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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스 데일리의 1분 세계여행

나스 데일리의 1분 세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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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11월 23일
쪽수, 무게, 크기 408쪽 | 726g | 161*210*25mm
ISBN13 9788997201549
ISBN10 899720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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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행을 하는 이유

여행을 하다 보면 정신줄을 놓게 되는 경우가 더러 있다.

2016년 10월 2일도 그런 날이었다. 세계여행 모험을 시작한 지 176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때까지 나스 데일리(Nas Daily)는 20여 개 나라를 찾아갔고, 이틀간 칠레 여행을 마친 직후였다. 첫날은 산티아고에서 보냈는데, 남미에서 가장 높은 타워인 그란 토레(Gran Torre) 꼭대기에서 정말 멋진 영상을 찍었다. 둘째 날은 항구도시 발파라이소로 가서 유명한 벽화거리를 촬영하고, 새로 만난 친구들과 해변 레스토랑에서 석양을 보며 즐거운 저녁식사를 했다.

칠레를 찾아간 진짜 이유는 바로 셋째 날에 있었다. “나는 지금 육지에서 제일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섬을 찾아 갑니다.” 며칠 전 탁자 위에 지도를 펴놓고 지리 숙제를 발표하는 들뜬 초등학생처럼 손가락으로 내가 갈 곳을 가리키며 페이스북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바로 여기 있습니다! 내가 찾아갈 이스터 아일랜드가 바로 여기입니다! 끝도 없이 가야하겠지만 고생할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주 일요일에 나는 그곳에 도착해 폴리네시안 트라이앵글에서 가장 동쪽으로 떨어진 163평방킬로미터에 달하는 외딴 섬의 해변에 서 있었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놀라운 섬이니 꼭 가보라는 말을 많이 들었고, 그래서 오게 된 것이었다.

여행 안내책자를 아무리 꼼꼼하게 읽고 준비해도 오감을 강타하는 예기치 않은 감동에는 대비할 수 없다. 세찬 바닷바람과 파도, 아름다운 자연풍광을 보면 정신을 차리기 힘들게 된다. 삶의 모든 요소들이 하나로 합쳐져서 나를 적시에 이곳으로 인도해 준 게 아닌가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오, 마이 갓! 이건 말도 안 돼!” 오프닝 이미지 때 나는 캐논 디지털 렌즈에 대고 이렇게 소리쳤다. 바람이 티셔츠를 흔들어대고, 얼굴은 금방 웃음이 터져나오기 직전처럼 상기돼 있다. “드디어 이스터 아일랜드에 왔어요! 기막힌 곳이에요!”

이틀 하고 반나절 동안 나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멋대로 섬을 가로지르며 엄청난 환희를 맛보았다. 놀라운 풍경을 영상에 담으면서 수시로 들뜬 소리를 마구 질러댔다.

북쪽 해안에 늘어선 암적색 절벽을 파도가 때리며 하얀 포말을 만들어냈다. 야생마들이 길게 자란 금잔디 밭에서 한가하게 풀을 뜯고 있다. 파노라마처럼 섬 전체에 늘어선 낮은 언덕 위로 푸른 채소밭이 카펫처럼 완만하게 펼쳐져 있다.

그리고 유명한 모아이 석상들이 서 있다. 거의 8세기 전 원주민 라파누이인들이 돌을 깎아 만든 거대한 사람 머리 형상의 석상들이다. 주민들을 수호하기 위해 섬 안쪽을 향해 섬의 가장자리에 늘어선 거대한 석상 무리는 그 수가 모두 887개에 이르는데, 큰 것은 높이 21미터에 무게가 150톤에 달한다. 수수하면서도 숨이 멎을 것처럼 아름다운 이 석상 무리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시간 가는 것이 하나도 아까운 줄 모른다.

