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비껴가지 않는다. 언젠가 내게도 이런 일이 일어났었다. 그때 나 또한 여느 여자처럼 처음엔 분노하고 어떻게 문제를 해결해야 할지 몰라 흔한 말로 ‘멘붕’ 상태에 빠졌다. 하지만 나는 거기서 무너질 수 없었다. 또 쿨할 수 있는 여자도 아니었다. 머리가 빠질 만큼 책상 앞에 앉아 성한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고민을 해보기도 했고, 그녀(실은 ‘그년’이라고 말했다)를 찾아가 어떻게 된 일인지 이야기라도 들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모든 이성적인 고민 끝에는 항상 ‘왜 대체 내게 이런 일이 생긴 걸까?’라는 추상적이면서 말도 안 되는 질문만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명색이 심리학자가 아닌가.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이성을 되찾았고 남편을 분석해보게 됐다. 그러면서 처음으로, 자신의 아내를 때렸다는 그 남자의 고백처럼 내 남편의 여러 면에 대해서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게 됐다. 남편의 성장배경, 아버님과 어머님의 양육방식, 남편과 어머니의 애착관계, 남편의 인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 이런 것들을 파악하고 나니 처음보다 훨씬 그의 행동을 이해하게 됐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열쇠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나는 아주 솔직담백하게 남편에게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남편이 왜 그런 행동을 했어야 했는지에 대해 성장 배경과 함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러자 남편도 ‘아…… 내가 그래서 그럴 수도 있었겠구나.’를 인정하며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을 갖게 됐고, 더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노력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나와 함께.
나는 내 남편이 저지른 실수가 여전히 밉고 아프다. 감정에 치우쳐 그 순간 닥친 커다란 배신감에 모든 걸 놓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랬다면 나는 지금 후회하고 있을 것이다. 내게는 남편을 알아야 할 계기가 필요했고, 그를 이해해야 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것이 그 사건을 통해서라면 나는 그 시간을 내가 성숙해지는 계기로 삼은 것에 후회하지 않는다. 만약 그 상황을 그저 회피하고 남편이 제자리로 돌아오기를 모른 척하며 내버려두었거나, 남편에 대해 자세히 알려고 하지도 않고 그저 ‘나쁜 놈, 죽일 놈’으로 여기며 남편을 몰아붙였다면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살면서 실수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실수를 통해서 성장을 하느냐, 아니면 그 실수가 계속 반복되어 아픔이 순환되느냐 하는 것은 그것을 처리하는 방식에 따라서 다르다. 매번 바꾸어가며 여자들을 만나는 그 남자의 행동을 부정적으로만 보기 이전에(물론 그 남자가 근원적으로 나쁜 남자일 수 있고, 그 행동은 잘못된 것이 분명하지만) 한 번쯤은 그 남자가 왜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지를 객관적으로 살펴보고, 그것을 이해하고 노력하는 과정을 가져가보면 어떨까.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나 자신은 그 모든 걸 지켜보고 있을 만큼 쿨하지도 않고, 지금 이 상황을 종결시킬 만한 용기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걸 인정해야 할 것이다. ---p.81
“며느리가 반드시 아들을 낳았으면 좋겠어요. 아들을 빼앗긴 내 마음을 똑같이 느낄 수 있도록 말이에요.”
그녀가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털어놓고 인정하자 남편도 그 여자를 이해하고 측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남편은 건강한 사고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아들 또한 자신의 아내에게 집중할 수 있어서 상황은 점차 나아졌고, 그녀와 남편 두 사람도 서서히 안정을 찾아가게 되었다.
나는 그녀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적어도 이제는. 시집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부터 내 시어머니는 툭하면 “너도 내 아들 빼앗아 살잖아.”라는 말을 내뱉곤 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아들이 자신의 소유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그렇게 못마땅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키우면서 끼고 살았으면 됐지, 결혼했으면 이제 자연스럽게 떠나보내야 하는 거 아닌가? 이제 같이 늙어갈 텐데, 언제까지 품안의 자식처럼 그럴 건가? 내가 진짜 남편을 빼앗아간 도둑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를 바라보는 눈빛, 대체 언제까지 그럴 건가?
하지만 아들을 키우면서 알게 되었다. 아들의 여자 친구나 아들이 나보다 더 소중해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내가 서운한 감정을 느끼는 것이 결코 그 대상을 미워하는 단순한 감정이 아닌, 아들을 사랑한다고 하는 마음이 성숙하지 못한 데서 오는 것임을. 시어머니의 세련되지 못한 표현 방식이 분명 문제인 것은 맞지만, 내가 아들에 대해 이만큼 집착하고 있고 그것을 내려놓지 못해 여전히 힘들다는 것을 나 스스로 인정하게 되면서 시어머니에 대한 감정이 조금은 더 편안해졌다.
