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은 역사에 보기 드문 위재(偉才)였다. 그는 청년기부터 일편단심 ‘조선/한국의 독립’을 달성하는 일에 전력투구했다. 1919년 3·1운동 이후 재외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자로 추대된 그는 한민족의 독립을 회복하
려면 미국의 지원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확신하고 미국 위주의 외교 선전 활동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그는 이념과 출신 지역이 다른 많은 독립운동가로부터 배척당하고 또 미 행정부로부터 꾸준히 냉대를 받았다.
해방 후 귀국한 이승만은 재빠르게 국내 정치 기반을 구축한 다음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실패로 끝난 1946년 6월부터 미국 정부로 하여금 자신이 제창한 남한 과도정부 수립안을 채택하도록 설득하는 데 주력했다.
1947년 3월 발표된 트루먼독트린을 계기로 소련과 본격적인 냉전에 돌입한 미국은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실패하자 1947년 9월 드디어 이승만이 주장한 방침에 따라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소련과 합의한 5년간의 신탁통치안을 포기하고 유엔 결의에 따른 남한 단독정부 수립안을 새 정책으로 삼게 되었다. 이는 이승만 외교 독립 노선의 승리를 의미했다. ---「제1장 이승만의 정치 역정: 독립운동을 중심으로」
이승만은 개화기와 독립운동기를 통해 다른 어느 독립운동가나 정치인보다 더 활발하게 언론 활동을 펼치면서‘타의 추종을 불허하는’수준의 문적을 남긴 인물이다. 189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집필하고 발표한 신문과 잡지의 논설들이나『독립정신』,『 한국교회핍박』, ≪태평양잡지≫ 등 개인 저서와 잡지 기고문에 드러난 이승만의 정치사상은 집필 당시로는 가히 혁명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참신하고 진보적이었으며 서술 방식이나 문체가 유려하며 명쾌했다. 그가 해방 공간에 발표한「과도정부 당면 정책 33항」과「임시정책 대강」은 서술 기법상 세련되지 못한 점이 있지만 내용상으로는 건국의 청사진으로 손색이 없는 문건들이었다.
이렇게 따져볼 때, 이승만을 ‘지적으로 천박한’ 정치인으로 치부하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그는 개화기와 독립운동기에 한국이 배출한 정치 지도자들 가운데 ‘지적으로 가장 우수한 정치가’였다고 평가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1896년부터 1949년까지 이승만이 발표한 논저들의 내용을 살펴볼 때, 그에게는 확실히 대한제국(조선왕조)의 중흥에 필요한 개혁 구상과 대한민국 건국에 필요한 국가 건설의 비전이 있었다. 따라서 이승만이야말로 당대의 한국인 독립운동가들 가운데 광복 후 한반도에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건설하고 운영하는 데 필요한 사상적 준비를 가장 잘 갖추었던 정치가였다고 말할 수 있다. ---「제2장 이승만의 개혁 건국 사상」
이상에서 우리는 건국 대통령 이승만이 1948년부터 1960년까지 12년간 집권하면서 이뤄낸 업적을 정치, 외교, 군사, 경제, 교육, 사회, 문화·종교 등 일곱 분야에 나눠 살펴보았다. 그중 몇 가지를 다시 강조해보면 다음과 같다.
정치 분야에서는 자유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대통령중심제 정부를 수립한 다음 ‘거의 전제적인’ 권위주의적 통치체제를 유지하면서도 의회제도를 존속시키고 양당제도와 지방자치제를 도입하는 한편, 언론의 자유를 비교적 폭넓게 허용하는 등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이바지했다.
외교 분야에서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유엔과 미국 등 30여 개 국가로부터 승인을 받아내고, 6·25전쟁의 휴전 과정에서 미국 위정자들을 설득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 데 성공했다.
군사 분야에서는 6·25전쟁 중 유엔군과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함과 동시에 남한 국민의 충성을 확보함으로써 북한 침략군을 휴전선 이북으로 격퇴하고 나아가 이 전쟁을 계기로 국군의 규모를 ‘63∼70만 대군’으로 육성하는 데 성공했다.
경제 분야에서는 농지개혁을 단행함으로써 구래의 지주 토지 소유제를 청산하고 그 대신 자작농의 토지 소유제를 확립함으로써 농업의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한국 자본주의를 태동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비록 일반 국민의 경제생활 수준을 크게 향상시키지는 못했지만 만성적인 인플레이션을 극복하고 전후 경제 복구에 성공했으며 수입대체산업의 육성으로 공업화의 단초를 열었다.
교육 분야에서는 의무교육제도를 도입하고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해 이땅에 민주주의가 정착할 수 있는 기초를 닦았다. 나아가 중고등학교를 대폭 증설하고 대학을 확충하며 해외 유학을 장려함으로써 ‘교육 기적’을 이뤄내 산업화와 민주화에 필요한 고급 인재를 양산했다.
사회 분야에서는 농지개혁으로 전통적인 양반제도를 뿌리 뽑고, 남녀에게 동등한 교육 기회와 취업 기회를 보장하는 정책을 추구해 한국 사회의 평등화에 이바지했다.
문화·종교 분야에서 이승만은 한글 전용 정책을 철저하게 시행함으로 본격적인 한글 시대를 개막하고 전통문화의 계승과 보존에 필요한 조치를 마련함으로써 민족문화 창달에 이바지했다. 한편으로 기독교를 장려해 유교 국가였던 한국을 아시아 굴지의 기독교 국가로 탈바꿈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이룩한 위와 같은 업적들은 대체로 그의 집권 전반기, 즉 1954년 이전에 달성되었다. 비교적 짧은 기간에 그렇게 많은 업적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탁월한 능력과 집념 이외에 여러 가지 다른 요인에 힘입은 바 크다. 그 가운데 하나는 1945년부터 1948년까지 미 군정이 추진한 개혁이고, 다른 하나는 6·25전쟁의 영향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 군정기에 개시된 일련의 개혁을 계승해 비교적 쉽게 자기의 개혁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그 두드러진 예는 농지개혁, 교육과 사회제도 개혁, 기독교의 장려 등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6·25전쟁 때문에 여러 분야에서 자기가 기대했던 것 이상의 업적을 이룩했다. 예를 들면,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 63만~70만 대군 육성, 양반제도의 붕괴, 기독교 교회의 폭발적 성장 등은 6·25전쟁이라는 비상한 여건 때문에 가능했던 업적들이다. 말하자면, 이승만 대통령은 6·25전쟁으로 말미암아 상당히 많은 분야에서 자기가 설정한 개혁 목표를 초과 달성하고 있었던 셈이다.
---「제3장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 거시적 재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