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분명한 사실은, 원문이 헬라어로 기록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저자가 헬라어를 사용하는 독자들을 대상으로 썼다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첫 독자들은 팔레스타인의 셈어(아람어와 히브리어)에 익숙하지 않았던 듯이 보이는데, 저자가 셈어를 사용할 때면 잠시 흐름을 끊고서 그 언어가 들어 있는 구절을 해석해 주기 때문이다. 나아가 저자는 유대교의 관습과 종파 집단을 설명하는데, 이는 독자들이 팔레스타인에 거주하지 않으며 아마도 유대인이 아님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 모든 사실은 그저 일차 독자들이 어떤 사람이 아니었는지를 말해 줄 뿐이어서 조금만 도움이 된다. 유일하게 도출해 낼 수 있는 긍정적인 결론은, 마가가 팔레스타인이 아닌 어딘가에 있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글을 썼다는 것이다. 마가복음 저작 장소를 더 구체적으로 규정하려는 시도는 폭넓은 동의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이 진정 뜻하는 바는 마가복음의 역사적 정황을 보면 이방인 가운데서 기독교의 전파, 곧 처음에는 필시 유대교의 한 분파로 보였을 기독교 운동이 별개의 종교로 변하는 발전 상황이 나온다는 것이다.
---「서론」중에서
이 짧지만 온전히 압축된 소개 단락에서 마가복음은 우선 저자 스스로에게 예수님의 진정한 중요성을 요약해 주는 칭호들로 그분을 서술하고, 이어서 예수님을 구약 예언의 주제와 연결하며 역사적 인물인 세례 요한과 연결한다. 마가복음이 제자들까지도 포함하는 인간 등장인물들이 전반적으로 예수님의 진짜 정체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것으로 소개하기는 하지만, 마가가 예수님의 진정한 위엄을 전할 때 선호하는 용어로 판명된 칭호인 ‘그리스도’(메시아)와 ‘하나님의 아들’을 첫 문장에서부터 독자에게 제시한다는 점은 흥미롭다. 책 내적으로는 예수님을 둘러싼 비밀 유지가 어느 정도 있지만, 독자에게는 처음부터 그 비밀을 정확하게 알려 준다. 그 결과 독자는 예수님을 대적들이 배척하고 제자들이 오해한 일이 참으로 비극적이고 통탄스럽다고 느낄 준비를 하게 된다. 이러한 칭호들을 사용해 예수님을 소개하는 데서 그대로 드러나듯이 저자는 예수님을 향한 경배로 글을 이어 나가며, 역사적으로 무심히 관찰하는 견지에서가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난 경건한 관심에서 이 저작을 기록한다.
---「1. 앞서 온 이와 예수님(1:1-20)」중에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에서 일어났다고 장소를 세 번 언급한다(31, 32, 35절). 의도적으로 이렇게 했다면 마가는 예수님이 오천 명을 먹이신 일과 광야에서 모세의 지도 아래 있을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공급하신 일(출 16장) 사이에 유사점을 찾으려는 생각이었을 수 있다. 예수님의 기적과 모세와의 연관성은 큰 무리를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이라고 언급함으로써 입증된다(34절). 이 표현은 민수기 27:17을 넌지시 인용하는 것 같은데, 거기서 모세는 하나님께 자신의 역할을 이어받을 지도자를 주시기를 기도한다. 사람들에 관한 이 같은 묘사는 에스겔 34:1-31도 떠올리게 한다. 거기서 하나님은 다윗과 같은 왕을 그들의 목자로 보내셔서 자신의 ‘양’을 먹이겠다고 약속하신다(특히 겔 34:23). 다시 말해 마가는 이러한 구약 구절을 넌지시 인용하면서 독자들에게 예수님이 지금 이스라엘이 간절히 기다리던 왕, 곧 모세처럼 그 백성을 가르치고(34절) 먹이는 메시아의 역할을 이행하고 계신다고 말한다. 이 사건의 서술 방식은 예수님을 메시아,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이 보내신 양식, 미래의 구원에 관한 구약 예언의 성취로 그린다. 그 점을 밝히기 위해 여기서는 예수님의 행동에 구약 이미지를 ‘입힌다.’ 헤롯 ‘왕’에 관한 에피소드 바로 다음에 이 이야기가 나온다는 사실은, 사악한 헤롯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합당한 왕이자 진정한 지도자임을 시사한다.
---「11. 기적이 드러나다(6:30-56)」중에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라는 말씀은, 맥락상 다른 제자들을 정직하게 대하고 그들을 섬기는 사람 역할을 감당하라는 뜻이다. 어린아이가 (10:13-16에 나오는 경우처럼) 겸손의 예로 쓰이지는 않았다. 37절의 쟁점은 어린아이를 본보기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이런 어린아이”를 대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를 동료 제자의 상징으로 사용한다는 논리는 사실상 아람어(아마도 예수님이 제자들을 가르칠 때 사용하셨을 언어)와 헬라어(마가가 글을 쓸 때 사용한 언어)에서 “어린아이”라는 용어가 “종”(섬기는 사람)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점에 근거한다. 따라서 모든 제자에게 “섬기는 자”가 되라고 35절에서 강권하는 말씀 뒤에 “어린아이”라는 단어에 대한 언어유희가 이어져서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에게 “어린아이/섬기는 자”를 잘 대접하라고 강권한다(37절).
