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04년 03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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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343쪽 | 382g | 153*224*30mm |
ISBN13 | 9788988027400 |
ISBN10 | 898802740X |
발행일 | 2004년 03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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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343쪽 | 382g | 153*224*30mm |
ISBN13 | 9788988027400 |
ISBN10 | 898802740X |
생각이 너무 많은 어른들을 위한 심리학 (10만부 돌파 기념 스페셜 에디션)
16,020원 (10%)
현재 우리는 스펙쌓기와 함께 끝없는 무한 경쟁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어른들의 세계입니다. 그렇다면 아이들의 세계는 어떠할까요. 최고가 되기 위해 사교육에 열광하고 국내, 국외 할 것 없이 내로라하는 명문이라 이름 붙은 곳으로 발을 뻗어 나가기 바쁩니다. 이 현상이 현시대에만 국한된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미 교육이라는 배움의 지식을 습득할 때부터 인간은 경쟁의 순환 속에 내던져져 있었습니다. 선의의 경쟁에서 차츰 독보적인 나로 거듭나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최고가 되기 위해 과열 경쟁의 악순환이 거듭됐습니다. 누구나 최고가 되길 바라고 자신의 명예를 드높이길 원합니다. 하지만 그 수순을 아직 자아 형성도 제대로 되지 않은 어린 청소년들에게 강요하기란 너무 가혹하다 생각지 않으십니까?
저의 10대 시절을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책이 한 권 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을 꼽으라면 주저함이 없이 이 책을 선택하겠습니다. 원작은 영화이지만 저는 책을 먼저 읽고 영화를 접했기에 버킷리스트에 '책' 으로 선정하기로 했어요. 세월의 무게에 따라 남다르게 다가오는 책이 있습니다. 10대와 20대 그리고 현재... '버킷 리스트'라는 문구를 보는 순간 저의 뇌리에 스치고 간 책은 고전문학도 아니고 위인전도 아닌, 이 작품밖에 없었습니다. 어려도 감동은 알 수 있기 마련입니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웰튼 아카데미에서 공부하는 또래 아이들에게 공감하고 그 아이들을 이끌어가는 키팅 선생님을 보면서 저런 선생님께서 현실, 내 가까이에도 존재했으면 하고 무척이나 바랐던 기억이 있네요.
10대 시절에는 주입식 교육에 힘입어(?) 독서 또한 어른들이 권하는 책, 위인전, 전기 등을 주로 읽었습니다. 아마 이 책은 10대 중반 또는 후반 즈음에 저 스스로 찾아서 읽었던 책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무엇이 그토록 저에게 큰 울림을 주었느냐고 묻는다면 학생의 신분에서 오는 압박감에 의한 동질감, 그로부터 해방감을 원하는 처지에 있던 게 『죽은 시인의 사회』를 공감하며 읽게 한 가장 큰 요인이 아니었나 싶어요. 10대 시절 아무리 반항했다고 한들, 저는 어른들의 울타리 안에 있는 미성년에 불과했습니다. 부모님, 선생님들이 하라는 대로 하기는 싫어하면서 억지로 따라갈 수밖에 없는 처지였던 거죠. 그런데 이 작품에 등장하는 존 키팅이라는 인물은 제게 가르침을 주었던 선생님들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아니, 조금 많이 달랐다고 해야 하는 게 맞으려나요. 