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19년 11월 25일 |
---|---|
판형 |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 140쪽 | 218g | 111*190*16mm |
ISBN13 | 9788972751403 |
ISBN10 | 8972751405 |
발행일 | 2019년 11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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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형 |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 140쪽 | 218g | 111*190*16mm |
ISBN13 | 9788972751403 |
ISBN10 | 8972751405 |
야간 경비원의 일기 009 「야간 경비원이 일기」에 이어 124 작가의 말 136 |
“이것은 밤의 도시에 대한 이야기다. 매알 밤 도로 위를 떠도는 그림자에 대한 이야기며 여성 혐오와 가난에 대환 이야기고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두 문장으로 줄일 수 있다. 다 끝났어. 돈 때문에 하는 거야. 이 이야기는 한 문장으로 줄일 수도 있다. 그것을 실현하지 않고 그것을 하는 것.” (p.9)
소설은 서울스퀘어(옛 대우빌딩이 이제는 이런 이름으로 불리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에서 야간 경비원으로 일하는 ‘나’의 블로그 글에 기반한다. ‘야간 경비원의 일기’라는 소설의 제목은 이렇게 적는 블로그 글 중 ‘야간 경비원의 일기’라는 동일한 제목을 붙인 게시물에서 따온 것이다. 블로그에는 그러니까 소설에는 이외에도 ‘공유’, ‘새해 목표’, ‘완전한 일상’과 같은 제목의 글 그러니까 게시물이 나열되어 있다.
“말하고 나니 그럴듯한 것 같기도 하고 궤변인 것 같기도 했다. 하나 마나 한 말인 것 같기도 하고 필요한 말인 것 같기도 하고, 말하기 위해 말한 것 같기도 했다.” (p.35)
‘야간 경비원의 일기’라는 게시물에는 ‘포스트 휴먼’, ‘물 위를 걷는 남자‘, ’나는 경쟁이라는 개념에 반대한다‘와 같은 부제가 붙어 있다. 첫 번째 게시물에는 부제가 없다. 첫 번째 ’야간 경비원의 일기‘는 2018년 1월 3일 새벽 2시 51분에, 마지막 ’야간 경비원의 일기‘인 ’야간 경비원의 일기 15 : 잘 모르겠네요, 니키 타르씨‘는 2018년 3월 24일 11시 58분에 작성되었다.
“... 그는 짧게 자른 머리에 금목걸이를 하고 통 넓은 기지 바지를 입는 90년대 사람으로 90년대에 머무르는 바람에 2010년대 후반에 힙스터가 된 시대착오적인 동시대인이었다.” (p.20)
소설에는 ’나‘ 이외에 여러 인물도 함께 등장한다. 나와 함께 야간 경비원으로 일하는 조지(훈)이 있고, 나와 함께 영화나 문학과 관련한 이야기를 하는 기한오가 있다. 기한오 때문에 가게 된 독서 모임에서 만난 에이치도 있는데, 에이치는 여성이고 나는 에이치에게 나름의 관심을 갖고 있으며, 에이치는 수학과 대학원생으로 ’실현이 불가능한 시나리오‘를 쓴다. 그리고 나, 기한오, 에이치가 속한 독서 모임을 만든 나이를 알 수 없는 인물인 이성복이 있다.
“... 이성복은 우리가 함께 온 것에 놀라지 않았다. 대화가 시작된 뒤에는 늘 그렇듯 좌중을 압도했다. 그의 입에서 각종 시인과 소설가, 평론가들의 일화와 그들에 대한 평가, 미학적 통찰이 스며든 촌철살인의 문구가 난무했다. 한마디로 따분했다.” (p.57)
소설 안에서 나는 이성복에게 억하심정이 있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에이치에게 셀카를 보내기 때문인 것 같다. 소설이 한참 진행된 후반부에서 작가는 아래와 같이 이성복이라는 작명에 대해 언급한다. 변명인 것 같지만 변명은 아니고, 일종의 돌려까기인 듯 한데 그 속내는 문학판 바깥의 우리는 알 수도 없고 사실 그다지 관심도 없다. 여하튼 나는 이성복의 서정시편도, 정지돈의 냉소도 모두 좋아한다.
“이성복 시인의 이름을 쓴 것에 대한 정중한 이의 제기가 있었다... 우선 읽어주셔서 감사하다... 답변을 드리면...
