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장메뉴
주요메뉴


닫기
사이즈 비교
소득공제
왕단의 중국 현대사

왕단의 중국 현대사

[ 양장 ]
왕단 저 / 송인재 | 동아시아 | 2013년 02월 20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9.5 리뷰 4건
베스트
역사 top20 2주
정가
22,000
판매가
19,800 (10% 할인)
구매 시 참고사항
eBook이 출간되면 알려드립니다. eBook 출간 알림 신청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3년 02월 20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560쪽 | 852g | 148*210*35mm
ISBN13 9788962620672
ISBN10 8962620677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한국 전쟁의 숨은 전말이 드러난다.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각자의 속셈, 오랫동안 중국이 ‘조선 전쟁’이라는 용어의 사용을 거부하고 ‘항미원조 전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온 이유는 무엇일까?

마오쩌둥은 한반도의 정세 변화가 중국에서 자신의 정치적 포석에 영향을 주기를 원치 않았다. 따라서 마오쩌둥은 북한이 일단 공격하면 지지하고 중국 군대 중 세 개의 조선인 부대와 무기를 북한에 넘겨주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김일성에게 당분간 남한을 공격하지 말라고 권했다. 그 당시 스탈린도 김일성의 계획에 동의하지 않았다. 미국이 이 일에 군사적으로 개입해서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스탈린의 주된 고려 사항이었다.
스탈린과 마오쩌둥이 소극적으로 나오자 김일성은 아주 실망하고 낙담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노력해 중국과 소련의 지원을 얻어냈다. 그 후에 극적인 반전이 일어났다. 선즈화는 2009년 5월 12일 미국 UCLA 중국연구센터에서 열린 강좌에서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혔다. 1950년 1월 17일 주중 북한대사의 환송회장에서 김일성은 술에 취해 크게 울부짖으며 소련 관리들에게 자신의 조선 통일 계획 완수를 지원해달라고 거듭 요구했다. 주 북한 소련대사는 이에 아주 난처해했다. 결국 9월에 스탈린에게 이 상황을 전보로 알렸다. 1월 30일 스탈린은 김일성의 계획에 동의한다는 답신을 보냈다. 그러나 김일성에게 중국에 알리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때 마오쩌둥은 여전히 모스크바에 있었다. 2월 17일에 마오쩌둥이 중국으로 돌아온 뒤 3월 10일에 스탈린이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초청했다. 4월 10일부터 보름 동안 양측은 한반도의 정세에 대해서 논의했다.
김일성은 25일에야 모스크바를 떠났다. 이때 소련은 이미 김일성의 계획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김일성이 반드시 마오쩌둥의 동의를 구해야 한다고 했다. 왜 이런 반전이 일어났는가?
……
중국 공산당과 마오쩌둥은 미국식 민주주의에 대해 적어도 그때는 환영하는 입장이었다. 미국 측은 장제스의 정권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줄곧 중공과의 소통을 적극적으로 강구했다. 그리고 앞으로 중국 공산당이 정권을 탈취한 후 중미 합작을 이룰 공간을 찾으려 했다. 중국 공산당 군대가 난징을 함락한 후 국민 정부는 광저우로 옮겼다. 주중 소련대사도 국민당을 따라 이동했다. 그러나 주중 미국대사는 베이핑에 남았다. 중미 간의 상호 작용에는 본래 각종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스탈린이 이런 상황을 당연히 모를 리 없었다.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지도자로서 그는 당연히 사회주의 진영의 어떤 국가가 미국과 협력 관계를 발전해나가는 것을 허락할 수 없었다. 스탈린은 중공과 미국이 모종의 협력 관계를 수립할 가능성을 막을 방법을 찾아 이러한 추세를 막으려 했다. 김일성이 한국 전쟁을 일으키도록 부추기고 중국을 강제로 미국과 정면으로 대적하도록 해서 중국과 미국의 동맹 가능성을 철저히 막아버리고 중공을 사회주의 진영 속에 가두어버리려는 것이 스탈린의 깊은 속셈이었을 것이다. ---제2강 「군사 : 한국전쟁」 중에서