---「17. 예수님의 죽음과 제자도(9:30-50)」중에서
제자들이 “깨어 있으라”는 명령을 들을 때(35-37절), 이는 자기 일을 하면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지 종말이 임할 날을 나타내는 징조를 잘 살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깨어 있으라”로 번역한 단어들과, 주인이 집을 떠나 있는 동안 남아서 해야 할 일이 있던 종들의 예를 보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다(34-36절). 대조적인 단어는 “자는 것”으로(36절), 자기 임무를 수행하지 않고 주인이 돌아오리라는 경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자세를 뜻할 것이다. 종들은 주인을 찾으며 지평선을 유심히 살피다가 주인이 오고 있는 모습이 보이면 당황하여 허둥거리지 말아야 하며, 오히려 일상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32-37절에 나오는 예수님 말씀은, 그분을 따르는 사람은 복음을 전파하고 복음을 위해 살아가는 사명을 계속해 나가서, 언제라도 그들의 주인이 돌아오셨을 때 그들이 ‘근무 중’인 것을 보시도록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24. 인자의 오심(13:24-37)」중에서
초기 전승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주의 만찬은 교회 모임에서 정해진 부분이었으며, 예수님이 열두 제자와 함께하신 마지막 만찬을 상기하는 것은 예수님 이야기에서 표준적인 부분이었다. 마가의 기록은 기독교 초기 단계와 이 이야기의 연관성을 보여 주는 상세한 증거 몇 가지를 담고 있어서 전체 수난 내러티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이야기가 제시하듯이 주의 만찬 기념에서 나타나는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이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마지막 만찬’을 사실상 최초의 주의 만찬으로 묘사한다. 그래서 주의 만찬에서 사용하는 요소들(떡과 포도주)이 예수님의 희생적 죽음과 특별히 연관성을 지니게 되었다. 떡과 잔을 두고서 하신 말씀은(22-24절) 다가올 예수님의 죽음을 해석해 주면서, 그 죽음을 교회의 기초인 하나님의 새 언약에 필요한 구성 요소로 삼는다. 10:45의 말씀처럼, 22-24절 말씀은 예수님의 죽음에 강력한 의미가 있음을 확인해 주고 교회의 초기 신학 견본을 제시해 준다. 마지막으로, 이 구절은 만찬을 기념하는 일을 하나님 나라를 향한 소망과 연결 지어서 초대교회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견해, 계속되는 성찬식 교제,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대한 미래 지향적 기대를 온전히 유지했는지 보여 준다.
---「26. 마지막 식사(14:12-26)」중에서
최후의 역설적인 분위기는 구경꾼들과 유대교 권력자들이 예수님을 향해 스스로를 구원하여(30-31절)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는 조롱이다(32절).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믿었을지도 모른다. 이 조롱은 무엇이 진정 하나님의 종인 메시아의 사역을 구성하는지에 관한 그들의 왜곡된 개념을 드러내는 동시에 예수님의 사역의 핵심을 짚어 낸다. 조롱하는 자들은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라고 말하면서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진정한 십자가의 진리를 표현했다! 예수님의 죽음은 남을 위한 “대속물”이며(10:45), 정확히는 이 “남”들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은 절대로 자신을 구원해서는 안 되었고 구원할 수도 없었다! 마가가 얼마나 반어법을 많이 사용했는지는 앞에서도 보았지만, 예수님의 대적들이 복음의 핵심 진리를 부지중에 말하는 이 표현은 확실히 마가복음 전체에서 역설적 내러티브의 절정이다.
---「30. 십자가에 달리시고, 숨지시고, 묻히시다(15:21-47)」중에서
최근에 일부 학자들은 마가가 실은 마가복음을 8절에서 마무리했으며,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내용은 없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 관점에서 보면 마가는 그의 복음서를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열두 제자에게 사명을 위임하시는 내용으로 마무리하려고 구상하지 않았다. 대신 독자들이 어느 정도 열린 결말이자 결론에 이르지 않은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와 대면하게 하려고 했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마가는 독자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갈릴리로 가라는 명령을(7절) 떠안기를 원했으며, 그 명령에 어떻게 해서든 응하기를 바랐다. 어떤 이들의 제안처럼 마가는 독자들이 갈릴리로 가서 부활의 영광 중에 나타나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을 바랐는가? 아니면 “갈릴리”를 상징적으로 사용하여(앞에서 기술했듯이), 머지않아 예수님이 영광 중에 나타나시리라 믿으며 독자들 자신의 “갈릴리”에서 예수님과 열두 제자가 걸어간 제자의 길을 따라가게 하려고 했는가? 마가가 정말로 여기에서 마가복음을 끝냈다면 그것은 보기 드물게 영리하고 절묘한 방법이었을 것이며, 얼마나 영리하고 절묘한지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학문 연구에서 아무도 마가의 의도를 발견하지 못했다!
---「31. 셋째 날, 예수님이 부활하셨다(16:1-8)」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