미래를 위해 공부하라는 어른들은 많았지만 내 현재의 삶에 충실하고 즐겨야 한다는 말을 해주는 어른은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엇나가면 화살같이 귀에 박히는 말이 있죠. '넌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니.' 아이들은 좀 엇나가도 되고 반항해도 되고 사고도 치고 적당히 놀기도 하고 그렇게 자라야 하는 것 같은데요. 엉덩이가 짓무르도록(?) 의자에 파묻혀 공부하는 것만이 커서 '뭐라도' 될 것처럼, 그렇지 못하면 실패한 인생을 살 것처럼 지레 겁을 주는 어른들 속에서 살았었고 요즘 아이들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이 작품이 빛이 될 수밖에 없었던 거죠. 학생을 공부만 해야 하는 존재로서가 아니라(물론 학생은 공부해야죠^^) 한 인격체로서 바라보고 삶을 뜨겁게 살아가야 한다 말해주는 어른이 거기 있었으니까요. 감동이 큰 만큼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이 작품 속에는 최고가 되기를 갈망하는 어른들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런 부모, 선생들의 욕망을 대신 실현해줄 기계적이고 인형 같은 아이들이 있습니다. 어른들이 원하는 건 자신의 자식들이 오로지 최고의 성적을 거둬 최고의 명문대학에 가는 길밖에 없습니다. 다른 길은 거들떠도 보지 않아요. 그래서 아이들을 혹독하게도 공부시킵니다.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스파르타식 교육의 강행군이 이어집니다. 그렇다고 재미있느냐 하면 그도 아니에요. 과거의 교육방식이 그렇듯 오로지 주입, 암기, 세뇌식 수업시간이 지겹도록 아이들을 옥죄고 있습니다. 그런 웰튼-헬튼- 아카데미에 구원자가 찾아옵니다. 우리의 인생은 망망대해에 떠있는 한 척의 표류하는 배입니다. 어른들의 의무는 이제 막 돛단배를 띄운 자라기 시작한 아이들에게 좋은 나침반을 쥐여주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후의 목적지까지는 스스로 찾아가야 하지요. 가끔 조타수 역할을 해주는 정도가 어른들이 할 몫이지 않을까요? 그런데 이 학교에서는 선장과 조타수의 역할, 나침반까지 꼬옥 쥐고 멋대로 목적지로 이끌려는 어른들로 들끓습니다. 그래서 존 키팅이라는 선장이 이 아이들을 찾아온 것이지요. 스스로 자신을 선장이라 일컫는 그는 교육 이전에 아이들의 인성을 먼저 닦으려 합니다. 자유롭게 사고하는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최고라는 목표보다는 자신의 삶을 먼저 바라보라고 소리칩니다. 오지 않은 내일을 위해 미친 듯이 달리기만 할 게 아니라 오늘, 이 순간을 마음껏 즐기라고 외칩니다.
웰튼 아카데미에는 어른들의 욕심에 세뇌당한 아이들이 저마다의 꿈을 잃고 있었습니다. 주체적인 의지는 잃어버린 채 의존적이고 의타적인 아이들로 자랄 뿐이었지요. 아이들이 원하는 꿈이 아닌 어른들의 꿈을 주입하고 이루도록 채찍질을 해댔습니다. 아이비리그에 진학해 의사가 되기를 강요하는 닐의 아버지, 형과 같은 수재가 되기를 갈망하며 본인의 의사는 묵살된 채 웰튼으로 전학 오게 된 토드와 그 밖의 꿈을 잃고 날개를 꺾여버린 아이들의 마음에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비상하게끔 유도해주는 키팅 선생의 교육관은 지금 현재 우리 시대에도 꼭 필요한 부분입니다. 그 시절 소년이 그렇듯 이성에 눈떠가는 낙스의 사랑앓이는 약방에 감초같이 청소년 시절에 꼭 있을법한 에피소드기도 했고요. 여기 등장하는 아이들은 모두 키팅 선생이 웰튼 재학시절 몸담았던 서클 '죽은 시인의 사회'를 통해 시를 읊고 낭독하고 그들을 기리며 새로운 자아로 거듭납니다. 용기를 잃은 아이는 자신감을 되찾고 꿈을 실현하고 싶었던 아이는 꿈을 이루려고 발돋움합니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언제쯤 입시지옥을 벗어날 수 있을까요? 언제쯤 여기에서처럼 가슴에 불을 지핀듯한 여운을, 스스로 뭔가를 이루고자 하는 주체할 수 없는 의지를 만끽할 수 있을까요. 너무도 먼 이야기인가요?
Carpe diem!
