깃털, 보푸라기, 부리, 입, 존귀, 욕조…….
오늘 제가 마음속에서 알을 품듯, 가만히 품었던 말들입니다.
새알일 수도, 전등알일 수도, 쌀알일 수도, 팥알일 수도 있는 알 같은 말.
그리고 욕조 물속에서 중얼거린 말.
아파…… 아파…….
어쩌면 저의 마른입을 빌려 그녀가, 그녀들이 중얼거린 말.
오늘 밤 꿈에서 그녀를 만나면, 그녀가 누구든 “당신은 존귀한 존재”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습니다.
감히 ‘존귀함’에 대해 쓰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작가의 말
김숨의 소설은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았던 존재들과 그들의 표현되지 않았던 심연을 기록한다. 지우고 싶었던 과거와 덮어버리고 싶은 현재를 증명하는 존재들을 조심스럽게 우리 앞에 불러온다. 무능하고 무기력한 아버지, 불임의 어머니, 쓸모와 가치를 상실한 노인, 사회의 일원으로 살기 위해 인간에게 요구되는 최소한의 기준도 충족시키지 못하는 이들이 온전한 개인이기는커녕 가구처럼 그 자리에 붙박인 채 무기물의 생을 견뎌냈음을 여전히 견디고 있음을 반복해서 말한다. 김숨의 소설은 언제나 공감에 앞서 슬픔이 배어 있는 부끄러움을 불러온다. 화석이 된 그들이 바로 우리의 얼굴인 때문이다. 분별할 수 없는 나의 얼굴과 우리의 존재를 그렇게 대면하게 되기 때문이다.
『여인들과 진화하는 적들』에서 김숨은 분명 유령처럼 살아갔던 대한민국의 수많은 어머니들을 복원한다. 하지만 그 어머니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가 유포한 희생과 헌신의 이미지로 체현되지도, 전통적 의미에서 우리가 상실한 과거와 같은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김숨의 ‘어머니’는 우리가 그간 ‘훼손될 수 없는 영역’으로 규정했던 것들이 얼마나 심각하게 경제적 가치에 의해 침윤되어 있는지 보여줌으로써 우리를 오늘날의 현실 자체와 대면하게 한다. 전문대를 나와 홈쇼핑 콜센터 상담원을 하고 있는 ‘어머니’가 ‘자신의 아이만은 생존에 유리하도록 진화하기를 바라며, 당당히 브랜드 아파트에서 키우고 싶어’ 윗세대 ‘어머니’를 착취한다. ‘어머니’는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 ‘어머니’를 착취하면서 그렇게 진화를 꿈꿔왔다. 그러나 그 ‘어머니’가 아파트 신축공사로 인해 파헤쳐진 구덩이 속에 들어가 ‘화석인류’임을 스스로 입증하고자 할 때, ‘어머니’의 진화는 인류의 역사에서 있지도 있을 수도 없었음이 판명되고 있다고 말해도 좋다.
- 소영현(문학평론가)
---작품해설 중에서
한때나마 그녀는 여자와 자신이 공생관계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함께 산 지 석 달까지는 그랬다. 서로가 너무 다르지만, 필요에 의해 서로 도우면서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피치 못할 관계. 지의류라던가. 균류와 녹조류가 상리공생적 결합을 하고 있다는 식물이……. 다른 한쪽 없이는 나머지 한쪽도 살아가는 게 불가능할 만큼 밀접하게 결합해, 하나의 식물처럼 보인다는 이중생물. 생물 쪽 상식이라고는 약육강식과 이기적 유전자, 멸종과 진화 정도인 그녀가 지의류라는 식물의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는 것은, 이중인격도 아니고 이중생물이라는 말이 재미있어서였다.
“이중생물이라고 아세요?”
“…….”
“둘이자 하나인 결합생물 말이에요.”
“…….”
“밝혀지지 않은 이중생물이 얼마든지 있을지 모른다지 뭐예요.”
“…….”
“너무 꼭 결합해 하나의 생물처럼 보이는 이중, 다중생물 말이에요.”
“인간도 그런지 모르지…….”
“인간이 뭐요?”
“알고 보면 인간도 그 이중…… 생물인지…… 뭔지…….”
“어머니도 참, 무슨 엉뚱한…….”
그녀는 코웃음을 쳤다.
“네 입으로 그러지 않았냐.”
“……?”
“밝혀지지 않은 이중생물이 있을지 모른다고 네 입으로…… 얼마든지…….”
“아무리 그래도 설마 인간이 이중생물이겠어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밝혀지지 않았다 뿐이지…… 어쩌면…….”