1. 글에 등장하는 이성복은 실제 시인 이성복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2. 이런 걸 굳이 설명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3. 관련이 있다 한들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
4. 이제 그는 다시 등장하지 않을 것이다.” (pp.110~111)
예전에는 실험적이라, 라고 할만한 시도 많았고 소설도 있었다.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다, 어쩌면 내가 찾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평준화된 수준의 글들을 읽고 그것들 안에서 좋은 것과 좋지 않은 것까지 등급을 매기고 구분하자니 때로는 갑갑하다, 뭐 혼자 그러고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나마 정지돈 같은 작가의 글을 읽을 때 이런 갑갑함이 조금은 해소된다, 고 느낀다. 그것들 안, 에 억지로 가두지 않아도 될 것 같아 그렇다.
정지돈 / 야간 경비원의 일기 / 현대문학 / 139쪽 / 2019
정지돈의 소설들은 좀 긴 잡담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문득문득 위트와 유머가 번뜩이고, 어려운 내용은 하나도 없다. 특기할만한 서사가 없기에 소개하기도 좀 애매한데,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야간 경비원들이 몇 명 등장하고 그중 하나가 쓰는 일기라고 생각하면 된다.
사람들은 서사가 파괴된 실험적 소설을 읽고 나면 대개 아래와 같은 반응을 보인다.
1. 이게 소설이야?
2. 내가 모르는 뭔가가 숨겨져 있는 게 분명해
3. 음... 그렇군
1에 속하는 사람들은 다시 두 부류로 나뉜다.
1.1 책을 거의 읽지 않는 사람
1.2 정말 대단히, 순수하게, 진심으로 스트레이트한 성격을 가진 사람
이들은 블랙 유머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풍자나 해학, 한두 번 꼬인 시니컬한 표현에 뚱한 표정을 짓는다. 쉽게 말해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고 우리 세계는 대부분 이런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 오늘도 정상 궤도를 질주한다. 스트레이트 하게, 나는 이들에게 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산다.
2에 속하는 사람들은 책 읽기에 열심히고 거기서부터 뭔가를 배우려는 사람들이다. 활자가 인쇄된 종이 무더기에 무의식적으로 권위를 부여하며 마음이 무언가에 대한 열정과 사랑으로 늘 뜨겁게 달아오른다. 그냥 먹고 끝내면 될 일인 평양냉면을 그 유래부터 진지하게 설명하거나 <테넷> 같은 영화에서 우리가 몰랐던 소름 돋는 복선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끈덕지게 늘어놓는 사람들이다. 음모론에 쉽게 빠지거나 간혹 앤디 워홀 같은 사람을 예술가로 만드는 실수를 저지르긴 하지만 대체로 마음이 순수하고 착한 사람들이다. 이들을 친근하게 '오덕'이라 부르기도 한다.
3에 속하는 사람들은 권위와 정돈된 이론에 태생적으로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이다. 세상에 대해선 시니컬한 태도를 보이지만 그래도 사고는 꽤 열려있는 편이다. 이들에게 설명을 요구하면 '음... 뭐 그냥 그런 거지' 라거나 '네가 본 대로 이해하면 돼' 같은 하나마나한 대답을 한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다시 아래와 같이 분류할 수 있다.
3.1 설명을 할 수는 있지만 그게 진정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사람
3.2 자기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사람
나는 한때 2에 속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내게 문학을 이해하는 능력이 전무하다는 것을 깨닫고 더 이상의 해석을 포기한 채 그냥 3-2처럼 살기로 했다. '살기로 했다'라고 말하면 마치 내가 '선택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무능력에 의한 것이니 그냥 3-2가 '되었다'라고 말하는 게 더 옳은 표현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도 당신이 기대하며 찾았을 '정지돈 <야간 경비원의 일기> 해석' 같은 건 단 한 줄도 쓰지 못한 채 쓸데없는 얘기만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이것이 문학적으로 어떤 실험을 하고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정지돈의 소설들이 꽤 재밌다. 고르라면 장편보다는 단편인데, 처음 읽은 <건축이냐, 혁명이냐>를 워낙에 재밌게 읽은 탓도 있고 잡담과 농담은 늘 길이와 재미가 반비례한다는 지론을 갖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지론은 개인적 취향이 반영된 것이긴 하지만 상당한 경험의 축적으로 귀납된 판단이라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한다.
자, 요약하면 2나 3에 속하는 사람들이라면 <야간 경비원의 일기>에서 무리 없이 재미를 느낄 것이다. 본인이 1에 속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것도 경험이지, 도전! 하는 괜한 의욕은 접고 쿨하게 건너뛰기를 추천한다. 세상엔 읽어야 할 게 차고도 넘치니까.
