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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폐에 대하여

퇴폐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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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3년 07월 21일
쪽수, 무게, 크기 257쪽 | 384g | 130*202*20mm
ISBN13 9788974183141
ISBN10 8974183145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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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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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와 왜 ‘퇴폐’인가. 어쩌자고 케케묵은 서랍 안에서 새삼 그 단어를 꺼내려드는 것인가. 늘 그랬듯, 단어 그 자체야 무슨 죄가 있겠는가마는 사람들은 부정적인 이미지 앞에서 유독 야박하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줄곧 그런 중이다. 따지고 보면 그게 다 편견이요, 그걸 굳이 풀지 않으려는 고집의 소산이겠으나 별로 정갈하지도 않은 위인들이 야단이나 법석은 도맡아 부리는 게 사람 사는 이치이니 외면도 홀대도 그 자체가 사연들일 터였다.
시시비비의 논조 같으나 이제라도 그걸 다시 헤아리자는 얘기가 문제될 건 또 뭐겠는가. 논의의 어설픈 중단이 핑계랄까, 지독한 선입견을 털어내지 않으려는 인습의 화석이 까탈일까 한번 어긋난 생각일랑 좀체 바로잡으려 들지 않는 우리네 정서는 아직도 난공불락의 나바론 요새다. 그러거나 말거나 퇴폐를 바라보는 일상은 왕년의 ‘이발소’와 동격이며 여전히 끈적거리거나 던적스런 형용사다.
시작하는 김에 기왕지사 버리지 못하는 생각의 내용들을 그려보자. 퇴폐라는 표현을 듣거나 그 단어를 보면 당장 떠올리는 익숙한 상념 밑바닥엔 뭐가 뒹구는지.

1. 흐느적거리는 남녀가 뒤엉켜 있거나 고혹蠱惑적인 눈빛을 주고받는 현장과 그 공간의 분위기.
2. 조금 전까지 뭘 하고 있었는지, 잠시 후 뭘 할는지는 그(녀)들의 사연이니 물을 일은 도저히 아니겠으나 분명한 건 적어도 ‘둘’이 금세 떨어질 사이는 아니란 점.
3. 반드시 홍등紅燈은 아니어도 색으로 치자면 정육점 조명으로 딱 어울리는 낮은 조도照度의 진분홍이나 연보랏빛 조건.
4. 매력이 넘치다 못해 마력의 기운이 부딪치는 건 대부분 육체의 교접交接에 관한 참을 수 없는 본능의 폭발과 직결된다는 것.
5. 시간은 거기서 얼어버리고 공간은 아울러 아득키만 하여 ‘순간에서 영원’으로 업그레이드하고픈 욕망만 삶의 마지막 바람인 양 극대화함.
6. ‘술’과 ‘담배’는 기본이며 감각의 극한을 시험하고픈 또 다른 욕구는 ‘마약’과 ‘섹스’ 혹은 ‘록Rock’보다 더한 자극의 원천을 갈구하게 만듦.
7. ‘마비痲痺’는 부수적이고 ‘절망’은 필수적이며 ‘파멸’의 그림자는 운명처럼 다가옴.
8. 연기인지 환상인지 모를 아련함이 사랑과 마주할라치면 그 순간 ‘애련哀戀’이 되고 이루지 못할 관계의 연장은 어느덧 비현실의 장벽을 넘어 흔하디흔한 불륜보다 독한 ‘사련邪戀’의 파노라마를 양산한다는 타인들의 전설.
9. 여기서 ‘성실’과 ‘도덕’은 무의미하며 ‘이타利他’와 ‘준법’은 불가능한 신화일 뿐, 이 왕국에서 난무하는 종교적 철칙의 끝에는 감각적 진지함만 남는다는 믿음.
10. 그들을 이끄는 궁극의 힘은 기성의 세계를 비웃고 비틀며 자신보다 비루한 존재로 격하·폄훼貶毁하려는 ‘꼬여버린’ 심사에서 확대 재생산된다는 사실.