@ 대약진 운동과 대기근

왜 4000만 명이 굶어 죽는 거대한 재난이 발생하고도 중국에 대규모 항거가 일어나지 않았는가? 대기근을 겪으면서 중국의 통치 기반은 동요되지 않았는가? 이는 인류 역사상 모두 불가사의하게 들리는 일들이다. 그렇다면 원인은 도대체 무엇일까?
……
이런 분석이 성립 가능하다면 우리는 진정 중공 정권을 지탱하는 역량을 파악할 수 있다. 4000만 명의 아사를 초래하는데도 안정적 통치를 유지할 수 있는 비밀은 바로 폭력과 기만에 있다. 이 두 가지는 사실상 하나의 주제처럼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를 관통하고 있다. 이것을 통해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적 현상, 더 나아가 현실적 문제를 해석할 수 있다. ---제4강 「농촌 : 토지개혁에서 인민공사까지」 중에서

@ 마오쪄둥: 자기모순의 결정체

마오쩌둥이 지식인에게 가졌던 태도는 굉장히 모순적이었다. 한편으로는 지식인으로 자처하면서 지식인을 아주 중시했다. 몇몇 대가급 지식인들을 특별히 예우했고 “대학자와는 담소하고 일반 백성과는 왕래하지 않는[談笑有鴻儒, 往來無白丁]” 환경을 조성했다. 역사의 변화에서 지식인의 역할에 대해서도 아주 중요시하면서 “소설이 당을 반대할 수 있다”라는 논조를 제시한 적도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지식인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고 심지어 경멸하기까지 하며 지식인은 농민이나 노동자보다 아는 것이 적다고 말하며 철저한 개조 정책을 채택해야 한다고 늘 생각했다.
마오쩌둥은 다음과 같이 말한 적 있다. “나는 줄곧 지식인은 지식이 없다고 말해왔다. 이 말은 정확하다. 지식인의 꼬리날개는 손오공의 꼬리보다 더 길다.” 이러한 그의 심리는 ‘문혁’ 발발 이전 그가 내부에서 후계자에 관한 연설을 하면서 후계자 선발 조건을 거론할 때 전형적으로 반영됐다. 마오쩌둥은 “젊고 배운 것이 적고 입장이 틀림없어야 한다”라고 명확히 말했다. 젊고 입장이 확고해야 한다는 조건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배운 것이 적은 것’을 후계자 선발의 조건으로 집어 말한 것에는 마오쩌둥의 속마음에 있는 지식에 대한 멸시가 충분히 반영됐다. 나중에 그가 뽑은 후계자들을 보면, 왕훙원과 화궈펑 모두 이 세 가지 조건에 부합한다. 이 세 가지 조건은 마오쩌둥이 입에서 나온 대로 지껄인 말이 아니라 오랫동안 형성돼 갖게 된 관점이었다. 이런 모순된 심리 뒤에는 그가 공부했던 경험이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다. ---제5강 「지식인 : 사상 개조, 후펑 사건 그리고 ‘반우파反右派’ 운동」 중에서

@ 중국 지식인 계층의 소멸

운명이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는 이런 공포감이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 만연해 있었다.
……
그 밖에 군중 운동의 위력으로 지식인들이 저항할 수 없도록 했던 것도 하나의 주된 원인이다. 이런 상황을 후핑은 이렇게 말한다.

대다수 우파가 나중에 고개를 숙이고 죄를 인정한 주된 원인은 바로 그들이 광범위한 군중의 일치된 비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이 이제까지 가지고 있던 관점이나 주장이 흔들리거나 의문시됐고 결국 자기부정에 이르렀다. 일반적으로 정치적 관점의 옳고 그름은 그것이 다른 사람의 동의를 얻을 수 있는가를 기준으로 삼는다. 당신의 관점이 여러 사람의 일치된 반대에 부딪히는 것을 발견한다면 당신은 쉽게 자기 회의와 부정에 빠질 것이다.