“디스 이즈 퍽킹 뷰티풀!”(This is fucking beautiful!) 나는 언덕에 서 있는 모아이 석상 하나를 한 손으로 가리키며 카메라에 대고 이렇게 소리쳤다. “섬 한가운데 이런 두상들만 있어요! 다른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둘러봐도 다른 것은 하나도 없어요. 제일 가까운 육지도 여섯 시간 거리에 떨어져 있어요!”

나는 분홍색 카와사키 브루트 포스 ATV 사륜 바이크를 한 대 빌려서 섬을 가로질러 달렸다. 이 모험여행을 시작하고 난 뒤 지금까지 내 안에 남아 있던 감정의 찌꺼기를 한 조각도 남기지 않고 모두 털어내 버렸다. 새로운 장소로 옮겨가면서 나는 더 과감하고 더 자유로워졌다. 동영상 화면을 가로지르며 발레 도약을 해보이고, 코코넛나무 숲속을 미친 듯이 달리고, 잔디밭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가장 내면에 있는 생각을 카메라에 대고 속삭였다.

“아무리 봐도 질리지가 않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냥 너무 아름다워요!” 섬의 지형이 눈에 익숙해지고, 드물게 완벽한 날씨에 힘입어 나는 이스터 아일랜드 180미터 상공으로 드론을 날렸다. 항상 그렇듯이 드론은 완벽하게 임무를 완수해냈다. 매혹적인 풍경을 샅샅이 훑어서 아찔할 정도로 아름다운 공중촬영 사진을 한아름 안고 돌아왔다. 하느님만이 즐길 수 있는 풍경들이었다.

“천국을 보고 싶으세요? 그러면 이걸 보세요!” 용감한 소형 쿼드콥터가 아나케나 비치 상공에서 찍은 항공사진들을 보내오자 보이지 않는 시청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그날 저녁 페이스북에 포스팅하기 위해 클립을 정리하면서 나는 배경음악으로 영화 ‘그래비티’(Gravity)의 테마송을 골랐다. 절묘한 선곡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스터 아일랜드에서 보낸 매순간 무중력 상태에 놓여 있는 것 같은 경험을 했다.
눈 깜짝할 새 사흘이 지나고 마지막 날 아침이 되었다.

장비를 챙기며 떠날 준비를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한발이라도 더 늦었으면 곤란할 뻔했다. 칠레의 외딴 섬에서 내가 보인 과도한 열정이 당국의 눈길을 끌었던 것이다. 더 솔직히 말하면 약간 불법적인 드론 촬영이 문제가 되었다. 좋지 않은 일이었다.

‘Ka ui riva tiva te kapi ne.' 파크 레인저들이 내 출구 티켓에 이렇게 썼는데, 라파누이어로 ‘이곳을 다시 방문하지 말기 바람.’이라는 뜻이었다.

그런 건 상관없었다. 쫓겨나듯이 그곳을 떠나게 되었지만 나는 이스터 아일랜드에 72시간 머무는 동안 마법 같은 일을 경험했다. 당초 60일 계획으로 시작했던 나스 데일리 모험이 260일로 늘어나는 동안 나는 그때 경험한 마법을 수시로 다시 맛보았다. 그러면서 계획은 1년으로, 2년으로, 그리고 더 늘어났다.

이 거창한 모험을 시작한 2016년 이래 거의 모든 여행 구간에서 나는 심장이 멎을 것 같은 경외감을 경험했다.

일본 혼슈섬에서 안개 낀 아침에 구름을 헤치고 모습을 드러낸 후지산을 바라보면서 그랬고, 나이지리아의 주마 록(Zuma rock) 바위산 아래 서서 그곳에 산다는 전설의 유령들 얼굴이 있다는 725미터 높이의 바위 면을 훑어보면서도 그런 경외감을 느꼈다.

600년에 걸쳐 지어진 독일의 쾰른 대성당 안으로 걸어 들어가면서도 그런 느낌을 맛보았고, 인도 리시케시에 있는 야생동물 보호구역에서도 그랬고, 태국 푸켓의 불교사원에서도 그런 기분에 휩싸였다.

