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디모데에게 성경을 읽는 것에 전념하라고 권고한다.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 여기서 “읽는 것”은 공중 낭독(public reading)으로 바울이 디모데에게 요청한 주된 책무 중의 하나이다. 초대교회에서 성경을 공적 낭독한 것은 유대교의 관행에서 비롯된 것으로 주후 일세기 유대주의에 독특한 것이었다. 이는 랍비 시대 이전의 것으로 유대인의 오래된 관습으로 알려졌다.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회당에서 구약성경 토라와 선지서가 낭독되었고, 이와 같은 관행은 누가--- p.행전에서도 언급되었다. 이런 회당 예배를 이어받은 초대교회는 초기부터 개인 혹 공동으로 성경을 낭독하고 토론하는 활동이 활발하였다.
--- p.16
1세기, 내레이터 성대(聲帶)의 떨림을 통해 성서 이야기를 전달하던 구전문화는 15세기 이후부터 지속된 활자문화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내레이터가 낭송하고 모든 회중이 함께 듣는 구화/청각 퍼포먼스를 통해 전달된 성서 이야기는 우리가 현재 눈으로 읽는 성경 이야기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글을 깨지 못한 문맹(文盲)의 민중들에게 성서 이야기는 ‘그람마’(문자)가 아닌 내레이터의 목소리를 타고 그들의 귀에 들려진 한 편의 생생한 이야기요, 그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 사건이 된다. 적어도 성서 속 인물들이 활동하던 시대는 구전문화가 편만한 시대다. 그러한 문화 속에서 성서 이야기는 구화로 유포되어나가고, 그와 더불어 교회와 복음의 지경은 점점 더 확장되어간다. 1세기 구전문화에서 성서 이야기는 활자화한 문서를 읽는 것이 아닌, 내레이터가 전하는 성서 이야기를 들음으로써 그리고 내레이터의 신체 언어(body language)를 통해 전달됨으로써 회중들의 얼(정신)과 영(靈)에 공명되는 사건, 즉 구원사건이 된다.
--- p.60∼61
요한계시록은 새창조와 새에덴 모티브로 마무리 된다. 곧 21:1--- p.5에서는 새하늘과 새 땅에 대한 주제를 소개하고 있으며 5:9--- p.10에서는 에덴 회복의 성취를, 22:1--- p.5에서는 에덴 회복의 절정으로서 에덴 모티브를 제시한다. 이러한 내용은 성경 읽기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곧 그것은 바로 성경 읽기를 창조에서 창조 회복의 완성을 의미하는 새창조의 통전적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신약 성경 중에 요한계시록에서만 등장하는 하나님의 이름으로서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마지막’ 그리고 ‘시작과 끝’이라는 이름에 의해서 창조와 완성에 이르는 통전적 관점을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강화된다.
--- p.95
지난 200년간 기독교 선교는 무속세계나 무속과 혼합된 세계 종교권에서 사역해 왔다. 19세기의 선교는 종교 간의 대화를 통한 타종교권의 복음증거를 거부하고 서구문화로 채색된 기독교를 수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어왔다. 종교와의 대화가 시작된 것은 20세기 중엽에 이르러서 바티칸 2공의회 이후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에서는 WCC를 중심으로 다원주의와 종교 간의 대화가 진행되고 있지만, 복음증거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선교라고 보기에는 전략적 초점이 희미하다. 복음주의 기독교는 이제 세계의 주요 종교와 선교적인 대화를 시도해야 한다. 상호이해에 기초한 대화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한 첫 관문이다. 타종교에 대한 이해와 대화가 없이 21세기의 남은선교과업을 감당할 수 없다. 특별히 급성장하는 이슬람에 대한 복음증거의 새로운 방법들이 모색되어야 한다.
--- p.121∼122
우리는 새로 믿음을 갖게 된 사람들이 더 깊이 배울 수 있도록 돕는 방도를 생각해 내야한다. 65개의 성경이야기는 아무리 잘 전해진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성경의 일부일 뿐이다. 성경 전체에 대해 알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게 하기 위해서는 제자화 과정에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마음이 더 깊어져야 한다. 구전 문화권 나라들에서 성경 전체가 녹음된 라디오는 사람들로 하여금 일부만이 아닌 성경 전체와 접할 수 있는 놀라운 기회를 제공한다.