중공과 마오쩌둥이 혁명 과정에서 그처럼 군중 운동에 열중했던 비밀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많은 지식인은 건국 이후 점점 자각적으로 독립된 인격을 포기했다. 그리고 혁명, 개인의 자기 개조, 군중의 의지를 옳고 그름의 기준으로 삼았다. 이것은 그 시대 지식인의 집단적 현상이기도 했다. ---제5강 「지식인 : 사상 개조, 후펑 사건 그리고 ‘반우파反右派’ 운동」 중에서

@ 덩샤오핑: 목숨을 건 4통의 편지

덩샤오핑은 수차례의 정치 운동을 겪었지만 다행히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것은 다분히 그의 정치적 성격에 강건함과 온화함이 조화돼 있어서 융통성 있는 정치적 행동을 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덩샤오핑은 일생에서 네 통의 편지를 씀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전망을 지킬 수 있었다.
첫 번째 편지는 문화대혁명이 막 시작했을 때 중국 공산당 중앙 총서기 시절에 쓴 것이다. 당시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에 의해 류사오치와 손을 잡았다고 간주되고 ‘중국에서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당권파 2인자’로 몰려 비판 투쟁을 당했다. 1967년 6월 20일부터 7월 5일까지 덩샤오핑은 장장 3만 자에 달하는 〈나의 자술〉을 마오쩌둥에게 써 보내서 자신의 심경을 표현했다. 이 편지 덕에 마오쩌둥은 덩샤오핑을 류사오치처럼 군중에의해 비판 투쟁을 당해서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장시로 하방을 보내 노동 개조를 시켰다. 다른 개국공신의 운명과 비교하면 이는 불행 중 커다란 다행이었다.
두 번째 편지는 1971년 11월 덩샤오핑이 린뱌오의 추락사 소식을 들은 뒤 쓴 것이다. 당시 덩샤오핑은 재기의 기회가 왔다고 여기고 곧바로 마오쩌둥에게 4,000여 자 분량의 편지를 보냈다. 여기에서는 린뱌오를 비판하는 한편 일을 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마오쩌둥은 이 편지에 명확한 답변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1972년 8월 3일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에게 세 번째 편지를 써서 중국 공산당 중앙사무처 왕둥싱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이 편지에서 덩샤오핑은 다시 한 번 일하고 싶다는 희망을 내비쳤다.
1976년 4ㆍ5 사건 이후 덩샤오핑은 다시 자리에서 물러났다. 마오쩌둥 사후 그는 또 한 번 기회를 얻었다. 이에 화궈펑에게 편지를 써 화궈펑의 지도를 “영원히 뒤집지 않고” 옹호할 것이라고 밝혀 화궈펑의 신임을 얻었다. 예젠잉과 리셴녠의 원로 간부의 지지 아래 덩샤오핑은 다시 한 번 복귀했고 곧이어 화궈펑이 떠밀리듯 실각하면서 중공의 새로운 지도 집단의 핵심이 됐다. 이 네 편의 편지는 덩샤오핑이 자신의 정치적 앞날을 위해서 기꺼이 잘못을 인정하는 수완을 보여준다. ---제10강 「덩샤오핑 시대의 개막」 중에서

