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밤의 도시에 대한 이야기다. 매일 밤 도로 위를 떠도는 그림자에 대한 이야기며 여성 혐오와 가난에 대한 이야기고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두 문장으로 줄일 수 있다. 다 끝났어. 돈 때문에 하는 거야. 이 이야기는 한 문장으로 줄일 수도 있다. 그것을 실현하지 않고 그것을 하는 것.
--- p.9
야간 경비의 수호성인 중 하나로, 구소련 출신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은 정체불명의 어느 시인은 우리 시대를 ‘건물주와 야간 경비원의 시대’라고 했다. 역시 야간 경비의 수호성인이자 부코비나에서 태어나 모스크바 국립대학을 나온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소비에트 연방 최초이자 최후의 파울 첼란 전공자인 블라디미르 니키포로프는 야간 경비원으로 일한다는 사실 자체가 반체제주의자라는 의미라고 했다. 건물주와 야간 경비는 체제와 반체제, 애널리스트와 시인, 아침형 인간과 저녁형 인간, 서사와 반서사, 시와 반시, 휴머니즘과 안티 휴머니즘, ‘자본주의’ 리얼리즘과 ‘사회주의’ 리얼리즘, 카피라이트와 카피레프트, 포스트 미디엄과 포스트 미디어를 뜻한다.
--- p.12
도시 위를 걷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고가도로는 위대한 발명품이다.
문제는 이 도로의 주인이 우리가 아니라는 거예요. 도시의 주인이 우리가 아니고 건물의 주인
이 우리가 아니고 골목의 주인이 우리가 아니고 길을 건널 때도 눈치를 봐야 하고 지하보도에서 잘 때도 눈치를 봐야 하고 광장에 모이는 것도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하늘은 먼지로 가려져 있고 땅은 시멘트로 덮여 있어요. 우리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갖지 못하는데 사실상 누구도 이곳을 볼 수 없고 주인이 될 수 없어요. 부자나 권력을 가진 자가 주인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에요. 끝없이 유예되는 거예요.
우리는 서울역을 지나 만리동 방향으로 걸었다. 작게 조성된 공원과 지하를 파서 광장 형태로
만든 윤슬이 보였다. 계단을 따라 도로 위로 내려갔다.
그래서 저는 서울을 사람들에게 돌려주려고 합니다.
--- p.46-47
서울 시장에 나가시려고요?
조지(훈)이 나를 경멸의 눈으로 쳐다봤다.
제도적인 해결책이 아니에요.
그럼 웃자고 하는 얘기예요?
아니요. 진지하게 하는 이야기예요.
조지(훈)은 국제야간경비원연맹이 자유 소프트웨어재단과 연대를 맺었다고 말했다.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건물과 그 안에 설치된 하드웨어와 하드웨어 안의 세계. 이 세계와 연결된 그 안의 세계. 두 세계를 전복해서 하나의 자유로운 세계로 만드는 게 우리의 목표예요.
--- p.47-48
에이치에게 선물로 뭘 주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시집을 줬다. 최악의 선물, 사이코패스, 히키코모리, 낙오자, 문청, 룸펜, 변태, 감상주의자, 촌놈, 힙스터, 대학원생, 가난뱅이로 몰릴 수 있는 선물인 건 알고 있지만 줬다. 리영리의 시집이었는데 내가 자카르타 출신의 시인인
데 어쩌고 하면서 주절주절하니까, 그만 하라고 했다.
읽어볼게.
--- p.83
이성복 시인의 이름을 쓴 것에 대한 정중한 이의 제기가 있었다.
우선 읽어주셔서 감사하다.
답변을 드리면
1. 글에 등장하는 이성복은 실제 시인 이성복
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2. 이런 걸 굳이 설명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3. 관련이 있다 한들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
4. 이제 그는 다시 등장하지 않을 것이다.
--- p.110-111
조지(훈)은 나에 대해 함구했고 경찰들도 세세하게 캐묻지 않았다. 예상 외로 언론은 사건을 크게 다뤘다. 알고 보니 도시해킹이라고 제1세계에서는 이미 유행한 적이 있는 개념이었다. 도시해커들은 금지되고 제한된 장소를 탐험하고 점거한다. 예술가, 사회운동가, 학자, 익스트림 스포츠 선수 등이 도시해킹을 시도했다. 『도시해킹』의 저자 브래들리 L. 개럿은 도시해킹을 “보안을 잠식하는 행위”라고 정의했다. “시민이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규정하는 말끔한 서사에 위협을 가하여 부당하게 제약받아온 도시 속 우리의 권리를 되찾는 행위.”
--- p.113
니키 타르는 수송동에 있는 호텔에 짐을 풀었고 일주일가량 머문다고 했다. 우리는 의정부 교
도소로 밴을 타고 이동했다. 니키 타르는 내가 야간 근무 중인 빌딩에도 방문하겠다고 했지만 나는 일을 그만뒀다고 말했다. 왜 그만뒀냐고 물었는데 딱히 대답할 말이 없어 우물쭈물하자 니키 타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야간 경비도 예전 같지 않다네, 과거에는 망명 작가들의 안식처였고 도시의 구전설화와 혁명의 바리케이드, 부활의 전초 기지였지만 이젠 그저 시시덕거리는 놈팡이 놈들뿐이지, 라고 말했다. 나는 나와 함께 일했던 야간 경비원들을 떠올렸다. 비록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그들은 그곳에 있었다. 잘 모르겠네요
--- p.121
저는 야간 경비원입니다.
누군가 귓가에 대고 그런데 리마가 사라졌다고 그가 이미 죽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으며 눈을 떴을 때 주변은 캄캄하지는 않지만 서서히 어두워지고 있었고 어디예요 물으니 서울역이라고 하였다.
왜 서울역이에요?
제가 출근해야 하거든요.
기사님.
네.
무슨 기사님인데요? (……)
저는 야간 경비원입니다.
--- 「'야간 경비원의 일기'에 이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