모로코 사하라사막에 들어가 별을 보며 잠자리에 들어서, 이스라엘 사해에서 진흙목욕을 하면서도 그런 기분을 느꼈다.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에서 고대시대 골목길을 걸으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나라에 가서든 나는 파괴되지 않고 이어지는 인간정신의 본모습과 인간의 감성이 발휘하는 막강한 힘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아랍어로 ‘나스’(Nas)는 ‘사람들’을 뜻한다. 이 모험적인 여행을 통해 나의 가장 큰 관심사도 바로 사람이었다.

미얀마에서 만난 열한 살짜리 여학생은 여행 가이드가 되어서 8명이나 되는 식구를 먹여 살리겠다는 생각에 독학으로 7개 언어를 공부하고 있었다. 나스 데일리의 팔로어인 인도의 한 젊은이는 내가 자기 나라에 와 있는 동안 몸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온라인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내가 있는 곳을 찾아내 자기 집으로 데려가 온가족이 나서서 치료해 주었다.

그리스 난민촌에 사는 어느 시리아인 미망인은 전쟁으로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다. 그 여인은 어떤 원망이나 분노도 나타내지 않고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아가는지 설명해 주었다. 그녀는 자신이 받는 식량배급 일부를 조금씩 모아 십여 명의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만들어 주었다. 그러면서 “이런 일을 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라고 말했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나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나는 세계여행을 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나는 나스 데일리를 시작했다.

2016년 4월 10일에 나는 케냐의 나이로비로 가는 편도 티켓을 구입하고 끝이 어디일지 모르는 오디세이를 떠났다. 계획은 비교적 간단했다. 60일 동안 가능한 한 많은 땅을 밟아 보고, 여행기록을 하루 한 편씩 비디오 동영상으로 만들어 페이스북에 올리는 것이었다.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는 점은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행의 어려움을 몰라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낯선 나라에 가서 아침에 눈을 뜨고, 문화충격을 이겨내야 하고, 길도 찾아야 한다는 것은 나도 안다. 사실은 24년을 살며 제법 많은 나라를 다녀 보았다. 안전한 여행지만 골라서 다닌 것도 아니었다. 모스크바와 캄보디아, 스리랑카, 그리고 북한에도 가보았다. 게다가 나는 전쟁 분위기가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는 중동에서 자랐다.

내가 본 것을 카메라로 기록하는 일도 생소하지 않았다. 그보다 2년 전 루빅스 큐브를 맞추는 한 가지 목표를 가지고 3개월 동안 11개 나라를 돌아다니며 스턴트 비디오를 제작했다. 새로운 도시에 도착하면 현지 주민이든 관광객이든 만나는 사람 아무에게나 큐브를 주면서 한번 돌려 보라고 부탁했다. 딱 한 번만 돌려 보라고 했다. 심지어 동물에게 부탁한 적도 있었다. 정신 나간 짓이지만 결국에는 맞추기에 성공했다. 90일 동안 84명, 나중에는 태국 원숭이에게까지 부탁하고 나서 큐브가 맞추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큐브 맞추기와 다르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이전 여행과 가장 큰 차이점은 이 여행을 왜 떠나는지, 이 여행을 통해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모른다는 점이었다. 정해진 것이 하나도 없는 게 여행의 가장 큰 목적이었다. 무각본, 무계획으로 시작해 앞으로 어떤 과정이 전개될지,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지 전혀 예측불가인 여행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모험여행을 떠나기 전 나는 자신의 삶이 판에 박힌 틀 속에 갇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바로 판에 박힌 삶을 사는 것이다. 내 링크드인(LinkedIn) 프로필에는 총명하고 진취적인 젊은이가 머리를 수그린 채 일에 몰두하고 있는 사진이 올라 있었다. 하지만 거울을 들여다보니 거울 속의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스물네 살의 평범한 털복숭이 팔레스타인계 이스라엘 청년이었다. 아이비리그 대학을 나온 그 젊은이는 모험을 찾아 안락한 고액 연봉 일자리를 때려치우고 나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너무 앞서나가는 면이 있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배경 설명을 잠시 해보겠다. 나는 이스라엘의 아라바라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다. 갈릴리 남부에 있는 사흐닌 밸리의 경사면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고, 그 안쪽에 하얀 석조 가옥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여행안내 앱 트래블로시티(Travelocity)에서 우선적으로 추천하는 여행지는 아니지만 아라바는 2만 5,000명의 주민과 관광객 제로, 도로에 파인 약 50만 개의 포트홀을 자랑한다.