어둠은 모든 걸 잠재운다. 간혹 어두워질수록 활개를 치는 부류도 있지만 대개는 지난 낮 소진한 에너지를 보충하고자 깊은 잠에 돌입한다. 원치 않아도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무거워진 제 눈꺼풀을 감당하는 걸 버거워한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그리 설계됐다. 허나 모두가 같은 패턴의 삶을 사는 건 아니다. 졸음이 쏟아질지라도 기를 쓰고 깨어 있어야만 하는 사람들도 있다. 책이 다루고 있는 건 경비원이었다. 내가 거주하는 아파트에도 동마다 한 분씩 경비원이 있다. 좀 거대하다 싶은 건물이면 어김없이 경비원이 존재한다. 인건비 절약 차원에서 이를 감축해야 한다며 억지를 쓰는 이들의 목소리가 차츰 높아지고 있는데, 사실 그렇지 않다 하여 경비원이 매력적인 직업이라 여기는 사람은 드물다. 돌이켜 보면 경비원에 대해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는 듯하다. 있지만 없는 것처럼 의식하지 않아 온 셈이다. 호기심이라고 말하면 실례일 테고, 왠지 은밀한 비밀과 만날 것만 같단 생각이 드는 제목을 지닌 책이라 뿌리치기 힘들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세상이 눈앞에 펼쳐지지 않을까란 기대 심리도 약간은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뭔가 다가가기 힘든 실체를 접한 듯한 느낌이 강했다. 처음에는 나의 이해도가 떨어지는 게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나만 그런 게 아닐 거란 확신마저 들었다. 저자의 문장에서는 등장인물끼리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만 같은 뉘앙스가 가득했다. 원래 가까운 듯 하지만 결코 가까워지기가 힘든 게 직장 동료라 들었다. 직급에 따른 위계질서가 존재하고, 입사 동기라면 경쟁 결과에 따라 누군가는 밀려나기 마련이니 그렇다. 적당히 자신을 노출하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물러나는 식의 행태를 보이는 경우가 나만 해도 부지기수였다. 아마 내 주변의 사람들도 나에 대해 도통 모르겠다는 평을 쏟아대고 있을 수도 있다. 여하튼, 야간 경비원이라는 같은 정체성을 지닌 사람들 간의 대화였음에도 오가는 말 속에선 어떠한 정체성도 읽히질 않았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이 존재한다는 말이 뜻하는 바가 무언지, 달라도 너무 다른 인물들 간의 대화를 접하며 난 제대로 느꼈다.
저자는 내가 공통점 발견에 집착하는 동안 침착하게 야간 경비원들의 세계를 구축했다. 누군가는 미래의 저명한 작가를 꿈꾸는 인물인양 난생 처음 들어보는 작가의 이름을 나열했다. 역시나 그에 대해 동료들은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이라는 반응을 보였으나, 그렇다 하여 전적으로 그를 배제하지는 않았다. 함께 그러나 외따로, 좀체 조직 안에 섞이지 못하는 그 모습에서 내 자신이 읽히는 것만 같아 다소 씁쓸했다. 고개를 저으려는 찰나에 저자는 더 큰 부조리를 내 앞에 펼쳐 놓았다. 아침이면 출근하고 밤에는 퇴근하는 본사 직원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권력이 만들어내는 질서가 바로 그것이었다. 칼자루를 손에 쥔 인물은 ‘송 주임’으로 지칭되는 누군가였다. 아마도 비정규직일 야간 경비원은 2년을 넘기기 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게 관례였는데, 이를 도맡은 게 바로 송 주임이었다. 2년을 꽉 채운 후에도 살아남은 인물이 있다면 그건 바로 송 주임과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경우에 속했다. 충성을 맹세하면 살아남는 게 가능할 거 같긴 했지만, 송 주임이 지닌 권력이라 하는 것 역시 신기루였다. 저자가 그려낸 송 주임의 이상행동은 권력의 노예가 된 자가 보일 수 있는 조바심의 발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과연 이 세계를 전복할 수 있을까. 결국 교도소에 수용되고야 만 조지(훈)을 통해 저자는 모든 걸 말하고 있었다. 무언가 부조리할 경우 근본을 뒤흔들어야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까지 않는다. 송 주임이 권력의 최정점에 위치한 인물이 아니었음에도 본사는 그를 제거함으로써 일말의 책임을 진 것처럼 굴었고, 대체 인물이 등장하자 사람들은 우르르 제 살길을 찾아 또 다른 라인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우직하게 “저는 야간 경비원입니다”를 외치며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하는 것이 외려 가늘지만 길게 살아남는 방법으로 여겨졌다. 볼품없을지라도 끝까지 살아남는 게 곧 승자라는 증거는 꼭 이 책이 아니어도 도처에서 얼마든지 발견 가능하다.
나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그냥 수긍하고, 방관자처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가며 버티는 게 멋은 없지만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지름길은 아닐까. 독서가 낳은 생각이 이토록 비루했던 적은 처음 같다. 줄곧 무언가 포장하기 바빴는데, 날것을 응시하자니 마냥 불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