@ 닉슨의 만리장성 가는 길: 70만이 하룻밤에 눈을 치우다

1972년 2월 21일 닉슨이 중국을 방문해서 처음으로 베이징 땅을 밟았다. 중국 측은 이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다. 심지어 닉슨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일부러 베이징의 몇몇 지명을 고쳤다. 예를 들면, ‘반제反帝의원’은 ‘수도의원’으로 ‘노농병대로’는 ‘디안먼地安門대로’로 개칭했다. 닉슨도 노력을 했다. 미국 대통령은 어느 국가를 방문하든 대통령 전용기인 ‘에어포스원’을 타야 했다. 그러나 중국 내에서는 저우언라이의 전용기 ‘IL-18기(소련제 Ilyushin-18)’에 탑승함으로써 중국의 주권에 대한 존중을 표시했다. 그리고 ‘에어포스원’은 그 뒤를 따라 비행했다.
닉슨은 베이징에 도착한 지 세 시간 뒤에 바로 마오쩌둥을 만났다. 양측이 악수하는 장면은 전 세계에 화제를 뿌렸고 또 전 세계를 바꾸어놓았다. 이번 베이징행을 통해 미국인은 많은 사회주의 국가에서만 있을 수 있는 기이한 상황에 대해서 견문을 넓혔다. 시야를 넓힌 셈이다. 사후 기록에 따르면 예정된 일정에 따라 닉슨은 24일에 만리장성에 가야 했다. 그러나 23일 저녁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 저우언라이는 닉슨과 함께 체육 공연을 관람하던 도중 전화 한 통을 걸었다. 다음 날 닉슨은 베이징의 대로에서 눈이 사라지고 도로변에 눈이 높게 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순조롭게 만리장성에 갔다. 알고 보니 그 전날 밤 저우언라이의 지시로 베이징 시에서 60~70만 명을 동원해서 댜오위타이釣魚臺부터 만리장성까지 가는 길의 눈을 치웠던 것이다.
이날 또 다른 일화도 있었다. 닉슨이 만리장성에 올랐을 때는 영하의 날씨였는데도 길가에서 사람들이 장기를 두고 있었다. 이는 분명 사전에 계획된 것이었다. 그 결과 이 조직된 ‘장기 두는’ 사람은 아주 긴장했을 것이다. 닉슨의 부인이 지날 때도 그들은 고개도 숙이지 않았다. 닉슨은 그것을 보더니 “정말로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로군”이라고 말했다. 곧바로 어떤 사람이 이 일을 저우언라이에게 보고했고 이 일에 저우언라이는 몹시 화가 났다. 그리고 다음 날 만났을 때 닉슨에게 “우리가 하는 일 중 꾸며낸 일도 좀 있습니다”라고 솔직히 인정했다. ---제7강 「외교: 중소 관계의 파열과 중미의 상호 작용」 중에서

@ 문화대혁명과 홍위병의 적색폭력

베이징 다싱大興 현에서는 홍위병이 과잉 살육을 했다. “1966년 8월 다싱 현에는 열세 개 공사의 48개 대대가 있었는데 불과 5~6일 만에 지주, 부농, 반혁명 분자, 악질 분자, 우파 분자와 그 가족 325명을 죽였고 22가구의 사람들이 피살됐다. 그중에는 80여 세의 노인도 있었고 태어난 지 38일밖에 안 되는 영아도 있었다.” 교육학자 양둥핑楊東平은 당시 자신이 직접 목격한 폭력 행위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근처 농촌의 한 지주의 집에서 베이징의 여자 홍위병을 처음으로 직접 보았다. 그들은 ‘지주 부인’을 벽돌 위에 무릎 꿇리고 베이징어로 욕을 하면서 가죽띠로 때렸다. 넘어지려고 하면 다시 벽돌 위에 꿇어앉히고 계속 때렸다. 처참한 울부짖음이 들렸고 붉은 피가 흥건했다. 우리는 누구도 전에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없었다. …… 그 부인은 후에 맞아 죽었다.

더욱 깊이 살펴봐야 할 것은 다음과 같은 그의 심리 분석이다.

나는 차마 볼 수가 없어서 외부 순찰을 신청했다. 나는 걸으면서 자책을 했다. ‘저들의 계급적 감정은 아주 깊다. 투쟁 정신은 얼마나 강한가! 나의 프티부르주아적 감정은 극복할 도리가 없는 것인가? 태어나면서부터 혁명에는 맞지 않나 보다.’

폭력은 시범 효과를 갖는다. 폭력이 혁명을 겉으로 보여줄 때 이런 시범 효과는 더욱 강렬하게 확장할 수 있다. 이는 ‘문혁’이 시작한 뒤 폭력 행위가 전국에 널리 퍼지게 된 주요 원인이기도 하다. ---제8강 「문화대혁명의 발발과 전개」중에서