--- p.211
성경의 공적인 낭송은 예배의 필수적이지만, 많은 교회는 형식적인 성경 낭송을 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이것은 종종 성경에 대한 “고등 견해”를 가지고 있지만 공적 낭송에 있어서 “저등 실행”을 하고 있는 복음주의교회의 현실이다. 이 논문은 역사, 신학, 수사학의 논증을 통해서 “왜 공적낭송에 헌신해야 하는지” 논할 것이다. 공적 낭송은 성경의 명령이며, 말씀이 우리를 변화시킨다는 점을 상기시키며,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은 낭송에 헌신했으며, 성경이 크게 읽혀지도록 의도된 책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크게 읽고 그 말씀이 구현되는 것은 조용한 읽기와 다른 경험을 제공한다.
--- p.238
오늘날 교회안팎에서 신학무용론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거세지고 있다. 이는 대단히 위험한 생각이다. 왜냐하면 성경 그 자체가 성령의 영감에 의해 기록된 신학적인 말씀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성경신학(Biblical Theology)의 관점에서 보면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창조, 타락, 구속, 완성 등을 아우르는 역사적 특징이 있다. 또한 주제별 교리의 진리를 가르쳐주는 조직신학적 특징도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 독자들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령의 조명에 의지하며 역사적인 성경신학과 주제별 교리를 가르쳐주는 조직신학이 상호모순이나 파열음이 없이 독자들 마음 속에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 p.260
어떤 설교는 가르치며, 어떤 설교는 설득하고 또 어떤 설교는 진리를 매일의 삶에 적용한다. 보다 명확하게 말하자면, 모든 설교는 정도의 차이를 가지고 이 세 가지의 기능을 한다. 설교의 세 가지 기능은 잘 닦여진 길과 같이 일반적인 복음주의 설교학 교과서에 등장한다. 개인적으로 이 목적들에 동의하면서도, 나는 이 교과서들이 한가지의 목적을 간과하고 있다고 본다?바로 기억하게 하는 것이다. 신자들에게 그들이 알고 믿는 것을 “단지” 기억나게 하는 것을 통해서도 잠자고 있는 지식은 깨어나고 잠결에 돌아다니는 확신은 일으켜질 것이며, 게으른 의지는 고무 될 것이다.
--- p.321
예수님은 말씀으로 오셨다. 예수님은 말씀의 본체이시다. 말씀이신 예수님이 육신이 되셨다. 예수님은 살아 계신 말씀이시다. 예수님이 가신 곳에 말씀이 함께 했다. 예수님이 입을 열면 말씀이 흘러 나왔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말씀이시기 때문이다. 성경은 성령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묵상할 때 성령님께서 함께 하신다. 성령님께서 계시의 영으로 임하셔서 말씀을 깨닫게 해주신다. 거룩한 독서를 위해 우리는 지성을 사용해야 한다. 하지만 거룩한 독서는 마음으로 읽는 독서이며, 영으로 읽는 독서이다.
--- p.351
모든 크리스천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구별된 자들이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구별되어 지음을 받은 존재임을 창세기에서 분명히 밝혀 주고 있다. 그러나 자기중심성이 잘못 발동이 되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터 세상의 백성으로 타락했다. 하나님은 인간의 원래의 지위를 회복시켜야만 하셨고, 성경은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가를 보여 주고 있다. 창세기 3장 15절을 통해 그 약속을 하시고 아브라함을 통해 그 준비를 하신 후 모세를 통한 시내산 언약에서 그 지위의 회복을 이루신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위치를 다시 회복한 인간은 그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세속과 구별되는 존재가 되어야 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구별의 기준을 “십계명”의 영성을 통해서 주시고, 그것을 ‘지켜 행하는 삶’을 살 것을 명시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시는 이유이다. 그러나 구약 백성은 그 구별되는 삶을 살기를 실패하고 성도로서의 지위를 다시 상실한다. 신약은 그렇게 꿈꾸셨던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지위 회복을 예수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완성하시고 선포한다. 그러나 여전히 성도의 자격유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함에 있는 것이다. 성경은 그 자격 유지의 요건에 대한 정보(Basic Information)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성경을 읽어야 하고, 자격 유지의 조건을 파악하기 위해 성경을 통전적 이해의 바탕위에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 p.417∼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