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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림지구 벙커X (큰글자도서)

부림지구 벙커X (큰글자도서)

강영숙 | 창비 | 2020년 07월 20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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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07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300쪽 | 182*260*20mm
ISBN13 9788936438241
ISBN10 8936438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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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카레를 먹었다. 카레는 지진이 나기 전에 먹은 마지막 음식이었다. 연구원이 평소에 어떤 음식을 좋아하느냐고 물었을 때 즉각 카레를 떠올렸다. 그냥 언뜻 생각 난 것이기도 했지만 카레의 짙은 노란색과 입안에 퍼지는 따뜻한 감촉이 좋았다. 길 쪽으로 난 창으로 카레 냄새가 퍼져나갔다. 하지만 곧 카레 냄새는 카바이드 냄새나 목욕탕 수증기 냄새 비슷한 악취에 섞여 이상하게 변했다. 계속 증기를 쐬는 것 같은 느낌이 지속됐다.
“나한테 나는 냄샌가?”
--- pp.39~40

“지진을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요?”
연구원이 물었다. 평소에 하던 어떤 놀이 경험을 떠올려보라고도 했다.
“놀이 경험요? 지진은 그냥 다 무너지는 거예요. 겪어놓고도 그렇게 말해요? 놀이에 비유하는 건 말이 안 되는데.”
우리는 머리를 감싼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 pp.41~42

“유진씨, 부림지구의 대표적인 문화나 정서 같은 거, 생각나는 거 있어요?”
그 말을 듣고 나는 깔깔 웃었다.
“문화라, 그런 건 잘 모르겠고 여긴 그냥 철이 많아요. 철요.”
“아, 철요. 그건 그렇죠. 제철단지니까. 그런데 왜 웃으세요?”
“몰라요, 그냥 웃겨요. 문화라는 말이 웃겨요.”
연구원도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 pp.43~44

낮에 대장이 준 시신의 몸에서 나온 휴대폰이 윈드점퍼 주머니에서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무심코 전원 버튼을 눌렀다. 화면이 켜지는 게 신기했다. 다른 사람의 몸을 더듬기라도 하는 것처럼 긴장됐다. 눈을 부릅뜨고 죽은 남자와 비슷한 얼굴을 찾았다.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의, 살았을 때의 얼굴이 터무니없이 밝게 재생됐다. 너무 놀라 감정이 격해지려고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울고 싶지는 않았다. 급하게 휴대폰 전원을 끈 뒤 눈앞의 어둠속으로 던져버렸다.
--- pp.97~98

“얘기는 여기까지예요. 여러분, 아까 말한 무릎길이의 치마 입은 제 친구 보신 분 있나요? 혹시 그애에 관한 나쁜 소식을 알고 계시다면 말하지 마세요. 너무 보고 싶어서 죽을 것 같아요. 제가 그애를 따라가지 않은 건 그애가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인데. 아, 저는 부림타운 무도장 직원 장미라입니다. 모두 행복하세요. 제 얘기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 p.169

그러고 나서 엄마가 아프기 시작했다. 엄마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쇠약해졌고 손도 쓸 수 없이 빠르게 죽음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내게는 이미 그것이 재난이었고 내 삶은 그게 다였다.
아버지의 유품이라고는 늘 입던 작업복 몇벌과 그때부터 막 쓰기 시작한 돋보기, 작업복 윗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푸른 줄이 그려진 수첩 몇개가 다였다. 수첩에는 고향, 노래, 희망, 또 고향 따위의 평범한 글자들이 적혀 있었다. 죽음을 말해줄 어떤 단서도 들어 있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때보다는 다소 희고, 가만히 있는데도 몸에서 마른 갈대숲 같은 곳에서 나는 소리가 났다.
“왜 그랬는지 말해줄 수 있어요?”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순간 제철소 안쪽에서 뭔가 무너져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너도 많이 늙었네.”
아버지가 말했다.
--- pp.262~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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