여자가 상반신을 일으키더니 등을 구부정히 말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석고상처럼 아무 움직임이 없었다. 뭐야? 혹시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러나 그녀는 여자가 그저 이중생물이 뭔지 전혀 이해 못하고 엉뚱한 소리를 한 것뿐이라고 이해하고 싶었다. 인간처럼 이기적인 존재가 이중생물이라니…… 말이 되는가? 그녀는 다른 종들은 얼마든지 이중생물이 될 수 있어도, 인간만은 결코 이중생물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십여 분이 흐르도록 여자는 꼼짝하지 않았다. 저대로 잠들기라도 했나 싶었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여자의 눈이 단추가 떨어진 구멍처럼 멍하니 벌어져 있었던 것이다. 종종 여자는 저렇게 심장과 피가 굳은 듯 미동조차 없이 거실 바닥이나 식탁 의자, 소파에 앉아 있고는 했다. 소리 없이, 움직임 없이, 있는 듯 없는 듯, 붙박이 가구처럼 가만히 존재할 뿐인데 그녀는 여자가 몹시 거슬렸다. 그러고 보니 존재하지 않는 듯 존재할 때, 여자의 존재가 그녀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 무겁고 부담스럽게 다가왔다. 차라리 설거지나 걸레질을 할 때, 나물을 무칠 때 여자의 존재감이 덜 느껴졌다. ---pp. 140-142
관처럼 길고 네모나게 판 구덩이 속에 사람이 누워 있었다. 웬 여자가……. 포클레인 삽날 자국이 선명한 구덩이 속에 웬 여자가 들어가 누워 있나 했더니, 여자였다. 두 손을 가슴께에 모으고 두 눈을 꼭 감고 있었지만 시어머니인 여자가 틀림없었다. 백발의 머리카락이 풀어헤쳐져 여자의 얼굴과 목, 가슴을 실뿌리처럼 뒤덮고 있었다. 그러쥔 여자의 두 손은 땅을 뚫고 올라온 알뿌리 같았다.
“치매 걸린 노인넨가 봐.”
“구덩이로 들어가는 걸 내가 봤다니까.”
“어디 사는 할머닌가?”
“구덩이 속에는 왜 들어가시냐고 아무리 물어도 들은 척도 안 하시더라니까.”
사람들이 앞뒤 없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그녀의 귀에 환청처럼 들렸다.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광경 앞에서 그녀는 할 말을 상실한 채 넋 놓고 서 있었다. 여자가 어째서 구덩이 속에 들어가 누워 있는 것인지 헤아릴 정신이 없었다. 도망치듯 그곳을 뜨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301호 여자와 502호 남자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저 젊은 여자가 며느리예요.”
301호 여자가 수군거리는 소리가 그녀에게 들렸다. 일순 정적이 감돌았다. 구덩이를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그녀는 구덩이 속 여자가 자신은 전혀 모르는 여자라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나 마찬가지라고 사람들에게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이 아무리 부정해도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으리란 걸 알았다. 여자가 이상한 사람이 된 마당에, 하나마나 한 소리를 해서 자신마저 이상한 사람이 될 수는 없었다.
“잠들었나?”
“꺼내드려야 하는 거 아니야?”
502호 남자가 당장 팔을 걷어붙이고 구덩이 속으로 뛰어들 듯 굴었다.
“구덩이가 꽤 깊은걸.”
“그러게, 할머니가 저길 어떻게 들어가셨대?”
그녀에게는 구덩이가 천 길 낭떠러지처럼 깊어 보였다. 아무리 손을 멀리 뻗어도 닿을 수 없을 만큼 깊은 곳에 여자가 누워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 좀 해봐요.”
301호 여자가 그녀의 어깨를 쳐왔다.
“구경만 하고 서 있을 건가?”
“119라도 불러야 하는 거 아니야.”
뒷걸음질치고 싶은 욕구를 간신히 억누르고 그녀는 구덩이로 바짝 다가섰다. 그녀의 발에 차인 흙뭉치가 구덩이 속 여자의 가슴께로 떨어졌다. 어떤 조치를 취할지,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자신을 주시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구덩이에 대고 모기만 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거기서 뭐하시는 거예요?”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흩뜨리고 지나갔다.
“거기 들어가 누워 계시면 어떻게 해요? 어서 나오세요.”
그녀는 처음으로 여자에게 애원하고 있었다. 여자는 그러나 그녀가 구덩이 속으로 들어와 꺼내주기를 기다리는 듯 꿈쩍하지 않았다.
“어서 나오시라니까요…… 어서요…….”
애원은 점차 흐느낌으로 변해갔다. 어스름이 깔려와 먹종이처럼 구덩이를 덮었다. 여자가 소멸하듯 어스름에 조금씩 집어삼켜지고 있었다.
---pp. 297-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