@ 시민들의 인권 보장 운동

대규모 군중 사건 이외에 최근 몇 년 동안 연이어 인터넷의 역할에 역할을 빌려 새로운 시민 인권 보호 활동 방식이 등장했다.
첫째, ‘판쭈이飯醉’. 모여서 밥을 먹는 방법이다. 2009년에 예술가 아이웨이웨이가 항저우에서 200여 명의 네티즌을 불러 모아 밥을 먹었다. 20개의 탁자가 펼쳐졌고 그 자리에서 아이웨이웨이가 제작한 인권 보장 관련 내용의 CD를 나누어주었다. 2010년 8월 베이징의 네티즌들이 푸젠에서 자신이 한 말 때문에 투옥됐던 유징유游精佑의 출소를 환영하기 위해 함께 식사를 했다. 이 자리에는 전 체제 내 인사 두광杜光, 반체제 인사 후스건胡石根, 모즈쉬莫之許 등 40~50명이 참석했다. 한 평론가는 옛 소련의 대문학가 솔제니친이 《붉은 수레바퀴》에서 같은 종류의 역사적 현상을 소개했음을 특별히 거론한다. “이때 러시아 각지에는 마치 전염병이 생긴 것처럼 대형 연회를 여는 분위기가 유행했다. 사람들은 돈이 있든 없든 함께 모여 밥을 먹고 그 기회를 빌려 즉석연설을 해서 차르의 권리 제한과 헌정 실현을 호소했다.” 이는 오늘날 중국의 ‘판쭈이’ 활동과 아주 비슷하다.
둘째, ‘헌화’. 구글 중국이 인터넷 검열에 항의하기 위해 대륙 지역의 검색 엔진 서비스를 중단하기로 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젊은 네티즌들이 구글 베이징 본부 문 앞에 가서 헌화를 함으로써 의사 표현의 자유가 사망한 것에 대한 애도를 완곡하게 표했다.
---제14강 「시민사회의 성장」중에서

@ 중국의 과거 청산 문제, 국가의 폭력이 비호받는 이유

60년의 교훈을 회고하면서 모든 책임을 마오쩌둥과 4인방에게 떠넘기는 것은 부정확하다. 그들에게 책임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당연히 가장 큰 책임이 있고 죄도 있다. 그러나 문혁 전후에 비판 투쟁의 대상이 됐던 원로 간부들이 타격을 받았다고 해서 전반기 30년 집권의 책임을 씻어버릴 수 있을까?
류사오치를 예로 들어보자. 박해를 받고 처참하게 죽었기 때문에 당 내외와 중국 민중으로부터 널리 동정받는다. 그러나 사실대로 따져보면 당내에서 마오쩌둥에 대한 개인숭배의 분위기를 앞장서서 조장한 사람은 바로 류사오치이다. 그는 ‘마오쩌둥 사상’이라는 표현을 제안했을 뿐 아니라 개인숭배를 적극 고취했던 사람이다. 1958년 루산 회의에서 펑더화이, 장원톈 등 중국 공산당 원로들이 마오쩌둥에 의해 무참히 타격받는 현실을 보았을 때도 류사오치는 여전히 마오쩌둥에 대한 개인숭배를 굳건히 지지했다.
결국 류사오치 자신이 마오쩌둥에 대한 개인숭배의 최대 희생자가 됐지만 그렇다고 류사오치가 바로 이런 개인숭배라는 나쁜 풍속을 만든 사람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지워버려서는 안 된다. 류사오치, 덩샤오핑, 저우언라이 등의 전적인 지지가 없었다면 마오쩌둥 한 사람이 중국을 문화대혁명이라는 대재난에 빠뜨릴 수는 없었다. 오늘날 마오쩌둥의 책임만을 묻고 류사오치, 저우언라이, 덩샤오핑 등의 책임을 간과한다면 이런 역사는 진실한 역사가 아니다. 이런 허구적인 역사는 어떤 유익한 경험적 교훈도 줄 수 없다.
이런 성찰에 대해 경제학자 허칭롄何淸蓮은 “중공 정치의 ‘희생양’ 기제”라는 개념을 분석의 기본 틀로 제시한다. 그녀는 이렇게 지적한다. “중국 공산당의 역사에서 정치투쟁을 거칠 때마다 새롭게 자리를 이어받은 지도자는 자신의 통치에 합법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늘 습관적으로 잘못을 범한 책임을 실권을 잃은 인물 어느 한 사람 혹은 여러 명에게 떠넘긴다.”
---제15강 「60년에 대한 회고」중에서