도시 주위는 올리브와 워터멜론, 양파를 재배하는 드넓은 농장지대가 둘러싸고 있고, 대표적인 건축물인 대(大) 모스크가 도시 전체를 압도하고 있다. 모스크의 12층짜리 미나렛이 주위의 이슬람 건축물들을 제치고 높이 솟아 있다.

하지만 아라바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유대 국가 안에 자리한 아랍 도시라는 존재 자체이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관광객이 몰려오고 인기 테마파크가 있어야 내가 사는 마을이 특별한 곳이 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제일 중요한 것은 바로 사람이다. 사람은 물건처럼 공장에서 만들어낼 수 없다. 그리고 아라바 주민은 좋은 사람들이었다.

나는 따뜻하고 화목한 가정에서 자랐다. 특별히 가난하거나 부유하지는 않지만 큰 문제없이 잘 사는 편이었다. 가족 모두 관심을 갖고 서로를 지켜봐 주었다. 아버지는 정신과의사, 어머니는 교사였고, 나는 네 아이 중 둘째였다. 크게 풍족하지 않았지만 물질이나 돈 때문에 아이들 버릇이 망쳐지지는 않았다. 대신 마음껏 누리는 애정과 자유분방함 때문에 버릇이 없는 편이었다.

돌이켜봐도 자라면서 특별히 부정적인 일을 겪은 기억은 없다. 대신 나는 다른 아이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아주 수줍음이 많은 아이였다. 거의 매일 혼자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인터넷을 뒤지며 보냈다. 거기서 배우고, 배우고, 또 배웠다. 웹의 효용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호기심 많은 어린이의 정신세계와 기술세계를 확장하는 데 구글 만한 게 없다고 생각한다.

피아노 치는 법도 인터넷에서 배웠다. 어려운 악보는 아직 읽을 줄 모르지만. 손가락으로 연필 돌리는 법을 배운 곳도 인터넷이다. 연필 돌리기는 친구를 사귀는 데 아주 유용한 기술이다. 루빅스 큐브를 16초 만에 맞춘 것도 인터넷에서 배운 덕분이다. 운이 좋았지만 이 기록은 개인 세계기록이 되었다.

비행기 티켓을 구입할 형편이 되기 오래 전 지구상에 여러 나라와 다양한 문화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인터넷에서였다.

제일 중요한 것은 영어도 인터넷에서 배웠다는 사실이다. 나는 아랍어 자막이 붙은 미국 영화를 보거나 온라인 게임 커뮤니티에 들어가 얼쩡거리면서 영어를 배웠다. 기본적인 영어표현 외에 유용하게 써먹을 욕설도 왕창 배웠다. 오프라인에서도 기를 쓰고 영어를 배우기 위해 노력했다. 하굣길에는 혼자 영어표현을 중얼거리며 익혔다. 특별한 억양이 들어가지 않는 정확한 영어발음을 구사하고 말겠다는 목표를 세워놓고 있었다. 연어를 뜻하는 ‘새먼’(salmon) 발음을 제대로 하기가 정말 어려웠다.

19살이 되자 편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너무 편했다. 그게 바로 문제였다. 당시에는 그게 문제인지 몰랐다. 몇 년 지난 뒤에야 편하다는 생각이 들면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첫 번째 사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기숙사 포스터와 티셔츠에 ‘안전지대가 끝나는 지점에서 인생이 시작된다’(Life begins at the end of your comfort zone)라는 문구가 인기가 많은 데는 이유가 있다. 그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편안하면 성장이 멈춘다. 생산도 멎는다. 남은 일은 그저 안정상태를 유지하는 것뿐이다. 2011년에 나의 삶이 바로 그랬다.

