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일수록 그 글을 읽기 전의 독자와 다 읽고 난 독자가 다른 마음 상태이듯, 어떤 글을 이제 막 쓰기 시작한 사람과 다 쓰고 난 사람은, 서로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글을 써보면, 막상 쓰지 않았으면 하지 않았을 생각까지 하게 되면서 작가 스스로 변한다. 쓰는 중에 바뀌고, 쓰다 보니까 변하고, 쓰고 나니까 달라진다. 가장 신나는 글쓰기는 좋은 아이디어 같아 써보니까, 더 좋은 문장이 생각나서, 처음 생각보다 더 나은 상태로 뻗어 나갈 때다. 반대로 써보니까 생각만큼 좋지 않아서 버려야 할 때도 있다. 그때는 버리는 게 스스로의 한계로부터 가장 빠르게 벗어나는 길이다. 그러므로 써보기 전까지는 나도 내가 무얼 쓸지 모른다는 자세가 중요하다. 자기 자신조차 자신이 완성할 글을 모른다는 자세를 유지할 때, 비로소 스스로를 벗어나고 넘어서는 글이 나타난다.
--- p.31
지금보다 더 나은 생각문장이 있다는 건, 지금 인지하고 있는 세상보다 더 나은 세상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혹은,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지금 하는 생각문장이 더 나아져야 한다는 뜻이다.
--- p.61
보다 빼어난 관찰, 이해, 생각, 대화, 상상, 표현 등으로 문장을 이어가야 한다. 그래야만 독자의 집중과 흥미를 유발할 수 있다. 자율적 지향성을 갖고 있는 인간은 뇌를 활성화시키는 대상을 본능적으로 좇는다. 첫 생각문장을 떠올리고, 그로 인해 촉발된 그다음 생각문장을 이어가는 과정은, 지향성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능이다.
--- p.158
지금 여기를 떠난 생각은 일종의 망상이다. 마음은 지금 여기의 몸과 함께 상응해야 한다. 몸과 마음이 지금 여기에서 서로 상응하면서 움직여야 지금 여기에서의 시간을 만끽할 수 있다. 모든 명상가들이 주장하듯, 지금 여기에 충실하는 것만이 자기 삶을 가장 충실하게 살아가는 방법이자 자기 운명을 사랑할 줄 아는 자세다. 결국 몸의 동선에 따라 마음의 동선을 그려내는 기술 역시 인간답게 살려면 누구나 해야 하는 작업이자 행하는 만큼 유익한 작업이다.자연스러우면서도 새로워야 하는 문장 잇기의 기술 역시 마찬가지다. 개인의 변화든 사회의 변화든, 변화는 언제나 자연스럽게 이어져야 한다. 하지만 진부하거나 통속적으로 이어지면 곤란하다. 언제나 새롭게 이어져야 한다. 자연스러우면서도 새롭게 하루하루를 이어가는 것만큼 축복된 삶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살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가장 기초적인 동작 단위인 생각문장 하나하나가 먼저 자연스러우면서도 새롭게 이어져야 한다.
--- p.197~198
단락을 만들기 위해서는 화자가 특정한 대상에 주목하고 특정한 대상에 깊이 있게 들어가야 한다. (……) 더 + 더더 + 더더더 구체적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은 어떤 대상에 대해 더, 더더, 더더더, 깊이 있게 들어간다는 것이고, 이해한다는 것이고, 참여한다는 것이고, 섞인다는 것이다. 즉, 그만큼 사랑한다는 것이다.
--- p.198
우리는 어떤 경험을 겪는다. 그리고 그것을 질료로 삼아 자기 방식대로 표현하는, 즉 창작하는 새로운 경험을 일으킨다. 경험을 한 것과 그러한 경험을 표현하는 경험은 서로 다른 것이어서 표현만 잘해도, 기분 좋지 않던 경험이 기분 좋은 경험으로 변할 수 있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가 하는 경험과 그 경험에 대한 생각, 그리고 그 생각을 표현하는 과정 자체가 모두 독립된 하나의 경험치다. 우리는 어떤 경험을 하면, 그 경험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그 생각을 표현한다.
--- p.208~209
좋은 작가가 된다는 것, 혹은 좋은 독자가 된다는 행위야말로, 보다 진실한 주인공 되기의 체험을 통해 보다 풍요로운 생각문장을 채취하는 작업이다. 사랑에 대한 많은 설명이 있지만, 결국 글쓰기를 공부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사랑이란 “보다 깊이 체험하는 ‘주인공-되기’를 통해 보다 풍요로운 생각문장을 창작하는 일”이다.
--- p.334
플롯은 이러한 시간의 다층적 측면을 표현한다. 플롯은 어휘의 선택과 결합 사이에서, 문장의 선택과 결합 사이에서, 단락의 선택과 결합 사이에서, 단락장의 선택과 결합 사이에서 만들어지면서 시간을 재배치한다. 플롯이란 결국 모든 시간들을 재배치하여, ‘현재’라는 ‘표면 시간’을 더없이 충일하게 만드는 적극적 실존, 적극적 현존의 결과물이다. 특히 소설 쓰기에서 좋은 플롯이란, 주인공의 현재를 충일하게 만들고 그려내는 기술이다. 작가는 지금 여기를 충일하게 드러낼 수 있는 모든 변화의 시간층을 뒤섞어 주인공의 현재가, 즉 자신이 쓰고 있는 이야기가 시간 너머의 모습으로까지 확장되기를 바란다. 언제 어디서나 일어날 법한 이야기로 읽히게 만듦으로써, 알레고리가 되고 상징이 되기를, 이야기의 원형이 되어 ‘영원한 현재’로 읽히기를 꿈꾼다. 언제 어디서나 일어날 법한 영원한 현재로서의 이야기 원형 만들기는 서사적 글쓰기가 꿈꾸는 궁극적 모습이다.
--- p.429
무엇보다 인간은 이야기를 통해 ‘스토리-라인’을 겪는다. ‘스토리-라인’은 인간이 사건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면 겪는 운명선인 동시에 탈주선이다. 그러나 사건을 겪는다고 문제가 발생하는 건 아니다. 아무리 큰 사건도, 그것을 문제로 여기고 마주하는 주인공이 없으면 ‘스토리-라인’은 발생하지 않는다. 사건 속에서 사건 이상의 문제를 발견해야 한다.
--- p.453~454
이렇게 과거, 현재, 미래가 한데 뒤섞인다. ‘지금 여기’에서 들끓는다. 이야기의 결말까지 누가 진짜 조력자이고 누가 진짜 방해자인지 알 수 없다. 어떤 사건이 어떤 사건으로 연결될지 전혀 알 수가 없다. (……) 마지막에 가서야 비로소 처음을 알 수가 있다. 과거가 현재처럼 재현되고, 현재 사건은 또 다른 미래 사건과 맞물려 새로운 의미로 재현될지 모른다. 더는 과거 현재 미래의 직선적 시간관은 무의미하다. 과거는 다시 태어나려 하고 미래는 이미 도래해 있는 것이다.
--- p.4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