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에서 기독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들의 영향력이 그 전 시대에 비해서 약화된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시작된 현상이다. 현대 사회에서 종교는 이제 더 이상 현대인들에게 세상을 살아갈 정신적 지표와 세계관을 제공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현재 각 종교들의 교세가 현저하게 감소하고, 현대 사회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에 대해서 종교가 올바른 길을 제시해주지 못하는 것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분석심리학자 C. G. 융은 현대 사회의 이런 현상을 가리켜서 “신의 황혼”이라고 하였고, 철학자 마틴 부버는 신의 일식(日蝕)이라고 불렀다. 현대 사회에서 지금은 신이 죽은 것처럼 정신적 가치가 세속적 가치에 눌려 있지만, 그것은 해가 졌거나 잠시 가려져 있지만 다시 떠오를 때까지의 어둠이고, 해가 다시 뜨고, 해를 가렸던 달이 물러가면 새로운 질서와 함께 신의 통치가 시작될 것이라는 말이다.
서양 점성술에 의하면 우리가 사는 현 시대는 물고기자리에서 물병자리로 넘어가는 새 천년의 중간기인데, 고대인들은 2,000년을 주기로 해서 우주의 축이 변한다고 보았다. 사실 2,000년이면 그 어떤 것이든지 그 전의 기운이 다하여 근본적으로 새롭게 교체되어야 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그것은 한 사회에서 정신적 지주가 되는 종교 사상도 마찬가지이다. 종교는 개인들에게 세계관을 제공하고, 사회 전체적으로 이념 체계나 지도 원리를 제공하는데, 2,000년이 지나면 그 사회의 물질적 기반과 환경이 모두 변하여 새롭게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그 동안 믿어왔던 신의 이미지(image of god)가 변화된 것을 보면 잘 드러난다. 사람들은 그 동안 그들의 삶에서 절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던 신(神)을 외부에 투사(project)했는데, 그것들은 인지(認知)가 발달하면서 변화된 것이다. 인류는 처음에는 하늘이나 해, 달, 별 등 자연 현상을 신으로 숭배하였고, 그 다음에 강력한 동식물을 신으로 숭배하였으며, 시간이 더 지난 다음에는 자연의 원리(道)나 형이상학적 원리(空)를 신적인 것으로 숭배하면서 살았다. 기독교에서도 신의 이미지는 엘, 야훼, 제사장의 하느님, 성육신하신 하느님 등으로 달라졌는데, 지금 신의 죽음(death of God)이 운위된다면, 현대인들은 지금 그들의 삶의 바탕이 될 새로운 하느님의 이미지를 찾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기존의 정신이나 이념 체계를 가지고 의미 있는 삶을 살고, 불안을 느끼지 않는다면 지금과 같은 아노미(anomie)적 혼란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모든 사람들은 2,000년 전 바울이 “모든 피조물들이 고통 속에서 구원자를 기다린다”고 간파(看破)했듯이 새로운 영성을 통한 구세주를 기다리는 듯하다.
그렇다면 새로운 영성은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바람(pneuma)은 불고 싶은 대로 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짐작은 할 수 있는데, 그 단초는 중세의 신비가 요아킴 드 플로르(1130-1202)가 언급했던 “성령의 시대”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기독교는 성부(聖父)의 시대를 거친 다음, 2,000년 전부터 물고기로 상징되는 성자(聖子)의 시대를 거치면서 문명을 이룩했는데, 이제는 성자의 종교가 쇠퇴하면서, 새로운 시대가 전개될 텐데 그 시대는 성령(聖靈)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성령의 시대가 어떤 모양으로 나타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인류가 지금 물병좌 시대로 들어갔다면, 새로운 영성(靈性)은 물병처럼 모든 것을 담는 영성일 것이다. 현대 사회는 그 전 시대처럼 어느 누가 갑자기 나타나서 자신이 메시아라고 외칠 수 있는 시대도 아니고, 인류가 여태까지 쌓아온 종교 사상들이 새로운 그릇에 담기는 형식으로 드러나며, 그 과정에서 성령이 작용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성령은 지혜의 영이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현대 사회를 보면 인류에게 구원자의 필요성은 시급하다. 현재 전 세계에는 국가 간에는 물론 한 국가 내에서도 빈부격차가 너무 심하고, 환경의 파괴와 기후 변화는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빨리 진행돼서 사람들이 지금처럼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통제하지 못하면 지구가 언제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감정적으로 어린아이 같은 인류의 손에 쥐어진 원자핵 무기는 인간이 성숙되지 못하면, 언제 지구에 대재앙을 가져다줄지 모른다. 해가 뜨기 전이 제일 어둡듯이 현대인들은 지금 당하는 커다란 혼란과 고통 속에서 새로운 천년을 살아갈 새로운 영성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를 살펴볼 때, 인간은 지구상에 생명체가 탄생한 이래, 항상 수많은 위기들을 겪어왔고, 그때마다 성공적으로 극복하였다. 인류는 그 동안 수많은 빙하기와 간빙기를 거쳐 왔으며,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은 전쟁과 전염병과 자연재해들을 이겨냈다. 그러면서 인류는 그 전보다 더 큰 정신으로 발달하여, 현대의 문명을 이룩하였다. 그러므로 지금 현대인들이 잠시 “신의 황혼” 앞에서 여러 가지 일탈적인 상황들을 겪지만, 머지않아 인류는 다시 “떠오르는 새벽 빛”(Aurora Consurgence)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에서 우리는 본서에서 스위스의 분석심리학자 C. G. 융의 사상과 기독교영성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C. G. 융은 정신과의사이며 정신 분석가로서 정신치료에 대하여 고찰하면서 기독교를 비롯한 여러 가지 종교 사상들을 살펴보고, 정신병리와 신의 이미지(image of God)에 대해서 깊이 있게 접근하였기 때문이다. 본서에서는 먼저 C. G. 융의 종교 사상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다. 융은 인간은 본질적으로 종교적 존재로서 신의 이미지가 인간의 모든 행동을 하게 하는 원천이 되는데, 현대 사회에서 정신질환이 증가하는 것은 종교가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면서 새로운 신의 이미지를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캐나다의 가톨릭신학자 버나드 로너간의 종교사상과 기독교영성에 대해서 살펴볼 텐데, 로너간은 1963-5년 개최되어 새로운 가톨릭 시대를 열게 하였던 바티칸 제2공의회의 신학사상 수립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던 신학자이다. 그는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특성은 인식에 있으며, 인식은 사람들이 삶에서 당면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인간의 가장 궁극적인 문제는 악의 문제이며, 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초월적 인식”이 필요하고, 그 인식은 회심을 통한 삶의 전환에서 온다고 강조하였다. 그런데 인간의 회심은 인식의 지향과 지평이 변화되고, 자기-초월과 자기-전유를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자기-초월은 사람들이 자아에서 벗어나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자기-전유는 인간이 자신의 고유한 속성을 깨닫는데서 온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로너간의 사상은 융의 자기-실현과 많은 면에서 공통적이다.