영화의 명대사이기도 한 이 문장은 고대 로마의 유명한 시인 퀸투르 호라티우스 플라쿠스의 시 Odes의 마지막 문장인 "Carpe diem, quam minimum credula postero" 이라는 말에서 유래했습니다. 원문은 '오늘을 즐겨라, 가급적 내일이란 말은 최소한만 믿어라'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헛된 기대보다는 오늘 나에게 주어진 하루에 최선을 다해서 즐겁게 살아가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를 읽은 후부터 제 삶의 신조가 되어버린 이 문장을 볼 때마다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이 문장을 소리쳐 말하는 존 키팅 선생이 작품 안에 존재하기에 책의 첫 장을 펼치자마자 온몸으로 찌릿 전율이 일기도 했습니다. 드디어 만나는구나! 10년이 더 훌쩍 지난 시간 속에서도 저의 감각은 그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 시절 사춘기 소녀의 감동이 결코 헛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 작품은 원작이 영화이기에 영상으로 봐야 더 절절한 감동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저 또한 책과 마찬가지로 로빈 윌리엄스의 연기를 보며 눈물을 쏟기도 했었고요. 작가 톰 슐만의 경험담을 녹여낸 영화의 시나리오를 낸시 클라인바움이 각색한 것이 이 책입니다. 10대 때는 톰 슐만의 시나리오를 책으로 펴낸 작품을 읽었기에 기억의 망각과 함께 감동의 여운은 여전하나, 새로운 마음으로 이 책을 조우했습니다. 키팅 선생님의 유쾌하면서 자유분방한 유머에 깔깔거리며 웃기도 하고 교육 시스템의 폐단에 분노하고 눈물 흘리기도 했습니다. 마지막 장을 덮고는 왠지 모를 씁쓸함이 따라오기도 했습니다. 과연 세상을 바꾸려 하는 자는 승리하는 걸까요? 안타깝게도 이 작품에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키팅 선생님을 영원히 캡틴으로 기억할 제자들과의 눈물 젖은 작별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깨어나고 보아야겠지요.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요. 참 단순하나 꼭 깨달아야 할 진리입니다. 성공과 명예를 향한 미래지향적인 삶도 나쁠 건 없지만 그에 앞서 참교육의 의미와 자신의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 말입니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의 삶을 즐기고 있습니까? 오늘이 지나면 이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내일 웃을 게 아니라 지금, 내일 행복할 게 아니라 지금, 우리는 아름답게 내 삶을 즐겨야 합니다. Carpe diem!
"내가 왜 이 위에 섰는지 이유를 아는 사람? 이 위에 선 이유는 사물을 다른 각도에서 보려는 거야. 이 위에서 보면 세상이 무척 다르게 보이지. 믿기지 않는다면 너희들도 한 번 해봐. 어서, 어서! 어떤 사실을 안다고 생각할 때 그것을 다른 시각에서도 봐야 해. 틀리고 바보 같은 일일지라도 시도를 해 봐야 해." -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中-
죽은 시인의 사회 하면 카르페 디엠과 함께 명대사가 있죠.(아주 많죠.) 영화도 그렇고 책에서 역시 이 마지막 장면에서 폭풍눈물을 쏟았네요. "Oh captin, my captin!" "Thank You Boys, Thank You."
*제 기억에 있던 그 시절의 책은 1990년도에 출판된 모아 출판사의 책인데 이미지 구하기도 쉽지 않네요. 표지 이미지를 보니, 그때의 감동이 다시 한 번 밀려오는 것 같아요.
가장 논란이 되는 점부터 말해보련다. 닐이라는 학생이 자살을 했다. 과연 누구의 잘못이란 말인가? 한창 꽃피울 고등학생 청년이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권총으로 한밤중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만 것이다. 닐은 웰튼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학업성적도 우수했으며 교우관계도 원만했고 여러 동아리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범생으로 미국의 명문대인 하버드 의대에 입학할 것으로 점쳐질 정도 전도유망한 학생이었다. 그런데 웰튼고에 존 키팅이라는 국어선생이 새로 부임하면서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비밀조직에 가입한 것으로 밝혀졌고, 부모님 몰래 연극 오디션을 보고 연극무대의 초연을 펼친 뒤에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와 축하를 받으며 성황리에 공연을 마쳤지만 '아버지의 허락'을 받지 못했던 관계로 아버지의 꾸중을 들었던 그날밤에 자살하고 만 것이다.
