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와 진보로 대두되는 서로 다른 성향 때문에 정치적으로 잘못된 판단을 했을 때도, 정서적으로(태도면에서) 훌륭한 사람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공감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존재한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상대를 혹은 세상을 설득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나 정서적(태도)으로 올바른 사람들에 매력을 느끼고 기꺼이 경청하고자 하는 성향이 있다.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걸 보고 나는 피가 끓어올랐다.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힌두교도와 여성, 이민자, 그리고 미국 흑인들을 향해 자랑스럽게 쏟아내는 증오의 수준은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2004년에 조지 W 부시가 재당선됐을 때도 그저 어안이 벙벙해서 할 말을 잃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 친구들과 나는 이메일을 통해 빨간 색과 파란 색으로 나누어 표시된 미국 선거 지도를 공유하고 있었는데, 빨간 색이 뒤덮인 지역들은 ‘*덤퍼키스탄’ 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부시 지지자를 인간 이하라고 대놓고 무시하지는 않았지만, 미국인 자격도 없고 나보다 수준도 떨어지는 사람들이라고 치부한 건 사실이었다. 지적능력이 부족하고, 이해심도 모자라며, 동정심도 나보다 부족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딱히 내가 그들에게 증오심을 품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단지 내가 옳았다고 여겼을 뿐이었다.
--- p.17~18
『편견의 심리The Nature of Prejudice』라는 영향력 있는 책을 썼고 인간성 연구에 앞장선 하버드 대학교의 심리학자 고든 앨포트Gordon Allport의 이론을 바탕으로 설립된 *반 명예훼손연맹(ADL)은 증오에 대한 다양한 유형들과 쓰라린 경험들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면서 서서히 형성된다고 주장한다. 이 단체는 ‘증오의 피라미드’ 안에 전반적인 다섯 가지 카테고리로 증오를 분류하고 있다. 피라미드의 맨 아래쪽에는 고정관념을 형성하고 배타적인 언어를 사용한다거나, 어떤 집단은 본래 우월하고 어떤 집단은 본래 열등하다는 믿음 같은 것이 해당된다. 그 두 번째 단계는 왕따나 욕설과 같은 편견을 바탕으로 하며 행동과 말은 안 해도 은근하게 이루어지는 사회적 따돌림처럼 남에게 해를 입히는 행동들이다. 5학년 때 끈끈이 비키가 지나갈 때 나와 다른 친구들이 그녀를 피해서 한쪽으로 비켜섰던 행동이 여기 포함된다. 세 번째 단계에는 취업이나 주택 정책 혹은 정치적인 시스템 안에서 일어나는 제도적인 형태의 차별이 해당된다. 이는 우리 사회의 제도나 기준에 반영되고 실제로 적극 권장되기도 하며 다음 세대로 계속 대물림되기도 한다. 그리고 네 번째는 테러리즘이나 증오범죄처럼 편견에 치우친 폭력이 해당되고, 마지막으로 피라미드 맨 꼭대기는 대학살이 차지하고 있다.
--- p.22~23
내가 개인적으로 하루도 빼놓지 않고 자주 맞닥뜨리는 증오심의 출처는 온라인상에서 남에게 악담과 비방하는 글을 올리는 ‘악플러Troll’같은 고약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증오심을 부채질하는 상황과 뒤틀린 생각들에 대해 본격적으로 탐색해 보기로 작정했을 때 자연스럽게 첫 탐색 대상으로 떠오른 것이 나를 공격하는 악플러들이었다. 얼굴도 모르는 낯선 타인들이 왜 매일같이 나를 헐뜯고 욕을 퍼붓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고,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인간들인지 늘 궁금했다. 게다가 나를 비난하는 이메일과 트윗이 점점 많아지면서 어느 순간 나조차도 이게 오히려 정상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겠다는 우려가 싹트기 시작했다. 인간의 본성은 원래 악하기도 하지만 요즘처럼 온라인이 대세인 세상에서 익명의 탈을 쓰고 얼마든지 그 악함을 즐기는 것은 당연할 수 있는 것인데, 모든 사람이 친절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내가 오히려 비정상인가 싶은 생각이 드는 거였다.
사실 처음 나를 공격하는 악플러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자꾸만 커져가는 비뚤어진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러나 통화를 마치고 전화를 끊을 때쯤에는 나 자신에 대해서도 좀 더 잘 알게 되었다. 그전에 나는 악플러들이 좋은 사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결코 해 본적이 없었지만, 그들이 나를 나쁜 사람으로 평가할 것이라곤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폭스 뉴스에서 일하던 초기에 나는 감정적인 쇼크를 경험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한때 나는 강한 보수 성향의 토크쇼 진행자인 션 해니티Sean Hannity가 증오심으로 똘똘 뭉친 꼴통 보수의 결정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실제로 만나보니 무시무시한 뿔이나 송곳니도 없을 뿐더러,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훨씬 친절하고 상냥해서 놀라움을 넘어 충격을 받았다. 또 한편으로는 내 평생 처음으로 끔찍한 항의 메일들을 받기 시작했는데 이는 전혀 다른 측면으로 내게 큰 충격을 주었다. 솔직히 처음 폭스 뉴스에 들어갈 때만 해도 나는 전반적으로 보수 진영을 무시하는 입장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를 향한 악플러들의 공격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충격적이었고, 이메일과 트위터를 통해 끊임없이 쏟아지는 시청자들의 적개심에 아연실색했다. 나는 대부분의 폭스 뉴스 시청자들과 협박 메일을 보내지 않은 사람들의 숫자가 훨씬 더 많다고 애써 자위했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엄청나게 많은 메일이 쌓이는 건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입에 담기도 어려울 만큼 비열한 내용이 대부분이었고 때로는 폭력을 불사하겠다는 위협도 있었다. 나는 엄청난 충격과 절망감에 빠졌다.