그 다음에 우리는 중세의 신비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를 살펴볼 텐데, 에크하르트는 영혼 안에서의 신의 탄생을 주장하면서, 인류를 다시 앞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육신된 리비도는 초탈과 돌파를 통해서 사람들의 영혼 속에서 재현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는 인간 영혼의 근저에는 신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이성이 들어 있어서 사람들이 초탈과 돌파를 통해서 영혼 속에 있는 신성을 인식할 때, 영혼의 근저에서는 신이 탄생하고, 인간은 신화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영원 속에서 일어난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은 언제나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유일회적인 구원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 가운데서 특징적인 것은 그가 이성과 신적 인식, 즉 영지를 강조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사람들이 감각적 지각에 흔들리거나 피상적 인식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사물의 심층에 들어가서 본질에 도달할 때 사람들은 신성과 하나가 되고, 영원과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 다음에 우리는 현대의 신비가 토마스 머튼을 살펴볼 텐데, 그는 제일 엄격한 봉쇄수도원인 트라피스트회 수도원에서 평생 동안 살면서 그렇게 치열하게 추구하였던 것은 그의 참 자기이다. 그는 너무 상반되는 그의 성격적 특성 때문에 어느 것이 그의 참 모습인지 몰라서 고통을 겪으면서 “진정한 나”를 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는 인간의 본성에 있는 모순에 직면하면서 결국 대극(opposite)이 모두 그 자신인 것을 깨닫고, 그 둘을 통합하면서 참 자기에 도달하였다. 하지만 그 과정은 쉽지 않아서 그가 어느 정도 통합했다고 생각할 때 또 다른 모습이 보이고, 또 통합했다고 생각할 때 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지만, 그는 결국 그것들을 통합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이런 그의 역정을 통해서 현대인들은 그들의 모습을 발견할 것이고, 융이 했던 작업은 그런 사람들을 진료실에서 했다. 머튼이 수도원에서 했던 작업을 융은 진료실에서 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성(sexuality)과 영성(spirituality)에 대해서 살펴볼 텐데, 이 두 영역은 전혀 다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분석심리학적으로 볼 때, 두 영역은 서로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성이 남성과 여성의 결합을 추구하는 작업이라면, 영성은 신과 인간의 합일을 아니마/아니무스와 자아의 결합으로 볼 수 있어서 그 두 관계를 유비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정신치료에서도 성의 문제로 고통 받는 사람은 영적인 문제가 많으며, 영적인 문제가 해결되면 성은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성과 영성은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다른 것이 아니라 모두 자연스러운 생명의 현상이며, 그 둘이 통합될 때 생명은 진정한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와 반면에 성만 추구하는 사람은 아니마/아니무스에 사로잡혀서 성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영성만 추구하는 사람은 자칫 잘못하면 비현실적인 초월성만 추구하다가 잘못 되기도 한다. 그 둘은 통합되어야 하는 것이다.
한편 부록으로 살펴본 르네 지라르의 모방이론은 기독교영성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듯하지만, 그의 모방이론과 그가 주장한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기독교영성을 새로운 각도에서 보게 하면서 영감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추가하였다. 지라르는 인간의 특성을 모방에서 찾았다. 그는 사람을 살게 하는 원동력인 욕망은 모방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사람에게서 욕망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욕망의 매개자를 통해서 불러일으켜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 사회에서 한정된 재화는 욕망을 추구하는 두 주체에게 갈등과 긴장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두 주체가 같은 것을 취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갈등이 사회 전체적으로 확대되면 사회에서는 희생양을 찾아내어 폭력적으로 그를 희생시키는데, 희생자는 보통 아무 죄도 없는 존재이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죄의식을 느끼고, 그것을 씻기 위하여 종교제의를 시행하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전혀 그런 존재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처형한 사람들과 욕망의 갈등을 벌이지도 않았고, 처음부터 거룩한 욕망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리스도교 역시 그를 처형한 사람들에 의한 속죄제로 설립되지 않았고, 그리스도의 거룩한 욕망을 모방하려는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욕망의 갈등으로 얼룩진 현대 사회에서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은 현대의 폭력성을 해결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 서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