우리는 이 사건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유명한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이미 보았기에 때문이다. 그래서 사건 정황을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닐의 죽음'은 강압적인 아버지의 교육관이 문제의 발단이었고, '지옥고(Hellton)'라고 불리는 '웰튼고'의 엄격한 교육시스템이 한 몫 단단히 한 사건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끔찍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학생들에게 '존 키팅'이라는 한 줄기 희망이 등장했던 것이다. 딱딱하기만 한 수업스타일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생각'하고 '스스로 깨닫음'을 추구하는 키팅의 교육관이 '성적지상주의'로 일관하는 웰튼고 학생들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비밀조직이 생겨나면서 일부 학생들이 키팅의 교육관을 몸소 실행에 옮기게 되었고, 그 조직원 가운데 리더였던 닐은 '자신의 꿈'을 펼치는데 최대 걸림돌이었던 '아버지의 욕망(?)'을 극복하지 못하고 그만 생을 마감하였던 것이다.
닐의 아버지가 갖고 있던 욕망이란 하나 뿐인 자식이 '성공적인 인생'을 살게끔 전폭적인 뒷바라지는 마다하지 않는 것이었는데, 문제는 그 뒷바라지가 닐에겐 '끔찍할 정도의 억압'이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닐의 의견이나 생각 따위는 듣지도 않은채 아버지가 이미 정해놓은 '닐의 미래(성공)'를 강제적으로 밀어붙였다는 말이다. 닐은 이런 아버지의 강압에 늘 불만이었지만 '자식의 성공이 보장된 삶'을 위해 헌신하는 부모님 앞에서 한마디 의견도 내놓지 못한채 그저 묵묵히 따르고만 있었던 것이다. 사실 아직 어린 학생에 불과하니 어른들이 말하는 '성공비결'에 반박할 다른 의견조차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닐 자신도 훗날 의대를 졸업한 뒤에 '역대 연봉'을 받으며 부와 명예를 한껏 누리는 삶이 싫지 않았기에 그저 부모님의 뜻에 따랐을 뿐이다. 정작 닐 자신은 '하고 싶은 것들'이 너무나 많았지만, 그것이 '성공지름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쓸데없는 일'이라 말하는 부모님의 말씀과 명문고 임직원의 조언 때문에 뭐라 반박하지도 못하고 그저 자신을 억누르며 공부에만 몰두했던 것이다.
이런 차에 '키팅 선생님'이 웰튼고에 부임했다. 키팅도 웰튼고 졸업생이었으며 명문대인 옥스포드 수석장학생으로 명예로운 졸업한 뒤에 다시 모교에 부임했던 것이다. 그래서 웰튼고교의 교장선생도 키팅 선생님에 대해 기대가 컸다. 워낙 '전통'과 '명예', '규율', '최고'를 추구하는 학교였으니 그런 쪽으로 스팩이 빵빵한 키팅 선생님이 모교에 찾아온다는 것 자체가 명문고의 위상을 더욱 드높이는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키팅의 생각은 달랐다. 오직 명문대 진학율만을 중요시하고, 그것을 '전통'이라 내세우며 학생들에게 '공부하는 즐거움' 대신 지옥과 같은 '입시교육'만을 강요하는 웰튼의 교육방식과는 정반대의 신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키팅은 첫 수업에서 '카르페 디엠(오늘을 즐겨라)'라는 라틴어 격언을 수업했다.
'오늘을 즐겨라', '현재에 충실하라'라는 뜻을 가진 '카르페 디엠'에는 사실 전제조건이 있다. 바로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다. 이어서 말하면 뜻이 더욱 분명해진다. 다시 말해, 언제 죽을 지도 모르는 인생을 살면서 가장 중요한 때는 '바로 지금'뿐이다. 그러니 현재에 충실하고 오늘을 즐기라는 뜻이다. 이 두 문장을 줄이면 '바로 지금 최선을 다하라'는 뜻이기도 하다. 키팅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모든 수업의 핵심내용이기도 하다. 그래서 자신의 뜻과는 달리 학업만을 강요하던 학교와 부모님의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맹목적인 공부만 하던 학생들에게 우선적으로 '영감'을 선사하기도 한 것이다. 자신의 인생은 '자신의 선택'에 의해 만들어가는 것이며, 그래야 행복할 수 있고, 나중에 후회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내 앞에 닥친 '현재의 삶'에 충실하면 나중에 어른이 된 뒤에 '어떤 삶'을 살든 후회할 리가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를 테면, 닐이 무사히(?) 하버드 의대를 마치고 '억대 연봉의 의사선생'이 되어 부유한 삶을 살고 있더라도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것들을 모두 포기하고 '남이 시키는대로'만 하다가 어른이 되었다면 분명 후회하게 될 것이다. 안타깝게 닐의 아버지가 바라던대로 의대에 진학했으나 더는 적성에도 맞지 않고 '학업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중도포기하고 나락으로 떨어진 뒤에 어른이 되었다면, 학창시절에 '하고 싶은 것'도 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후회와 분노만이 자리잡게 될 것이다. 반면에 닐이 학업에 충실하면서도 '하고팠던' 연극무대에 마음껏 올랐더라면 무사히 의사선생이 된 뒤에도 그때를 추억하며 행복했을 것이고, 반대로 나락으로 떨어진 삶으로 전락했을지라도 행복했던 추억 때문에 후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현재에 충실한 삶(카르페 디엠)'은 중요한 것이다. 아직 미성숙한 학생의 '선택'일지라도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되는 까닭이다.