나도 벌써부터 불안하다. 내 아들이 완전히 내게서 떠나게 될 그날이. 여자 친구와 너무 잘 지내면 ‘저 여우같은 것이’라는 마음이 불쑥불쑥 솟아오르기도 한다. 내가 그토록 타일러도 못 끊던 담배를 여자 친구 말 한마디에 끊어버리는 아들이 야속하다. 하지만 내게는 나와 어머니가 물에 빠지면 나를 구할 것이라는 남편이 있어서 조금은 낫다. 내 어깨에 파고들어 잠든 그를 보며 시어머니를 생각한다. 내 남자가 나를 사랑하고 나에게 깊어지는 만큼, 그녀의 외로움도 깊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모습에서 나는 또 다른 나를 발견하곤 한다. ---p.167
그러고 보면 ‘이별의 유예기간’을 두는 것은 지혜로운 방법이다. 마치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것처럼, 이별의 순간은 내 가슴을 무너져 내리게 만든다. 앞이 보이지 않고 고통스러운 순간들이 한동안은 계속될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그래서 내가 어떤 방법으로 가장 덜 아프게 이 상황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그것을 생각하고 인정하고 헤쳐 나갈 시간이 필요하다. 그 기간이 그렇게 길면 안 되겠지만, 필요하다는 것은 이별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뭐, 때로는 그런 시간조차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쌍방이 완벽한 이별의 합의점을 찾은 경우도 있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난 그 ‘이별의 유예기간’이라는 게 가장 필요한 관계가 어머니와 아들 간의 관계라는 것을 크게 깨달았다. 분명 나도 언젠가 내 아들이 자신의 삶을 제대로 가꿀 수 있도록 떠나보내야 할 것이고, 그러자면 가슴 아픈 이별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머리로는 이렇게 완벽히 이해되는 성숙한 이별이 가슴으로 받아들여지기까지는 얼마나 힘들겠는가. 그래서 그 힘듦을 감당하고 온전히 받아들이는 과정은 이별의 유예기간 동안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내 아들의 여자에게 이렇게 제안을 해볼 것이다.
“내 맘에 조금씩 아들의 자리를 비워가는 이별의 유예기간을 줄 수 있겠니?”
내게는 너무나 소중한 아들이지만 시간이 되면 그를 내게서 떠나보내는 것이 마땅하다. 결혼과 동시에 육체적으로는 이미 아들은 그녀에게 가게 된다. 하지만 내 마음에서조차 아들을 떠나보낼 수 있으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일 년 혹은 반년 동안만이라도 유예기간을 가지는 것이다. 불필요하다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지나고 보면 결국 그 시간이 더 오랜 행복을 위해 정말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대신 그 시간 동안에는 나도 내 며느리를 알아가고 내 며느리도 나를 알아가며, 서서히 분리의 시간을 맞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중략)
세상 모든 ‘어머니’라는 존재는 자신이 낳은 자식을 언젠가는 떠나보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당신도 그렇게 떠나와 새로운 가족을 이루었으니까. 또한 나의 자식이기는 하지만 내 소유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잘 안 되는 것뿐이다. 그러니 이별의 슬픈 마음을 요만큼도 이해하려 들지 않는 며느리가 곱게 보일 리가 있겠는가. 아무리 잘난 며느리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이별의 유예기간’은 반드시 필요하다. 미운 며느리도, 미운 시어머니도, 무심한 남편이나 아들도 사라지게 만들 묘책이니까. 조금씩, 천천히, 하지만 자연스럽게 서로를 보내고 끌어안을 시간. 우리 모두에게는 그 시간이 필요하다. ---p.203
너무나 사랑하는 아들을 둔 내가 아들과 분리가 되는 순간부터 그와 적당한 그리움의 간격을 둘 수 있을지 모르겠다. 성숙한 이별을 위한 유예 기간이 지나서도 나는 그의 삶에 치대며 그를 찌르고 나도 찔림을 당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그리움의 간격을 빨리 깨닫고 적당한 거리를 찾을수록 아픔의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그만큼 행복의 시간은 늘어난다. 나는 나의 시어머니가 이제서가 아니라 조금 더 일찍 그랬다면 내 남자를 조금은 덜 아프게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많이 했다. 물론, 시어머니가 먼저 그랬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누가 됐든, 우리 세 사람은 서로를 적당한 거리에서 그리워하며 아껴주고 사랑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노력한다. 남편도, 아들도 내 소유가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모든 관계가 자연스러운 거리 속에서 평화로울 수 있도록 말이다. ‘거리를 유지하는 일’이란 분명 노력을 요하는 일이다.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다가가고, 내 마음이 허락하는 대로 멀어지는 것은 상대방을 아프게 할 뿐이다. 그것은 그래, 당신의 억울한 호소처럼 ‘사랑이 아닌 것’이 아니라 ‘서툴고 아픈 사랑’인 것이다.
---p.2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