그러던 차에 예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 미국 오하이오주 출신의 마사 무디(Martha Moody)라는 여류작가가 아랍계 이스라엘 마을에 자원봉사를 하기 위해 이스라엘로 왔다. 그녀는 내가 다니는 고교의 영어교사인 자말 아사디 선생님을 도와 우리에게 영어작문을 가르쳤다. 마사 선생님은 아들 잭을 데리고 왔는데, 나는 잭에게 연필 돌리는 기술을 가르쳐 주면서 그와 급속히 가까워졌다. 마사 선생님이 오하이오주로 돌아간 뒤에도 나는 두 사람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몇 달 뒤에 마사 선생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이메일 편지가 왔다.

안녕, 꼬마 코쟁이(Little Big Nose). 오하이오로 한번 오지 않을래? 오기만 하면 먹고 자는 것은 우리가 책임질 거야. 우리 모두 네가 보고 싶어.

나는 마사 선생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오하이오에 머무는 동안 그녀는 하버드대에 다니는 큰아들 엘리한테 찾아가 보자고 했다. 사실은 나를 그냥 데리고 간 게 아니라, 나에 대해 이미 어떤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나의 가만있지 못하는 성격을 눈여겨보고, 하버드대 진학이라는 기상천외한 당근을 내 눈앞에 흔들어대며 내 반응을 떠보려고 했다. 그녀가 내 학습 잠재력을 눈여겨보았을 수도 있고, 아라바 시절의 나를 보고 측은하다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당시 나는 온라인 앞에서 시간을 보내며 영어 욕설이나 배우고 있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마사 선생님이 나를 아주 잘못 본 것은 아니다. 나는 사랑을 듬뿍 받으며 유년시절을 보냈지만, 당시 아라바의 문화는 많이 돌아다니는 것을 장려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인근 마을과 내가 사는 동네에서는 새 집을 사거나, 배우자와 이혼, 이사를 가는 일이 드물었다. 사람들은 사는 곳에 대한 애착이 매우 강해서 그곳을 떠나는 걸 죽기보다 더 싫어했다. 그래서 누가 짐을 챙겨 멀리, 특히 미국으로 떠나는 걸 보면 대단히 놀라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버드라는 미끼를 물었다. 하버드 캠퍼스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나는 진홍색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곳이 다음에 내가 오를 언덕이 될 것이라고 결심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을 각오를 했다.

이스라엘로 돌아와서 하버드 입학 지원절차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사정은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입학률은 3퍼센트에 불과했고, 운이 좋아 입학이 된다 하더라도 등록금이 연간 6만 달러에 달했다. 그리고 시골 촌뜨기 아랍 아이가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생이 된다고? 그래도 나는 하겠다고 덤벼들었다. 세상에는 이보다 더 말이 안 되는 일도 많이 일어나지 않는가. 나는 지원서류를 작성한 다음 고교성적 증명서와 장학금 신청서를 함께 넣어서 보냈다. 결과는 하늘에 맡겼다.

사실은 하늘에 맡기지도 않았다. 합격이 될 것이라는 기대는 추호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합격이 되었다. 입학 허가가 떨어진 것이다. 이런 제기랄. 내가 하버드로 가게 되다니.

시간이 가면 사람은 지혜로워진다고 한다. 뒤돌아보면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에서 보낸 4년간의 대학생활을 통해 내가 얻은 가장 큰 소득은 인간은 모두 스스로의 삶을 더 높은 곳으로 끌어올릴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그 더 나은 삶은 좋은 학교, 좋은 집일 수도 있고, 더 나은 삶을 영위하는 것일 수도 있다.