그렇다면 닐을 죽음으로 내몰고 키팅선생을 사건의 주동자(?)로 떠넘겨 학교에서 쫓아내려는 교장과 닐의 아버지는 나쁘기만 할까? 닐이 불쌍하니 닐의 아빠는 나쁘고, 키팅 선생이 훌륭하니 교장의 낡은 신념은 폐기처분해야 마땅하냔 말이다. 우리는 이런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의 위험성을 명심해야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닐의 아빠도 웰튼고의 교장도 나쁘지 않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것이기 때문이다. '명문고-명문대-상류사회'라는 성공의 지름길을 설계하고 적극적으로 추진한 것이 그리 나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면 인간은 '욕망을 지향'하기 마련이고, '보장된 성공시스템'을 만들어 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기회'를 제공하고, 적극적인 '관리'를 하는 것은 우리가 사는 사회 전체로 보았을 때 아무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기회제공', '적극관리'를 전통이랍시고 모든 학생들에게 천편일률적으로 밀어붙인 점은 지적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런 시스템일망정 수많은 학생들을 '아이비리그'라는 명문대학에 비중있게 진학시킨 '검증된 방식'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정리하면, 많은 독자들이 키팅선생님을 존경어린 시선으로 추종함에 따라 '웰튼고'와 같은 맹목적인 교육시스템을 비난하기에 이른다. 허나 인간은 욕망덩어리이고 '웰튼고'가 많은 이들에게 성공을 보장하는 시스템으로 운영하고 있다면 '비난'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아무리 비판을 하고 시정을 요구한들 '키팅의 제자들'이 대성공을 거두어 사회의 지배구조를 싹 바꾸어놓지 않은 이상 욕망덩어리들을 배출하는 '웰튼고'와 같은 시스템은 꾸준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은 어느 한 쪽이 무한하게 나쁘다는 비난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얘기다. 적확한 비판의식을 키워 교육의 문제를 공론화하고 '웰튼의 장단점'과 '키팅의 장단점'이 서로 공정하게 경쟁하며 학생들의 본연에 맞게 각자의 꿈을 성장발전시켜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장을 형성하는 것이 관건인 셈이다.
우리의 교육시스템도 망가질대로 망가지고 말았다. 허구헌 날 '대입제도'만 바꿔온 터라 학생들은 '자신의 미래'를 걸고 한 판 도박을 걸게 만들었고, 이런 문제점을 바꿔보겠다고 '외국의 시스템'을 아무런 성찰없이 '우리의 현실'에 끼워맞추는 통에 정작 '우리 교육'은 설곳을 잃고 휘청거릴 뿐이었기 때문이다. 말로는 '백년대계'라면서 흔들리지 않는 교육정책을 추진하겠다고 곧잘 말한다. 허나 대한민국 입시정책은 해마다 바뀌었다. 윤석열의 '킬링문항 삭제' 지침은 희대의 촌극이었고 말이다. 변별력을 무색하게 만들면 학생들의 실력검증은 무엇으로 하란 말인가? 만일 '킬러문항'이 정말 문제였다면, '대입시험'을 없애고 무시험제도로 입학허가를 한 뒤에 대학자체적으로 무한경쟁을 시키는 방법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런 방법 또한 문제점이 많은 방식이지만 말이다.
