 엄청난 비평의 관심을 끌어왔고 여러 장르와 시대를 가로질러 검토되고 재검토되었다. (…) 손택은 독자에게 이 이미지들에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능력을 되살리려 노력하면서도, 연민을 집어치우라고 훈계한다.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주며” 또한 공포의 참상과 우리의 공모를 위장하기 때문이다. --- p.273-274 「4. 수전 손택」 중에서
“내가 보기에 사람들이 벗어나야 하는 어떤 회피, 어떤 고상함 niceness이 존재한다.”(DAA, 2) 도구로서 카메라는 회피하지도 미화하지도 않는다. 카메라에는 “일종의 엄정함”과 “우리가 평소 겪지 않는 면밀한 응시가 있다. 이는 우리가 서로에게는 쓰지 않는 방식이다. 우리는 카메라가 개입할 때보다는 서로에게 더 나이스하다. 카메라가 개입하면 약간 차갑고, 약간 가혹하다.”(DAA, 2) 그녀는 마빈 이스라엘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인정했다. “내 생각에 사진 찍힌다는 것은, 조금, 상처가 되는 것 같아.”(R, 146). --- p.315 「5. 다이앤 아버스」 중에서
디디온은 자기연민을 피하는 이상은 불가능하지만, 금욕주의는 우리를 위로하는 자기망상의 일환이라는 결론으로 타협한다. “우리는 이상화된 야생의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복잡성으로 인해 실패를 거듭하는 불완전한 필멸의 인간이고, 필멸의 운명을 밀어내면서도 항상 의식하고 있다. 이 필멸은 우리 안에 깊이 새겨져 있어 상실을 슬퍼할 때 우리는 또한, 좋든 나쁘든, 우리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다. 과거의 우리 자신 말이다. 이제는 없는 우리 자신 말이다. 다시는 될 수 없는 우리 자신 말이다.”(YMT, 198) 디디온은 마침내 자기가 느끼는 상실의 감정을 비탄의 분출이나 ‘통곡’이나 ‘울부짖음’ 속에서가 아니라 감정적 자기 반추의 여지를 남김으로써 살필 수 있게 된다. --- p.403-404 「6. 조앤 디디온」 중에서
이 책에서 다루는 터프한 지성인들의 공통점은, 누구보다 ‘차가운’ 현실 인식을 견지하되 사회적 불의나 정치의 실패로 부당하게 수난받는 약자들을 구제하고 개혁을 선도하려는 의지만큼은 ‘뜨겁다’는 데 있다. 어떤 남성 지식인에 비교해도 ‘터프함’에서 뒤지지 않았던 이들은, 온정과 연민이란 수난자가 아니라 불행한 수난자들의 시련에 공감하는 자신의 도덕성에 심취하는 허영심에 불과하다고 믿었기에, 무력한 감상주의를 거부하고 환상 없는 현실 직시에 근거한 유효한 정치적 비전을 해법으로 제시했다. 따라서 이들의 “차가움” 나아가 “비정함”은 현실을 대하는 감정의 온도라기보다는 잘 계산된 “지적 스타일”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 p.415 「역자 해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