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는 어떻게 시작하나요?”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 에 등장하는 대담에서 방송인 필립 네모가 이렇게 묻는다. 철학자 레비나스는 대답한다. “이별을 겪을 때, 폭력적인 장면을 목격했을 때, 시간의 단조로움을 갑작스럽게 의식하게 되었을 때.” 덧붙여 그는 그 충격적 상처가 아물지 않고 앞이 보이지 않는 암중모색의 시간이 하나의 사유거리가 되기도 하는데 그것은 바로 독서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말한다. 레비나스의 철학적 사유가 히틀러 치하의 홀로코스트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의 말에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렇다면 홀로코스트 같은 비극적 경험도, 크게 내세울 만한 대단한 상처도 없는 내가 언제부터 페미니즘에 대한 사유를 시작하게 되었을까? 꼽아보자면 세 번 정도의 시간이 있었던 것 같다. 첫 번째는 아이가 태어났을 때, 두 번째는 3년간 전업주부로 지내던 때, 세 번째는 사업체를 차린 지 5~6년 차가 되었을 무렵이었다.
(...) 꾸역꾸역 하루의 할 일을 해치워가는 사이 나의 체력도 인내심도 임계점을 넘어버렸다. 그러자 마치 시소처럼 내 안의 배려와 관용과 이해심도 동시에 바닥을 치기 시작했다. 돌아보면 그때의 나는 툭하면 화를 냈고 화를 내지 않을 때는 짜증을 내고 있었다. 나는 그저 내가 ‘왜’ 이렇게 힘든지 알고 싶었다. 힘든 것을 말하는 것이 ‘왜’ 치사한 것처럼 느껴지는지, ‘왜’ 인생이 자꾸만 어깃장을 놓는 것 같은지 알고 싶었다. 이유를 알면 바꿀 수 있지 않을까? 무언가 달라지지 않을까? 아니, 달라지지 않더라도 이유라도 알면 이렇게 답답하진 않을 것 같았다.
(..).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알아야 한다. 지성이란 먼저 지성 자체의 한계를 확인하는 힘이다. 언어는 자신이 무엇을 말할 수 있고 무엇을 말할 수 없는지 구별할 수 있는 한계에 근접했을 때 처음으로 그 힘을 발휘한다.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조차 몰랐음을 알게 될 때, 우리의 사유는 그 지평을 넓혀간다.
(...) 나는 그들이 결국 자신의 삶을 바꾸기 위해 페미니즘 공부를 이용했다고 생각한다. 삶을 바꾸기 위한 도구로 앎을 찾은 것이다. 나도 페미니즘을 이용하고 싶다. 그 언어에 빚져서 삶을 해석하고 싶고 길을 찾고 싶다. 말할 수 있는 부분과 가슴의 통증으로만 느껴지는 부분에 대해 더 정확하게 알고 그 간극을 제대로 언어화하고 싶다. 그것을 말하기 위해, 나는 오늘도 읽는다.
--- 「나는 왜 읽는가」중에서
지식이 일상을 바꾸고, 그것이 곧 돌이킬 수 없는 삶의 변화를 맞이하게 될 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젠더가 일상을 재단하고 삶의 형태를 규정짓는 사회에서 그 재단선과 경계선을 일일이 의식하는 순간 과연 마음 편하고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을까. 그렇다고 지식을 외면하고 일상을 유지하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일까. 나는 나의 모든 것을 엄마, 아내, 여성으로만 위치시키는 이 사회가 지긋지긋해서 페미니즘 공부를 시작했건만, 한편으로 그 지긋지긋함에 내 몸을 맞춰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여전히 가부장제의 가치관 속에서 내가 어떻게 보일지 신경 쓰고 그 검열 조건에 나를 재단하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페미니즘의 관점은 갖고 싶지만, 페미니스트로 살기는 두려운 것이다.
(...) 지적이고 싶지만 잃는 것은 없었으면 하는, 내가 원하는 그런 지식은 결코 없다. 자신이 약자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외면하고 지배자의 언어를 쓰는 것은 전형적인 식민지 주체성일지도 모른다. 자기 위치에 대한 정치적 자각 없이 지배자의 위치를 자기 위치로 내면화하는 것, 그것이 자기기만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 「나에게 식자우환은 정희진의 책을 읽는 것이다」중에서
혹실드는 그의 책에서 전통주의자로 자청하는 여성들을 쉬게 만드는 것은 ‘병’이라고 말한다. 시간 부족과 임금 노동, 무임금 노동의 지속적인 반복은 결국 몸을 축내고 앓아눕게 만든다. 앓아누운 그들은 몸이 회복되자마자 곱빼기 근무를 하다 결국 다시 드러눕는다. 『타임 푸어』 의 저자인 브리짓 슐트는 시간이 왜 이렇게 모자라나 고민하다가 시간 전문가인 로빈슨에게 상담을 받는다. 로빈슨은 그녀에게 당신이 생각하는 여가 시간은 언제냐고 묻는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 대답한다. “아픈 날이요.”
아프기 전까지 꾸역꾸역 일하는 여자들 중에 『아내 가뭄』의 저자도 있다.
(...) 이 책을 읽을 때 나는 마침 전자레인지를 돌리며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거래처와 전화 통화를 하는 중간중간 문자 메시지로는 아이들 방문 학습 선생님과 시간을 조정하고, 세금과 각종 고지서는 전철로 이동하는 시간에 처리한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아이들이 어디에 처박아두었는지 모르는 학습지를 찾는 일이다. 아이가 숙제를 제대로 해놓지 않으면 선생님은 회사에 있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숙제 정도는 알아서 챙겨 달라”고 나무란다. 그렇게 세포 하나하나에 모두 할 일이 있고 그것들을 처리하면서 갈가리 찢기는 감각에 시달릴 때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오곤 했다. 가끔 말을 잘 들어주는 친구라도 만나면 정신줄 놓고 푸념하는 내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런 날이면 내가 어찌나 초라해 보이던지.