한편, 우리에겐 여전히 '키팅 선생님' 같은 분들이 절실하다는 점이다. 우리 학생들이 마음껏 꿈을 펼칠 수 있도록 '교육의 장'을 마련하고 학생의 희망찬 미래를 '자신의 신념'으로 삼아 불철주야 교육에 매진하는, 그런 선생님들 말이다. 그리고 제발 그런 선생님들이 소신껏 교육을 펼칠 수 있도록 '갑질하는 학부모들'은 좀 꺼져줬으면 좋겠다. 선생을 존경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적어도 '조롱의 대상'으로 만들어서야 되겠느냔 말이다. 몰지각한 학부모들 밑에서 커온 어린 학생들이 선생을 우습게 만드는 현실이 너무나 비극적이어서 그렇다. 제발 우리 선생님들이 '검은 리본'을 거둘 수 있도록 관심을 모았으면 싶다. 그리고 우리 모두를 위해 꼭 멋진 선생님이 되시길 간곡히 바란다.
수학에도 시가 있습니까
-N.H.클라인바움, 『죽은 시인의 사회』 중에서
삶을 독특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독특하다는 것은 평소에 한 번도 볼 수 없거나 느낄 수 없는 커다란 사건입니다. 독특함으로부터 어떤 신선한 깨달음을 얻는다면 우리는 결코 독특함을 영원히 잊을 수 없습니다. 인생에서 N.H.클라인바움의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오는 존 키팅을 만나는 것은 아주 특별한 즐거움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선생님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릅니다. “카르페 디엠”을 거침없이 외치면서 예전에 없던 수업방식으로 학생들을 가르칩니다. 선생님 덕분에 “오늘을 즐겨라.”는 말이 너무나 유명해졌습니다.
학교 공부를 졸업한 지 20년이 넘었고 제 아들이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아들이 공부 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습니다. 학교에서 연례행사로 치르는 시험을 보기 위해 아들은 공부를 하느라 머리를 싸매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라고 쨍한 마음으로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시험 점수가 상위권이길 바랍니다. 점수는 아들의 미래를 결정하는 운명의 주사위 같습니다. 만약에 점수가 기대 이하로 나오면 저는 분명 어른답게(?) 잔소리를 하게 될 것입니다.
아들에게 오늘을 즐겨라, 고 한다면 아마도 공부가 아닌 딴 짓을 하게 되겠지요. 컴퓨터로 게임을 하거나 스마트폰으로 보고 싶은 영상을 볼 것입니다. 공부에 별다른 재미가 없는 아들이라 교과서가 아닌 컴퓨터나 스마트폰이 현재의 즐거움을 대신할 것입니다. 아들에게 입시는 지옥이요, 게임은 천국입니다. 오늘의 즐거움이 서로 달라 계속해서 불협화음이 멈추지 않는 모순에 빠지고 맙니다.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처음부터 모순을 만들지 않으면 됩니다. 결국 아들은 처음으로 돌아가 공부를 열심히 하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학교에서 배우는 대로 공부만 하면 오늘을 즐길 수 있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보통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가르치고 학생들은 가르치는 내용을 정신없이 노트에 적습니다. 내용이 중요하고 시험에 나올 것 같으면 별도로 표시하고 머릿속으로 꾸역꾸역 집어넣어야만 합니다. 이런 제도권 교육에서 학생은 시험밖에 모르게 됩니다. 그러니 학생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그리고 행동하는 자기 주도 학습은 공염불에 불과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모르는데 어떻게 현재를 즐길 수 있을까요? 섣불리 그랬다가는 학교에서 문제아라는 주홍글자를 달고 퇴학이라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독특하게 사는 게 중요합니다. 독특하게 살아야만 오늘을 즐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남들과 다른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독특하게 사는 충분조건이 되는 셈입니다. 존 키팅은 국어 선생님입니다. 그가 시를 가르치는 방식은 교과서에서 벗어나 새로운 상상을 불러일으킵니다. 시의 주제, 내용, 소재를 주입식으로 하는 수업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왜 시를 공부해야만 하며 어떻게 시를 감상해야만 하는가, 라는 질문을 하게 만듭니다. 시를 가슴으로 읽고 마음으로 느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유인즉, 시는 삶의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되돌아보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시가 있어야 합니다. 시는 한 사람의 고백이며 사랑입니다. 시는 고난의 바다를 헤쳐 갈 수 있는 아름다운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을 보고 있으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랑의 훼방꾼이 너무나 많습니다. 돈이 최고인 세상입니다. 장밋빛 미래를 위해 오늘을 외롭고 쓸쓸하게 보냅니다. 안타깝게도 자신의 인생을 헛되이 보내는 것조차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죽은 시인의 사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문제를 풀고 정답을 맞히는 시험을 보기 위해 시를 공부하는 것은 즐겁지 않습니다. 이런 식으로 공부를 하다보면 셰익스피어, 월트 휘트먼 같은 위대한 시인을 끔찍하게 싫어하게 됩니다. 결국에는 그들을 죽은 시인으로 만듭니다.