--- p. 35~36
인류학자 마이클 기글리에리Michael Ghiglieri는 인간 역사에서 “전쟁은 지정학적인 경계를 정했고 국가적인 이데올로기를 퍼뜨렸을 뿐만 아니라 인류의 종교와 문화, 질병, 기술과 더불어 유전적인 인구 분포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기글리에리에 의하면 전쟁과 함께 인간 진화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이 또 하나 있는데, 바로 섹스다. 다시 말하면 서로를 분리시키는 행위뿐만 아니라 말 그대로 서로를 합치는 행위 또한 인간의 역사를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라는 얘기다. 두 가지 모두 가능하지만 두 가지 모두 미리 예정된 것은 아니다.
실제로 집단을 형성하고자 하는 경향이 본능적인 것일지는 몰라도 그런 집단을 형성하는 방법은 본능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의 산물과 무의식적으로 우리 자신과 남을 인식하는 관점에 영향을 주는 문화와 습관이 더해져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미국 역사를 살펴보더라도 아일랜드와 이탈리아, 유대인 이민자들은 오랫동안 백인으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지금은 인정받고 있다. 인간의 행동에 관해 여러 권의 저서를 집필한 생물학자 로버트 사폴스키Robert Sapolsky는 “인간은 본능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경계심을 느끼도록 타고났을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이라는 카테고리에 해당되는 대상에 대한 관점은 당연히 변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 말은 증오도 변할 수 있다는 뜻이다.
--- p.136~137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을 떠올려보자.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라는 문구가 포함된 독립 선언서를 쓰는데 일조한 그는 600명이 넘는 흑인 남성과 여성, 어린이들을 노예로 부렸다. 그는 자신이 쓴 글과 행동 사이에 모순이 있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심지어 자유로운 흑인들에 대해 “사회의 해충이며… 어린아이들처럼 스스로를 관리하지 못한다”고까지 말하기도 했다.
백인들의 본질적인 우월성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은 미국을 건국하는 과정에서의 원죄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미국의 현실적인 삶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앞부분의 사례들이 보여주듯이 투표방식에서부터 우리가 뽑은 사람들이 소속된 기관들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와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받는 급료와 사회복지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백인에 대한 터무니없는 허구적 우월성과 그에 따른 증오심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다. 미국 형사 사법제도의 인종차별적인 역사를 다룬 다큐멘터리인 「 13th」에서 지식인 젤라니 콥Jelani Cobb은 이렇게 말한다. “이 나라에서 흑인들이 겪은 다양한 투쟁의 역사를 보면서 일관성 있게 떠오르는 주제는 완전하고 다양한 하나의 인간으로 인정받기 위한 노력이다. 우리는 흔히 사람들이 우리와 연관시키는 범죄나 위협이나 협박과 같은 적나라한 이미지가 아닌 그 이상의 존재이다.”
--- p.138
방대한 연구에 의하면 우리가 가진 무의식적인 편견, 혹은 학계에서 ‘암묵적 편견’ 이라고 부르는 것에 일부 책임이 있다고 한다. 이는 사회 전반에 걸친 만연한 고정관념과 조직적인 인종차별의 영향을 받아 우리 마음속에 굳어져 있는 태도와 오해를 의미한다. 성차별적 산물로서 우리 모두는 남자와 남성성을 선호하고, 여자와 여성성에 반하는 편견을 가지고 있다. 인종차별적인 사회의 산물인 우리는 백인을 선호하고 유색 인종에 반하는 편견을 가지고 있으며, 계급주의 사회의 산물인 우리는 부자를 선호하고 가난한 사람에 반하는 편견을 가지고 있다. 편견은 이렇게 계속된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이런 믿음을 고집하는 게 아니라 시간이 지나는 동안 우리도 모르게 길들여진 마음 속 깊은 곳의 반사 작용 같은 것이다. 머릿속에 암호처럼 박혀 있어서, 결과적으로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편견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끈질긴 인종차별적 불평등에 관해 저술한 사회학자 에두아르도 보닐라-실바는 “요즘의 중요한 문제는 후드를 뒤집어쓴 사람들이 아니라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다. 인종차별의 문제가 비단 KKK와 버서 티파티나 미국 공화당에 국한된 문제라고 생각하면 할수록, 인종적인 지배는 집단적인 과정으로 치부하고 우리 모두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에 점점 무관심해진다”고 기록하고 있다.