사람들은 하버드에 들어가려면 학교성적이 좋아야 하고, 주위의 연줄도 좋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두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 외에 갈증, 무엇인가에 대한 갈증이 있어야 한다. 사진에 대한 갈증도 좋고, 수학, 스포츠에 대한 갈증도 좋다. 여러분의 내면에 잠재해 있는 비밀의 불씨에 불을 붙여줄 그 무엇에 대한 갈증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하버드에 지원서를 낼 당시 나는 갈증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허기 때문에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더 웃기는 것은 내가 무엇에 목마르고 허기져 있는지에 대해 스스로 아무런 확신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하버드를 졸업하기 전에 벌써 여러 가지 다른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어느 쪽이 나에게 더 나은 길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 되었건 자신이 기술 분야에 재능이 있다는 것은 알았다. 그래서 대학 2학년 때부터 여름방학이 되면 나처럼 꿈을 좇는 친구들과 팀을 만들어 그 멋진 꿈을 추구하는 일에 나섰다. 우리는 할렘의 계단을 걸어 오르내리는 싸구려 숙소에 묵으며 비좁은 스타트업 인큐베이터 사무실에서 일했다. 식사는 길거리 푸드 트럭에서 해결했다. 안전지대를 벗어나는 게 성공의 비결이라면 나는 나이 스물에 이미 재벌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 그 2년 동안 내가 한 일이라고는 자신을 실패로 안내한 것이 전부였다. 반복해서 그렇게 했다. 2012년에 킨디파이(Kindify)를 창업했다. 소셜미디어에서 친절을 베푼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아내 상을 주고, 사람들에게 알리는 온라인 플랫폼이었다. 착한 행동은 반드시 벌을 받는다는 말이 정말 맞았다. 킨디파이도 폭망했다.

그 다음에는 소셜미디어의 연결성과 네트워킹 기능을 향상시켜 주는 검색엔진 브랜츨리(Branchly)를 창업했는데 그것도 망했다. 그 다음 1분짜리 기사만 올리는 뉴스 애그리게이터(news aggregator)인 다운타임(Downtime)을 시작했는데, 그것도 꽝! 여행객들에게 옷을 빌려주는 오이스터(Oyster)를 시작했고, 이번에는 대박을 칠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그것도 바이 바이.

그러다 레스토랑 등에서 내보내는 백그라운드 음악 추천 엔진인 뮤자크(Muzak)를 출범시켰다. 그게 어떻게 되었는지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당시 내가 시작한 모든 프로젝트가 성공할 요소를 갖고 있었다고 믿는다. 단지 그걸 실행에 옮길 능력이 없었던 것뿐이다.

중요한 것은 2014년 하버드를 졸업하던 당시 나는 대학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나의 길을 찾아 이미 출발한 상태였다는 사실이다. 그게 나에게 자신감을 주었다. 대학에서는 현실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해서는 기초적인 것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자신감이 있으면 자신을 팔아먹을 능력도 생긴다. 그리고 자신을 잘 팔 능력이 있으면 일자리도 따라온다.

그렇게 해서 나는 하버드 졸업장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인 2014년 9월 거대 모바일 결재 서비스 기업인 벤모(Venmo)에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정식 채용되었다.

나는 엔지니어로서 앱 개발에는 관여하지 않고, 백 인프라(back infrastructure) 관리와 벤모에서 수집하는 어마한 량의 결재 데이터를 관리해서 이를 페이팔(PayPal)로 보내는 업무를 맡았다. 그 액수가 수백 억 달러에 달하는 경우가 많았다.

솔직히 말해 벤모에서의 생활은 정말 괜찮았다. 맨해튼에 있는 사무실로 출근해서 공짜 커피에 공짜로 멋진 아침식사를 먹고, 앉고 싶은 자리 아무 데나 앉아서 일했다. 앉아서 하든 서서 하든 맘대로였다. 그리고 또 공짜 점심을 먹고,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유저들의 삶을 향상시켜 주는 앱을 관리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정말 좋은 사람들 사이에서 했다. 보수도 연봉 12만 달러이니 나쁘지 않았다.