『아내 가뭄』 의 저자는 대한민국 맞벌이 부부의 가사 노동 시간을 비교하며 (남성은 40분, 여성은 3시간 14분이다) 이렇게 말한다. “한국에서 태어나지 않은 걸 다행이라 생각해야 하는 걸까?”
--- 「여가가 있는 엄마를 찾습니다」중에서
치즈코를 읽으며 나는 이 사회를 조금 더 깊숙이 들여다보는 안경을 하나 갖게 된 것 같았다. 더 이상 ‘이 모든 게 가부장제 때문이다’라거나 ‘여성은 피해자다’와 같은 차원의 문제로 지금의 사회를 바라볼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있는 현상은 유구한 역사와 인식 문화가 지금 이 현실에서 만나는 ‘사건’일 뿐, 그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새롭게 볼 틀이 필요하다. 그럴 때 ‘여성 혐오 3종 세트’ 같은 것은 그동안 보이지만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명쾌하게 설명해주는 안경과 같은 역할을 한다. (...)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내가 얼마나 가슴 깊이 ‘여성 혐오’를 매개로 작동하는 가부장을 내면화해왔는지 깨닫게 되었다. 내가 왜 페미니즘을 공부하기 두려워했는지, 왜 세상에 겁을 먹었는지, 왜 싸워보기도 전에 지레 포기했는지, 왜 그토록 논리로 바락바락 이기고 싶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결국 페미니즘이라는 안경은 세상을 제대로 보기 전에 나를 더 잘 보게 해주었고 그렇게 나를 바라보는 과정에서 우울증이 사라졌다. 의문시하고 불편하고 위화감을 느꼈지만 해결되지 않았던 많은 문제들에 대해 직면하게 되었다. ‘나만 참으면 돼’라고 생각하면서 지나왔던 시간들과 그 시간동안 몸으로 느껴지던 죄책감과 수치심을 더 이상 외면하지 않게 되었다.
이제 나는 적어도 내가 왜 그런 감정을 느꼈는지 안다. 단지 그것뿐인데도 이상하게 편안해졌다. 이 감정들을 나만 느끼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자 위로가 되었고, 오래전부터 이런 문제들이 숱하게 있어 왔으며 그보다 더 숱하게 많은 이들이 그에 어떻게 저항해왔는지를 배우며 힘이 났다.
지난날 나는 아이가 잠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곤 했다. 아이가 잠들면 홀로 주방에 앉아 멍하니 술을 마시기도 했다. 그러면 뭔지 모를 가슴속의 화가 좀 꺼지는 것 같았다. (...) 어디에도 마음 붙일 곳이 없을 때면 정신과와 심리 상담실을 검색하고 수십 번도 넘게 전화기를 만지작거렸다. 미쳐버리고 싶지만 미쳐지지 않았기에 미쳐가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어쩌면 그때 나에게 필요한 것은 심리 치료실이 아니라 페미니즘 책이 아니었을까.
--- 「여성 혐오 3종 세트」중에서
글을 쓰는 일은 밀실 속에서 혼자 하는 행위일지 모르겠지만 그 자체로 사회적 실천이다. 글을 통해 자기 존재를 증명하고, 다른 이들과 소통하며, 그것이 세상을 향한 무기가 된다. 나혜석은
우리 사회에서 여성은 ‘칼날을 쥔 상태’이고, 남성이 ‘칼자루를 쥔 상태’라고 표현했다. 그 표현대로라면 칼날을 쥔 상태에서 피로써 글을 남기는 것만이 세상을 향한 그들의 유일한 무기였던 것은 아닐까.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프란츠 카프카는 “그 이름을 정확하게 불러야 그 삶이 우리에게 온다. 그것이 삶이라는 마술의 본질이다”라고 했으며, 석지현의 능엄경 해설에서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언어를 통해 모든 것이 명확해진다. 그러나 사람들이 언어를 제대로 사용할 줄 모르기 때문에 오히려 그 언어로 인하여 고통을 받는다”라고 이야기한다.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은 “하나의 언어를 머리에 떠올리는 것은 하나의 삶의 형식을 떠올리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 위대한 철학자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은, 언어는 곧 세계이고 철학이라는 것이다. 쓴다는 것은 그 철학을 실천하는 행위이다. 개인에게는 치유의 행위이자 세상을 바라보는 틀이고 세상을 전복할 수 있는 무기이기도 하다. 페미니즘이 인식론이라고 할 때 나는 그것이 언어를 통해 매개되는, 언어에 대한 해석이자 투쟁이라고 생각한다. 페미니즘은 젠더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능하게 하고, 언어를 통해 기존의 프레임을 깰 수 있는 지식과 담론을 만들어가는 과정인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 또한 언어의 치유와 전복, 해방성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닐까. 그녀는 여성들이 쓰기를 원했다. “나는 여러분에게 아무리 사소하거나 아무리 광범위한 주제라도 망설이지 말고 어떤 종류의 책이라도 쓰라고 권할 것입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행하고 빈둥거리며 세계의 미래와 과거를 사색하고 책들을 보고 공상에 잠기며 길거리를 배회하고 사고의 낚싯줄을 흐름 속에 깊이 담글 수 있기에 충분한 돈을 여러분 스스로 소유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녀는 쓰는 행위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경제력과 사유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함을 간파했다. 지식의 생산과 담론은 언어만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사유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가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알기 때문이다.
--- 「나는 왜 쓰는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