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구약을 ‘하나님 말씀’으로 보지 않는다. 역사적 고찰을 통해 구약이 서로 다른 시대에 살았던 각기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쓴 책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뿐만 아니라, 내가 유신론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약은 수천 년 동안 타당성을 유지해온 여러 규범과 원리를 표현해놓은 대단한 책이다. 지금도 여전히 타당하며 장차 실현해야 할 일종의 비전을 선언한 책이다 ---p.13
우상의 본질은 특정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모든 사물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완전한 모습을 갖추기 때문에 저마다 이름을 가지고 있다. 우상숭배 개념에 익숙한 헤브라이인은 어느 이름 없는 역사의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름 없는 우상은 그 자체로 모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점을 알고 헤브라이인의 인식 수준에 맞게 양보한다. 하나님은 스스로 이름을 지은 뒤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대답하셨다. ‘나는 스스로 있는 나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스스로 계신 분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출애굽기 3장 14절)---p.37
“인간은 자신의 열망과 자질을 우상으로 변형시킨다. 인간이 무기력해질수록 우상은 더욱 강력해진다. 우상은 어떤 경험에서 인간 자신이 소외된 형태다. 인간이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제한된 일면인 지능, 체력, 권력, 명예 따위를 숭배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일면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자신을 그 일면으로 제한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인간으로서 자신의 전체성을 상실하고 성장을 멈춘다. 인간은 우상에게 복종하는 경우에만 자신의 피난처를 찾을 수 있기에 그 우상에 의지한다.” ---p.51
인간이 자신의 능력에서 소외된 상태를 표현한 것이 우상이고, 이런 능력과 접촉하는 방식이 우상에게 복종하며 집착하는 것이라면, 우상숭배는 필연적으로 자유, 자주와 양립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예언자들은 우상숭배를 자기학대와 자기비하로, 하나님 숭배를 자기해방과 타자로부터의 해방으로 거듭 규정짓는다.---p.54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킴으로써 인간을 해방시킬 수 있는가? 하나님은 역사 과정에 개입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인간은 외톨이가 되어 자기 자신의 역사를 만든다. 하나님은 돕지만 인간의 본성을 변화시킴으로써 돕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인간이 자기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줌으로써 돕는다. 어떤 신도 믿지 않는 내 어법으로 말하면 이렇다. 요컨대, 인간은 외톨이가 된다. 인간이 자신을 위해 혼자서 할 수 없는 것은 아무도 그를 대신해 처리해줄 수 없다.---p.106
모세의 죽음은 혁명이 가능한지를 다루는 문제에 대한 성서의 해법에 종지부를 찍는다. 혁명은 때맞춰 단계를 밟아가야만 성공할 수 있다. 저항은 고통에서 비롯되며,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는 것은 저항에서 비롯된다.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면(freedom from serfdom) 우상을 숭배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삶을 누릴 수 있는 자유(freedom to a new life)를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마음은 기적적으로 바뀌지 않으므로 각 세대는 오직 한 걸음만 내디딜 수 있다. 고통에 시달린 끝에 혁명에 착수한 사람들은, 자신의 과거 때문에 정해진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다. 노예제도 아래서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만 성공적으로 약속의 땅을 차지할 수 있다---p.131