어찌 이것만으로 퇴폐의 모든 걸 압축 묘사하겠는가마는 그건 물리적 힘이나 그 오묘한 작동에 의해 빚어지는 당장의 에너지 이동이나 질량의 변화 같은 ‘과학’을 전제하지 않는다. 그것은 ‘현상’이자 ‘조건’일 뿐, 영원히 지탱할 삶의 원형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생각의 외피는 물론 콘텐츠의 코어마저 바꿀 생각일랑 전혀 하지 않는 데에는 대단한 모럴리티의 이중성이 끼어든다.
참거나 더욱 강하게 이겨내 뭔가를 만들거나 이룩하려들지 않고 단지 방임하며 널 부러진 상태로 현재에 파묻혀 버리는 모습을 놓고 퇴폐의 네거티비티negativity를 확장하는 일은 곧 자신과 그 현상이 아무 관계없다고 보는 철저한 단절의 자세를 뜻하기 때문이다. 도덕이란 개념이 도무지 자기완결성을 드러내거나 누구에게든 결정론적 무오류의 세계를 선물처럼 부여하는 게 아님을 잘 알면서도 대부분의 인간들이 이 같은 단호한 규정방식과 위장된 절대선善의 자기자리를 선뜻 내주지 않는 까닭은 뭘까.
누구든 밖으로부터의 위협을 피하고픈 원초적 욕구와 함께 상처받지 않으려는 단순한 욕망의 화학반응이 인간을 그리 만들어놨다고 변명할는지 모른다. 하지만 핑계치고 그건 너무 허망할 뿐 아니라 추상적이며 도피의 틈새가 넓디넓기만 하다. 하여, 빈틈사이로 모두 다 도망가 버려 혐의자의 색출은 기대조차 어렵다. 되레 다른 까닭이 있었으리라. 퇴폐란 이름의 서랍 안에 가슴 뜨끔하도록 찔리는 제 자신의 과오가 들어 있기에 어떻게든 가리고 덧대며 오만가지 이유로 알리바이를 완성하려 들던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건 자기 이야기였다. 그리고 모두의 스토리이다. 도망갈 곳도 사실 어디 더 없으며 비비고 뒹굴 데도 따지자면 협소하기 이를 데 없는 핑계의 무덤 안, 게다가 남루하지만 고스란히 들어 누어야 할 바닥 이름이 곧 ‘퇴폐’다. 하지만 ‘비판’이 ‘비난’이 되고 ‘질문’이 ‘공격’으로 호도되는 세상 사정은 살벌하다. 그 세상에서 개념과 의미 하나에 쉽게 매몰되거나 하염없이 휩쓸리는 중심의 빈곤이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얼마든지 숨어서 홀로 즐길망정, 자신은 그(녀)와 아무 관계없는 듯 고고히 군림하려는 자세도 지극히 일상적이다. 자기보다 못하다싶은 대상이 나타나면 비웃고, 만만한 상대라면 폄하?왜곡하여 자신이 안주할 마음의 빈터를 한껏 늘리려 드는 이치야 인간의 사회적 본능일 터다. 흔히 왕따의 정치심리란 것도 ‘말 타면 종 부리고 싶고’ ‘밟으면 짓이기고 싶은’ 억압의 ‘못된’ 승수효과를 잘 반영한다. 퇴폐란 단어를 앞에 놓고 보아도 동일한 심사는 거울처럼 되비친다.
그러나 찬찬히 들여다보자. 과연 그 단어가 지칭하는 상태 혹은 현상이 그리도 못되고, 모두가 토악질해대며 마구 때려야 할 필요충분조건을 오롯이 떠안는 것인지 말이다. 다시 묻자. 왜 그랬을까. 아니, 왜들 그러고 있을까. 하지만 그 도저到底한 까닭이나 흔쾌한 답변을 구하고자 하는 게 책의 우선 목적은 아니다. 그보다는 그 의미와 성격을 먼저 헤아리고 이를 둘러싼 기왕의 편견을 서서히 풀어 나감으로써 궁극에는 훨씬 자유롭고 개방적인 이해가 가능하도록 애써 보려 한다.