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보이기/감추기

회원리뷰 (1건) 회원리뷰 이동

한줄평 (3건) 한줄평 이동

총 평점 10.0점 10.0 / 10.0

배송/반품/교환 안내

배송 안내
반품/교환 안내에 대한 내용입니다.
배송 구분 예스24 배송
  •  배송비 : 무료배송
포장 안내

안전하고 정확한 포장을 위해 CCTV를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고객님께 배송되는 모든 상품을 CCTV로 녹화하고 있으며, 철저한 모니터링을 통해 작업 과정에 문제가 없도록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목적 : 안전한 포장 관리
촬영범위 : 박스 포장 작업

  • 포장안내1
  • 포장안내2
  • 포장안내3
  • 포장안내4
반품/교환 안내

상품 설명에 반품/교환과 관련한 안내가 있는경우 아래 내용보다 우선합니다. (업체 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반품/교환 안내에 대한 내용입니다.
반품/교환 방법
  •  고객만족센터(1544-3800), 중고샵(1566-4295)
  •  판매자 배송 상품은 판매자와 반품/교환이 협의된 상품에 한해 가능합니다.
반품/교환 가능기간
  •  출고 완료 후 10일 이내의 주문 상품
  •  디지털 콘텐츠인 eBook의 경우 구매 후 7일 이내의 상품
  •  중고상품의 경우 출고 완료일로부터 6일 이내의 상품 (구매확정 전 상태)
반품/교환 비용
  •  고객의 단순변심 및 착오구매일 경우 상품 반송비용은 고객 부담임
  •  직수입양서/직수입일서중 일부는 변심 또는 착오로 취소시 해외주문취소수수료 20%를 부과할수 있음

    단, 아래의 주문/취소 조건인 경우, 취소 수수료 면제

    •  오늘 00시 ~ 06시 30분 주문을 오늘 오전 06시 30분 이전에 취소
    •  오늘 06시 30분 이후 주문을 익일 오전 06시 30분 이전에 취소
  •  직수입 음반/영상물/기프트 중 일부는 변심 또는 착오로 취소 시 해외주문취소수수료 30%를 부과할 수 있음

    단, 당일 00시~13시 사이의 주문은 취소 수수료 면제

  •  박스 포장은 택배 배송이 가능한 규격과 무게를 준수하며, 고객의 단순변심 및 착오구매일 경우 상품의 반송비용은 박스 당 부과됩니다.
반품/교환 불가사유
  •  소비자의 책임 있는 사유로 상품 등이 손실 또는 훼손된 경우
  •  소비자의 사용, 포장 개봉에 의해 상품 등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예) 화장품, 식품, 가전제품, 전자책 단말기 등
  •  복제가 가능한 상품 등의 포장을 훼손한 경우 : 예) CD/LP, DVD/Blu-ray, 소프트웨어, 만화책, 잡지, 영상 화보집
  •  소비자의 요청에 따라 개별적으로 주문 제작되는 상품의 경우
  •  디지털 컨텐츠인 eBook, 오디오북 등을 1회 이상 다운로드를 받았을 경우
  •  eBook 대여 상품은 대여 기간이 종료 되거나, 2회 이상 대여 했을 경우 취소 불가
  •  중고상품이 구매확정(자동 구매확정은 출고완료일로부터 7일)된 경우
  •  LP상품의 재생 불량 원인이 기기의 사양 및 문제인 경우 (All-in-One 일체형 일부 보급형 오디오 모델 사용 등)
  •  시간의 경과에 의해 재판매가 곤란한 정도로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 법률이 정하는 소비자 청약철회 제한 내용에 해당되는 경우
소비자 피해보상
  •  상품의 불량에 의한 반품, 교환, A/S, 환불, 품질보증 및 피해보상 등에 관한 사항은 소비자분쟁해결기준(공정거래위원회 고시)에 준하여 처리됨
환불 지연에
따른 배상
  •  대금 환불 및 환불 지연에 따른 배상금 지급 조건, 절차 등은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 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라 처리
  • 절판 상태입니다.
뒤로 앞으로 맨위로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