만일 하나님이 그렇게 하기를 바랐다면,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의 마음을 변화시켜 그들이 ‘타락’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만일 하나님이 원했다면, 하나님은 파라오의 마음이 모질어지게 놔두는 대신에 그의 마음뿐 아니라 헤브라이인의 마음까지 변화시킬 수 있었다. 만일 그렇게 했더라면, 헤브라이인은 금으로 만든 송아지상을 숭배하지 않았을뿐더러 약속의 땅을 정복한 뒤 새로운 우상숭배에 빠져들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하나님의 권능이 모자랐던 것일까? 단 한 가지 이유는, 인간이 바라는 대로 자신의 길을 선택하고, 그 결과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p.133
예언자라는 개념은 메시아시대에 관한 개념과 마찬가지로 성서에서 언급하는 특유한 개념이다. 예언자는 진리의 계시자다. 노자와 부처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예언자는 정치 활동과 사회 정의에 관심이 많은 정치 지도자이기도 하다. 예언자는 정신적 영역뿐 아니라 이 세상 모든 분야에 관심을 둔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예언자는 항상 정치사회적 차원에서 영성을 체험한다. 하나님이 역사 안에서 계시하기 때문에, 예언자는 정치 지도자가 될 수밖에 없다. 인간이 정치 활동에서 노선을 잘못 선택하는 한, 예언자는 반대자이자 혁명가가 될 수밖에 없다.---p.135
성서에 담긴 철학의 관점에서 보면, 역사는 인간이 이성과 사랑을 발휘할 능력을 개발해 완전한 인간이 되어 원래 자기 모습을 되찾는 과정이다. 인간은 잃어버린 조화와 순수를 되찾지만, 그것은 새로운 조화이자 새로운 순수다. 그것은 한 인간이 자신을 완전히 인식하고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경지의 조화다. 인간은 마침내 망상과 무기력에서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된 것이다. 인간은 역사 과정에서 자신을 창조한다. 인간은 잠재된 자질을 개 발하여, 뱀(지혜와 저항의 상징)이 약속한 바와 가부장적이면서 다른 신의 숭배를 용서하지 않는 아담의 하나님이 원치 않은 경지에 이른다. 즉,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다.---p.140~141
에덴동산과 메시아시대 사이에는 변증법적 관계가 성립한다. 에덴동산은 다른 문화의 여러 전설에서 볼 수 있듯이 과거의 황금기에 해당한다. 메시아시대는 미래의 황금기다. 두 시대는 조화로운 상태라는 점에서 같다. 인간이 아직 태어나지 않음으로써 최초의 조화로운 상태가 존재하는 반면, 인간이 완전한 인간으로 거듭남으로써 새로이 조화로운 상태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두 시대는 다르다. 메시아시대는 인간이 순수를 상실한 뒤 애써 추구하는 목표이므로 순수로 복귀하는 것일 뿐이다.---p.141
성서 구절은 삶과 죽음을 생물학적 사실로서가 아니라 원리와 가치로 언급한다. 살아 있다는 것은 성장하고, 발전하고, 반응하는 것이다. 죽는다는 것은 성장을 멈추고, 고착되고, 어떤 사물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사람은 삶의 가치와 죽음의 가치 중에서 하나를 분명히 선택하는 상황에 직면하지 않으므로, 어느 한에 속하지 못한 채 몸은 살아 있으나 정신은 죽어버린 ‘무기력한 인간’이 된다. 삶을 선택한다는 것은 사랑과 자유와 진리의 필요조건이다. 또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한 조건이다. 《시편》 작가는 그 점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죽은 사람은 주님을 찬양하지 못한다.”(시편 115편 17절)---p.203
안식일은 인간과 자연의 조화 상태를 상징한다. 일을 하지 않음으로써, 다시 말해서 자연 작용과 사회 변화에 관여하지 않음으로써 인간은 일주일에 단 하루라도 시간의 속박에서 벗어난다.---p.218
전통적 안식일의 개념에서 ‘휴식’은 일을 하지 않거나 어떤 활동을 하지 않는 ‘쉼’과 전혀 다르다(이는 예언자 전승에서 평화[샬롬]가 단지 전쟁이 없는 상태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과 같다. 그 말은 조화, 곧 일체성을 나타낸다).안식일이 되면 인간은 생존 투쟁과 생물학적 생명 유지를 주요 활동으로 삼는 동물의 생활방식에서 완전히 벗어난다. 안식일이 되면 인간은 완전한 인간이 된다. 그것 말고 다른 임무는 없다. 유대교 전승에서 최상의 가치는 노동이 아니라 휴식이다. 휴식은 오로지 완전한 인간이 된다는 목적만 추구하는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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