‘퇴폐’는 ‘퇴폐하다’라는 ‘동사’에서 파생한 ‘명사’의 원형原形이다. 그러다 ‘퇴폐적’이란 형용사를 통(상)용하는 동안 앞서 말한 온갖 편견과 부정적인 인식의 틀은 고착화되고 그처럼 마련된 생각의 얼개는 고스란히 얼어버린다. 보기에 따라선 동사의 생성과정과 관계없이 흔히 형용사로만 쓰이다 명사화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단정적으로 표현하면, 눅눅한 이미지를 담은 형용사에서 명사가 되자마자 죽도록 고생한 단어가 ‘퇴폐’다.
하지만 엄밀히 살펴보면 ‘퇴폐’는 두 개의 동사[(頹)+(廢)]가 교묘하게 얽히고설켜 작동하는 통합 품사다. 둘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자 그 되비친 그림자다. 둘 가운데 하나로만 있어도 뜻의 태반太半이 살아있고 보면 구태여 두 어휘를 붙여 사용하지 않는다 해도 그리 큰 문제는 없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어휘의 사전적 정의를 겹쳐보아도 의미의 공약수는 적잖이 같은 색조를 띄며 얼핏 서로의 변별력辨別力을 도드라지게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법 오래도록 두 단어가 붙은 채 인구에 회자된 건 그래야 할 까닭이 있었던 걸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다르지만 비슷하고 흡사하지만 구분되는 의미의 기묘한 중첩지대에 ‘퇴’와 ‘폐’는 서로의 발을 적당히 걸친다. 하지만 어휘의 ‘다름’은 단순히 이미지 편차나 순간적 느낌의 차이를 반영하기 위한 목적으로만 받아들일 수 없다. 표기의 차이는 각기 다른 의미론적 근거와 통용의 역사성을 지니며 일정기간 ‘그렇게’ 사용?이해했던 까닭을 켜켜로 쌓게 마련이다. 퇴폐가 배격의 대상이었던 때도 있지만 유행과 모방의 오브제로 아련한 매력을 풍기던 시절도 얼마든지 증언하는 역사라면 생각의 원형이란 사실 어느 경우도 무리일 것이다.
누군가 책의 궁극적 목적을 다시 밝히라 채근採根한다면 당장의 답은 두 단어의 겹침이 주는 색조의 추출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두 단어의 컬러를 각기 셀로판cellophane지에 묻혀 허공에 대고 겹칠 때 우러나는 색이 뭔지를 밝혀내는 일말이다. 우선은 단어의 의미론으로 보자. 두 단어의 뜻을 기존의 국내 사전들이 정의하는 바에 따르자면 매우 폭넓은 의미의 지평이 펼쳐진다. 그것들 가운데 겹치는 부분을 추려내자면, 퇴폐는 ‘쇠퇴’와 ‘무너짐’ 그리고 ‘부서짐’과 ‘사라짐’의 의미군을 공유한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 것은 퇴폐란 어휘가 갖는 시제時制의 결과론적 국면이다. 즉, 각기의 규정 방식에 깃든 주관적 가치판단이나 그것이 딛고서는 은연중의 보수성conservative과 관계없이 ‘둘’은 일련의 현상들이 ‘진행 중’에 있다가 어느 순간에 이르면 그 기운이 무르익고 커져 어느덧 ‘파괴’와 ‘소멸’을 전제하는 상태, 즉 지극히 수동적인 조건을 뜻한다. 이 같은 시제의 결과론적 국면은 무엇보다 ‘무너짐’과 ‘부서짐’이라는 두 현상이 다다르게 될 과정의 절박함도 함께 부각시킨다.
그러니까 뭔가 무너져 내리면서 부서짐의 현상이 잇따를 것이며 반대로 부서져 내리다 보면 무너짐도 동시에 재촉할 현상의 상호 연계連繫를 먼저 생각할 일이다. 그것들은 결코 우연이 아니며 그래야 할, 아니 그럴 수밖에 없는 서로의 까닭을 분명히 갖는다는 데 유념할 일이다. 생각해 보자. 대관절 그냥 무너지거나 괜히 부셔진다는 게 가능하겠는지를. 하지만 퇴폐를 접하는 사람들의 자세는 그다지 온화할 리 없다. 설령 자신의 현재 행동이 ‘퇴폐적’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흔쾌히 인정할 사람들은 별로 없다.