하지만 위대한 시인들의 감수성을 가지고 별빛을 바라볼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위대한 시인의 시 속에는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담는 영감이 깃들어 있습니다. 행복, 아름다움, 진리, 정의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위대한 시인은 영원히 죽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도 위대한 시인만큼은 아니더라도 자신의 생각을 담은 시를 쓰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살면서 부대끼는 고통 받는 마음의 감옥에서 벗어나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시는 이 세상을 보다 나은 것으로 만드는 마력을 지니고 있으니까요.
시를 읽거나 써보게 되면 시는 언어의 마술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언어는 기본적으로 자음과 모음으로 말을 만드는 공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는 문학의 특별한 장르이기 때문에 뭔가 특별한 공식이 있지 않을까 찾아보았지만 자음과 모음으로 이뤄진 말은 아주 일상적입니다. 다시 말하면 시는 어떠한 공식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인생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마음의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는 당신 속에 있는 또 다른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마음의 편지를 쓰는 방법에 있어 주목할 만한 사실이 있습니다. 키팅 선생님에 따르면 시는 언어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음악이나 영화, 사진은 물론 음식을 차리는 방법에도 시가 있다는 것입니다. 좀 더 다른 시선으로 보면 하늘에도 있고 나무에도 있고 웃음이나 눈물에도 시가 있습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는 모든 것에 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 농담 삼아 “수학에도 시가 있습니까?” 라는 질문 아닌 질문을 할 때 키팅 선생님이 어떤 대답을 할지 궁금해졌습니다. 수학은 시와 성격이 너무 다른 공부이다 보니 수학이 시라는 생각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너무나 당연해서 이제껏 수학이 시라는 생각을 해본 일이 없습니다.
하지만 키팅 선생님은 우리의 정답에서 벗어나 수학에도 시가 있다고 말합니다. 수학의 우아함 때문입니다. 수학의 우아함을 달리 수학의 아름다움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수학 문제를 풀었던 지긋지긋한 경험을 떠올리면 수학이 아름답다는 게 믿기지 않습니다. 그림이나 사진을 보면 저절로 아름답다는 말을 하는데 수학 앞에서는 망설이게 됩니다. 계산만 하는 수학을 보고 있으면 아무런 감동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수학의 우아함은 역설적으로 수학 문제를 눈으로 푸는 것은 아니라 마음으로 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를 풀어나가는 과정을 통해 이제까지 깨닫지 못한 아름다움을 보게 됩니다. 마음의 방정식은 숫자 너머의 진실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세상은 여전히 숫자로 사람을 계산합니다. 이 소설을 보더라도 자신의 아들을 “5달러 95센트”라고 부르는 아버지가 나옵니다. 시험점수가 하위권에서 벗어나지 못할 정도로 형편이 없는 아들의 몸값을 계산해보니 겨우 5달러 95센트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열심히 공부해서 자신의 몸값을 올려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듣고 보면 아들에게 공부할 용기를 일으키는 최고의 독설 같습니다.
이러한 괴민은 인생의 절반을 넘어서는 어른이 되어서도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서로 말은 하지 않아도 몸값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몸값이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합니다. 하지만 몸값을 높이려고 하는 것이 최고일까요? 독특한 것도 아니며, 아무런 우아함도 없는 몸값. 그러니 오늘을 독특하게 즐겨야 합니다. 삶을 몸값으로 계산하지 마세요. 시 한 편 쓰지 못하는 지옥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