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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렬한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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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03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162쪽 | 240g | 128*205*10mm
ISBN13 9791130815985
ISBN10 1130815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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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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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가 목을 물자 네 발로 허공을 걸어가는 물소
물소의 눈빛 추억 이념 가족의 근황은 묻지 않고
뱃속에 저장된 수만 송이 꽃과 풀잎 속의 햇빛
달빛의 무게에 춘하추동 화인(火印)은 보지 않고,

사자는 물소의 목숨에 이빨을 박고 매달렸다
단지 배고플 뿐이고 고픈 이전으로 가야 한다
목숨이 아니라 부른 배이고 싶다는 사자와
네가 문 것은 아들이 기다리는 어미의 목이라는,

풍경을 경치로 저물고 있는 세렝게티
침묵 이전의 이전으로 가라앉고 있는 벌판
무슨 대화가 노을이 배경으로 깔리고 서늘한가
죽어야 하는 살아야 하는 시간이 저리 아늑한가

물소는 제 몸을 버리고 아들에게 돌아갔다
소가 던지고 간 고기로 배고픔을 잊은 사자
물소와 끝내 한마디 대화하지 못하고
사자에게 끝끝내 한마디 건네지 못한 하루가,

물소의 뼈만 벌판에 남긴 채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강둑에선 하마를 질문하듯이 물어뜯는 하이에나
정답인 양 남은 코끼리의 뼈를 탐색하는 독수리
표범은 나무 위에서 발톱을 슬슬 긁고 있다.
--- 「격렬한 대화」 중에서

햇빛이 비추자 말뚝에서 그림자가 걸어 나온다,를
쫓겨났다 물러났다 밀려났다 등장했다 발견했다
그 낱말들이 서로 밀고 당기느라 야단법석이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고 반은 틀리고 반은 맞은,

아니면 전부 맞고 전부 틀린 전부 틀리면서 맞은
그림자가 길어지더라도 말뚝은 고요하다
짧아져도 가벼워지지 않는 말뚝에 매인 소를
풀면 말뚝은 단지 땅에 박혀 있는 나무,

그림자가 제 몸으로 다시 돌아오는 저녁이면
말뚝은 어디에 그림자를 간직하고 있을까, 라는
질문이 말뚝보다 깊이 어둠에 박히는 것이다
그 질문의 그림자도 어디에 숨었을까, 라는

말뚝을 품은 채 걸으면 그림자처럼 길어지는
따라오는 동행하는 멀어지는 말뚝의 힘
말뚝을 뽑으면 그림자도 뽑을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질문을 밀고 들어와 가지를 벋는다

꽃이 슬슬 피는 것은 새로운 말뚝이 되는 것
선은 악으로 악은 선으로 뽑혀지지 않는가, 라는
거대한 말뚝을 박으니 비로소 고요해지는 말뚝에
불을 붙이자 그림자가 돌아오다 모두 타버린다.
--- 「선과 악의 결투?」 중에서

김 시인은 신춘문예에 백 번 떨어졌다
장 시인은 삼백 번 떨어졌다 하고
최 시인은 웃으면서 오백 번 하면서
술잔을 돌리다가 한 잔 더 마신다

나는 속으로 천 번 떨어졌다고
하려다 문득 얼마나 무능하면!
핀잔 들을까 봐 가만히 웃으면서
연거푸 석 잔을 마시다가

에헤라 꽃이 많이 떨어졌으니
그만큼 열매도 맺히지 않을까
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저마다 타고난 시기에 꽃이 피고,

열매 맺는 것이 아닐까 하면서
다시 석 잔을 혼자서 마시니
뼛속마다 함빡 피었는지 볼이 붉다
아, 또 떨어질 꽃잎이 많아 좋구나!
--- 「낙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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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한 살려고 애쓰는 것이다. 독수리가 토끼의 과녁에 발톱을 넣듯이. 사자가 목을 물자 네 발로 허공을 걸어가는 물소처럼. 세상은 온통 약육강식에 적자생존인가. 하지만 바이러스도 사람이 죽으면 저도 죽어야 한다. 생명체 종(種)의 하나인 인간이 살려고 스스로를 죽음의 낭떠러지로 끌고 올라간다. 먹고산다는 것이 얼마나 격렬한 대화 행위인가. 인간적으로 살기 위해 얼마나 자주 별유천지의 비인간이 되어야 하는가. 마스크로 입을 봉해야 하는 시대이다. 그래서 시를 쓴다는 것이 얼마나 처절한 자기모순인지. 강하고 크고 뛰어난 시인 강태승이 두 번째 시집에 쏟은 내공의 힘이 내 뼈를 시리게 한다. 살이 떨리게 한다. 상생의 길을 찾는 시인의 노력이 눈물겹다. 신춘문예에 천 번 떨어졌고 문학상을 열 번 받았다. 칼로 나무에 글자를 새긴 것 같다. 진천 백곡 촌놈이 시를 아주 촌스럽게 썼다. 읽고 놀라지 마시라. 시퍼런 언어의 울돌목에서 반드시 살아남을 시인이다.
- 이승하 (시인·중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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