무너져 내려야 할 절박할 이유나 이제 당장 부셔지지 않으면 안 될 애타는 사연들이 넘쳐나도 안타까움의 부피는 결코 객관화시킬 수 없다. 비극이라면 그게 비극일 터다. 나의 애절함이 남의 그것만 못하다 해도 그걸 쉬이 인정해야겠건만 다른 사람의 타는 속이 나의 그것만 늘 못한 이치도 퇴폐의 상대성을 고려할 때 넘지 못할 함정이 된다. 누가 뭐래도 퇴폐는 그처럼 애절하고 답답하며 나아가 존재의 절멸마저 감수해야 할 만큼 ‘처참함’ 혹은 ‘극진함’으로 넘쳐나는, 한계 값이 익을 대로 익어버린 결과라는 데 주목하자.
그러니까 파괴는 균열과 파열의 결과물이라는 것. 기쁨이 ‘다’하였기에 슬픔이 오는 게 아니라 각기의 정념 속에 다른 것들은 늘 준비되고 있다는 것. 그걸 고상하게 모순과 변증법으로까지 엮어 설명의 외연外延을 잡아 늘릴 길 또한 없는 건 아니겠으나 ‘퇴폐’는 ‘퇴폐하다’의 숙성물이며 ‘궤멸潰滅’과 ‘소진消盡’에 미처 다다르지 못한 어느 일정 지점에 겪는 가변적 상황을 전제한다. 여기서 ‘가변적’이라 함은 장차 그보다 나아지든지 아니면 훨씬 못한 상태를 예비한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진보하다’와 ‘발전하다’의 의미체계와 같이 ‘퇴폐하다’의 그것 역시 익숙지 않으나 인정해야 할 ‘동사動詞’의 품사 기능을 수행한다. 애잔하지만 무너져 내리는 심사와 부서지는 포말泡沫의 한갓됨처럼 그것들이 순간이나마 모든 걸 대변해야 할 전체의 정서로 등극해야 할 때, 퇴폐는 과정적 진정성과 절차적 극진함을 시간 속 어느 한 지점에서 이슬처럼 빛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부서짐’과 ‘무너짐’의 주체가 나무토막이나 플라스틱도 아닌, 아니 강고한 콘크리트나 오십 층짜리 유리빌딩도 아닌, 하필 ‘사람’이란 점에서 이야긴 더 간절해진다. 그것도 목숨 다하여 죽거나 어쩌지 못할 병으로 사라지는 게 아니라 역사의 기구함으로 무너지거나 처한 상황의 절절함으로 부서지는 삶이 연출하는 ‘퇴폐’라면 그건 또 어쩌겠는가. 하여, 살아도 산 게 아니요 죽어도 죽은 게 아닌 실의와 한恨이 한 인간을 화석보다 단단하게 응고시킬 수 있다면 켜로 쌓여진 사연 앞에서 퇴폐란 한낱 슬픔의 사소한 단위 하나에 지나지 않는 건 아닐까. 대관절 ‘무너지는 인간’이나 ‘부서지는 사람’은 온전한(?) 존재와 어디서 어떻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무엇을 퇴폐로 규정하든 언어가 쳐놓은 의미의 네트워크 안에 걸려든 당사자들은 정작 그 누구도 내가 ‘퇴폐’의 늪에 빠졌다거나 ‘퇴폐적’이라고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아무튼 언어란 타인이 쳐 놓은 덫이자 온갖 의미를 빙자한 자위masturbation의 도구일는지 모른다. 분명코 사전辭典이 내린 정의에 합당한 조건과 꼼짝없이 들어맞는 상황의 주인공이거늘, 한사코 퇴폐의 그늘 안에 자신을 담가두려 하지 않는 건 그(녀) 역시 부정적 언어의 노예가 되고 싶지 않다는 인식의 위선 때문일까. 아니면 위악僞惡일까?
보수니 진보니 분류하거나 에둘러 편 가르기도 버거우리만큼 좀체 사고의 유연이란 보이지 않는 우리 선현先賢들의 데피니션 작업은 그저 숨이 막힌다. 감각의 자유로움이나 행여 삿된 현상 앞에서야 더더욱 근엄하기 일쑤였던 나날들 속에 어디 감敢히 퇴폐랴. 조선사회에서의 ‘그것’이야 좀 더 있다 살피도록 하고 퇴폐는 오늘에 이르도록 삶의 ‘결딴ruin/destruction’과 동의어로 채택되고 있을 지경이다. 조금이라도 더 유연해지려 하지 않는 지식의 기성旣成과 문화의 기왕旣往.

