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개론 수업 시간에 한 학생이 다음과 같이 짓궂게 물었다. “왜 나쁜 사람들에게 선한 일이 일어납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엄청난 문제의 양면성을 말로 표현했다. 그것은 욥기의 어두운 시가의 영감이 되었고, 그리고 수천 년 후, 유대인 대학살을 주제로 하는 문헌들의 영감이 되었다. 이 장에서 우리는 신적인 능력이라는 기호 아래 고난suffering이라는 고전적 신학적 문제를 성찰한다. 어떻게 전능하고 선한 신이 그토록 불공정한 고난이 일어나도록 하실 수 있는 것인가? … 트라우마의 열기가 살아있을 때가 아니라 성찰이라는 나무 그늘 아래서 그 문제들을 제기할 것이다. 왜냐하면, 비록 신학이 고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하더라도, 어쩌면 신학은 우리 눈 속에 들어있는 또 다른 신학적 들보를 제거함으로써 고난을 완화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지는 하나님의 의지이시다”와 같은 악의 없는 신학적 쉽볼렛들은 고난을 더 악화시킬 수 있고 또 악화시켜왔다. 고난의 인간적 원인들을 제기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그 쉽볼렛들은 희생자들을 비난하는 경향을 보여왔다. 그러한 신학적 명제들은 고난을 덜어줄 잠재력을 지닌 관계들의 영향력을 탈취하고 또 고난을 강화시키는 관계들에 동기를 부여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신학적 분별력은 힘의 신학적 의미를 시험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 진척될 수 없다.
---「폭력과 혐오 시대에 하나님의 전능성 재고찰: 전능성을 넘어서」중에서
조원희Anne Wonhee Joh는 자신이 전개하는 십자가의 신학의 맥락 속에서 관계의 끈적거림에 대한 두려움을 적어주고 있다. 그녀는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가 에로스를 꿀단지에 손이 들러붙은 어린아이처럼 묘사하는 장면을 지적한다. “그의 끈끈함은 덫이다, 그것은 거머리처럼 달라붙는다, 그것은 그것과 나 자신 사이의 경계를 공격한다.” 여성성과 동일시되는 끈적한 느낌들을 얼마나 혐오스러워하는지가 동서양의 가부장제의 증상임을 조원희는 보여준다. 그녀는 사랑을 한국어 정情, 즉 연결성connectivity으로 상징화한다. 그 사랑은 “개인주의와 분리를 가치 있다고 평가하고, 공동체적 상호의존성과 만물의 상호의존됨을 평가절하하는 문화 속에서 하나의 위협이다.”
되어가는 자아의 모험은 끈적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관계성들은 개인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정말 우리를 덫에 빠뜨리려고 위협하기 때문이다. 자유케 하는 진리는, 릴리가 학대로부터 탈출한 것처럼 극적인 탈출을 통해 도약할 수도 있다. … 뺨을 돌려주는 것과 같은 용서의 덕은 자기 자신이나 타자를 비하하는 도덕주의가 되었다. 그러한 용서는 억압을 중단시키기 위해 작용하는 것만큼이나 또한 압제자들에게 책임을 면제시켜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가공된 사랑의 쉽볼렛을 말하지 않기를 배우고 있는 중이다. 우리가 더 큰 사랑의 모험에 착수할 때, 심지어 용서도 다부진 되어감resolute becoming의 제삼의 길로 열려진다.
---「프레카리아트(the Precariat) 시대의 함께-고난당하는 열정: 끈적거리는 정의」중에서
“희석된 기독교Christianity Lite”는 성서가 문자적으로 진리임을 주장하는, 그래서 문자 그대로 복음서에는 전혀 근거가 없는 반-동성애, 반-낙태 운동을 위해 그의 그리스도를 사용한다. 그 기독교는 무척 가볍다. 왜냐하면 그것은 편리하게 예수를 빼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의 정치적 동기들에 상관없이, 대부분의 신약성서 학자들은 상징적 그리스도가 본문 전승의 최초단계부터 역사적 예수의 자취들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는 데 동의한다. … 이 사도행전이 전하는 그림에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무엇인가가 빠져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이를테면, 그의 삶? 신조들은 모두 초자연적 기원을 강조하고, 그런 다음 그의 탄생으로부터 그의 죽음과 부활로 곧장 가로질러 간다. 그러면서 신조들은 예수의 삶과 이야기 그리고 사랑, 그의 설교, 지혜, 치유 그리고 예언에 대한 언급을 결여하고 있다. 그에 대한 한 마디의 속삭임조차 없다. 사제이자 우머니스트 신학자인 켈리 브라운 더글라스Kelly Brown Douglas는 그것을 못 박아 이야기한다: “그의 목회가 사실상 무시되었다.” … 신조들은 통합된 믿음의 과거 형식들에 대한 중요한 역사적 증언들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틀걸이이지, 초상화 자체가 아니다: 그 신조들은 유대인 태생으로서, 아프리카계 아시아인이었고, 세속적이고 수다스러웠던 사람에 대한 복음서의 증언을 듬성듬성 간과한다.
---「예수/그리스도: 과정으로서 그리스도, 비유로서 예수」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