백인들은 조직적인 인종차별주의를 인식하기 어려울 수도 있는데, 그들은 인종차별의 표적이 되지 않을뿐더러 사회적으로 그런 얘기를 쉬쉬하기 때문이다. 듀크대학교 사회학 교수인 보닐라 실바Bonilla-Silva가 지적했듯이 대다수의 미국인들은 유색인종을 향한 노골적이고 공공연한 편파적 사고방식이 인종차별이라고 생각하고는 있지만, “인종차별은 조직적이거나 혹은 제도화되어 있다”고 믿는다. 유색 인종들은 매일같이 조직적인 인종차별의 영향을 무수히 받으며 살고 있다. 백인들은 대부분 조직적인 편견의 실체를 잘 인식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편견을 갖는 대상들이 겪는 경험과 관점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해서이기도 하고, 이해하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우리들 자신이 가진 편견을 인정하는 건 별로 유쾌한 일이 아닐 테니까.
--- p.182~183
2016년 11월, 르완다의 키갈리 공항 밖으로 걸어 나왔을 때 대기 중에서 쓰레기 타는 냄새가 났다. 22년 전에 왔다면 살이 썩는 냄새가 진동했을 거라고들 말했다. 물론 미국인인 내가 그때 그곳에 갔을 리는 없다. 미국을 비롯해 다른 모든 나라의 대사관 직원들과 외교관들, 그 나라에 남아 있던 외국인들은 거의 모두가 빠져나갔으니까. 1994년, 약 100일 동안 다수 집단인 후투족이 소수 집단인 투치족을 공격해 약 80만 명을 학살했다. 실제로 르완다의 대학살은 세계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에 벌어진 대학살 사건으로 일컬어진다. 매일같이 평균 약 8천명이나 되는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고, 대부분 친구와 이웃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약 20만 명의 후투족 사람들이 대학살에 참여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대학살을 연구하는 학자 대니얼 골드해이건의 말을 빌면 수천 명이 넘는 보통 사람들이 ‘자발적인 사형집행인’으로 돌변했다고 한다. 마치 들불처럼 의도적인 증오가 온 나라를 집어삼킬 때 벌어진 현상이다.
악이 전국을 휩쓸 정도로 엄청난 수준에 도달하면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닌 사람들은 못 본체하기 쉽다. 대학살이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벌어진 일이 아니면 우리, 우리의 역사, 우리의 증오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인 것처럼 마음이 아프긴 해도 크게 연관성을 느끼지 못한다. 특히 서구에 사는 우리들에게 대학살이란 특이한 곳에 사는 특이한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 특이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우리에게는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절대 우리 때문에 일어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가.
--- p.231~232
『1984』에 나오는 2분 증오 시간의 목적은 사람들의 관심과 분노를 다른 곳으로 돌려서 그들에게 직접 피해를 입히고 있는 실질적인 문제들, 즉 정부의 억압행위로부터 사람들의 관심을 분산시키고자 함이었다. 조지아 주의 한 학생은 오웰의 책에 나오는 교훈들을 곰곰이 생각하고 나서 교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 공공의 적이 필요한 건 사실이지만 그런 식은 아니에요. 범죄나 빈곤이야말로 온 세상이 함께 힘을 합쳐 싸워야 하는 공공의 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의 증오가 폭력과 고통과 분열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상처를 주는 진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나는 플로리다 주 올랜도에 있는 한 나이트클럽에서 대량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난 지 며칠 후에 이 책을 쓰기 시작했고, 네바다 주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야외 음악축제를 향해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난 지 며칠 후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시에 미국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대량 총기 난사 사건으로 알려졌던 올랜도에서의 사건은 무슬림 미국인 남성이 ‘라틴의 밤’ 축제가 한창이던 LGBT(성 소수자) 나이트클럽 내부에서 총을 난사한 사건으로 희생자의 대부분이 라틴계 동성연애자들이었다. 라스베이거스에서의 사건은 한 백인 남성이 자신의 호텔 방 창문을 열고 약 500미터 떨어진 곳에서 야외 컨트리 음악축제를 즐기고 있던 일반 관중들을 향해 군대에서 사용할 법한 다 연발 총기를 무차별적으로 난사해 58명이 목숨을 잃은 사건이다.
어떤 면으로는 두 범죄가 매우 달라 보일 수도 있다. 범행을 저지른 사람들과 그들이 겨냥했던 대상을 고려하면 그럴 수도 있다. 좌파와 우파 모두 이런 범죄를 줄이는 방법에 대해 열띤 논쟁을 벌였는데 우파는 미국에 들어오는 무슬림들의 제한을 원했고, 좌파는 공격용 총기 판매를 금지하는 조치를 원했다. 그렇지만 우리 모두는 이 두 사건의 직접적인 동기가 무엇이었든 그 뿌리에 깔려 있는 증오와 폭력은 근본적으로 불가피하고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 p.322~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