퇴폐[명사] :
1. 쇠퇴하여 결딴(이) 남. [비슷한 말] → 퇴당頹唐
2. 도덕이나 풍속, 문화 따위가 어지러워짐.
/ / /
도덕, 질서, 문화 따위가 쇠하여 문란해짐. 쇠하여 문란해지다.

이와 연동되는 합성어의 경우도 그 규정에는 엄격한 논조가 이어진다. 가령 퇴폐와 문학을 이어 붙일 경우에도 문학은 졸지에 타락墮落의 터전이 된다. 그것은 마치 삶이 퇴폐에 물들지 말아야 할 안온하고 신실信實한 대상이어야 하듯, 찌들거나 썩지 말아야 할 건강한 장르들의 보고寶庫이어야 함을 강박적으로 주문한다.

퇴폐문학 :
19세기말의 구라파의 회의懷疑사상을 기초로 한 문학. 기성의 사회 도덕을 무시하며 예술의 목적은 일시적?육체적 향락을 구하는 데 있다는 부패한 문학.

여기서 퇴폐는 아예 부패와 동일시된다. 퇴폐 일반에 관한 기왕의 부정적 선입견을 확대 재생산함으로써 ‘부서짐’과 ‘무너짐’의 배경은커녕 그 결과란 것들이 한낱 사회문화적으로 ‘썩고 병든’ 노폐老廢물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래도 되는 것이었을까. 이제 와 또 다시 저 질풍노도疾風怒濤 같았던 실존주의의 바람을 소환할 생각까진 없다. 하지만 바람의 중심에서 냅다 긴 칼 휘두르던 사르트르의 주장은 이즈음 새삼스럽다.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 했던가. 그러나 있되, 어찌 있는지 그 상태를 구성하는 요소는 본질보다 더한 존재의 미립자微粒子 아니던가. 치열하게 ‘존재하든’, 난감하게 ‘자리하든’, 아님 미칠 듯한 상황의 노예로 거기 ‘있든’ 그것들 모두가 ‘무엇’이 되어가고 있는 가운데 잠시 멈춘 것처럼 보이는 걸 놓고 ‘잠정적 휴지休止’가 마치 항구적 본체인 양 생각하는 건 착시도 보통 착시가 아니다.
그가 애당초 모든 인간의 실존성을 일컬어 ‘비커밍 빙Becoming Being’이라 그렸던 언어의 윤곽은 여태껏 유효하다. 끝없이 ‘누구인가?무엇인가’ 되어가고 있는 생성 중의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의 참 모습이라 본 그의 규정 방식은 정의롭고 적확하기 때문이다. ‘정의’를 ‘정의롭게’ 표현해야 하듯, ‘퇴폐’도 ‘퇴폐적’으로 묘파描破할 일이다. 벌써부터 동어반복tautology을 염려할 지경이지만, 문제의 핵은 문제 그 자체에 있지 않다. ‘퇴폐’가 문제가 아니라 어쩌다 퇴폐적 ‘조건’에 몰입하게 되었는지가 중요하지 않을까. 퇴폐가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족쇄가 되어 버린 까닭이 족쇄 ‘그것’보다 한결 소중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러나 그 까닭이란 것도 지극히 개인적이었을 것이란 예감이 여지없이 무너져 내릴 때 논의의 필요는 각별해진다. 타락과 파멸의 이유가 그(녀) 자신에게만 온전히 담보되는 게 아니라면 그건 대체 뭐였단 말인가? 가문家門? 국가? 사회? 아니면 역사? 덜 억울하기로는 개인의 몫과 주변의 책임 지분을 서로 견줄만한 과학적?통계적 근거가 명료한 경우일 것이다. 그것이 가능하다면야 무슨 문제랴.
--- 「I. 지치고 고단한 퇴폐 : 돌팔매나 던져대는, 형용사이면서 동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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