멋진 일을 하고, 멋진 근무 환경에 끝내주는 대우까지 받은 것이다. 한마디로 최고의 직장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사실 때문에 나는 사표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한 번 정리해 보자.” 친구는 내 말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너무 좋은 직장이라서 벤모를 그만두겠다고?”

내가 생각해도 그건 미친 짓이었다. 나는 대학 졸업하자마자 내 또래 젊은이라면 기를 쓰고 달려들 좋은 직장에서 연봉 12만 달러를 긁어모으고 있었다. 제정신이라면 그런 직장은 조금 더 다니면서 장래를 신중하게 생각해 보는 게 정상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고작 20개월 다니고서 그만두겠다는 생각을 했다. 회사가 워낙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야심을 가지고 진득이 회사생활을 하며 승진해 올라간다면 10년 뒤에는 나도 백만장자가 될 가능성이 많았다.

하지만 예의 그 안전지대가 맘에 걸렸다. 그리고 갈증이 문제였다. 게다가 새로운 문제가 한 가지 더 생겼다. 나중에 나는 그것을 분노라고 불렀다.

벤모에 대한 분노는 아니었다. 그곳은 정말 꿈같은 직장이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 모두 더 이상 좋을 수 없을 만큼 좋았다. 내가 분노를 느낀 것은 우리가 가장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있는 소망, 내면에 자리한 고귀한 희망을 담장으로 둘러 가둬두라고 벤모가 요구한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벤모의 그러한 발상 자체에 분노를 느꼈다. 벤모는 우리에게 내면의 그 고귀한 소망을 추구하지 말라고 요구한 것이다.

앞으로 멋진 삶을 살기 위해 우리의 20대, 30대, 그리고 40대를 희생해야만 한다고 요구하는 그 준칙에 분노했다. 그 준칙은 나중에 멋진 삶을 즐기기 위해서라면 형편없는 일이라도 참고 계속하라고 강요하고 있었다.

하루의 가장 소중한 8시간을 사무실에 틀어박혀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며 보내야 한다는 사실에 나는 분노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내게 없었다.

그리고 시시각각 나이가 들어간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책상머리에 앉아 데이터에 파묻혀 지내기에 스무 달은 긴 시간이었다. 무엇인가 할 말이 있을 때는 특히 더 그랬는데, 당시 나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가족, 사람들, 그리고 세상에 대해 할 말이 무지 많았다.

나에게 중요한 일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아직 모르는 일을 새롭게 알고 싶었다. 새로운 일들에 대해 너무 듣고 싶었다. 끝도 없이 숫자를 모으고 쪼개고 하는 의미 없는 일을 하느라 정작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못해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나는 자신의 삶에 분노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다른 어떤 무엇을 훨씬 더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 다른 어떤 무엇이 어떤 것인지 아직 모른다고 해도 상관없다. 그래서 나는 생각해 보았다. 심호흡을 한 번 한 다음 미친 도박에 주사위를 던져서 그 ‘다른 무엇’을 잡는다고 치자. 만약 지금 벤모를 그만두고 세계일주 여행을 떠난다면 그 분노가 조금은 가라앉을까.

나는 이크람 마그돈 이스마일(Iqram Magdon-Ismail)씨에게 내 생각을 이야기해 보았다. 그는 벤모의 창업자이고 나를 채용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 사람에게는 먼저 이야기하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미 벤모를 떠나 있었지만 나와는 서로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는 내 말을 듣더니 엄청 좋아했다. 그리고는 내 꿈을 좇아가라고 격려했다.

“세상에는 자네가 원치 않는 일을 계속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들이 얼마든지 있네.” 그는 내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보다 더 나은 친구는 없다. 그래서 나는 책상을 비우고 출입증을 반납한 다음 사무실을 걸어 나왔다.

나스 데일리(Nas Daily)를 시작하겠다는 생각을 제일 처음 하게 된 게 언제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무슨 계시를 받은 것처럼, 먹구름을 뚫고 밝은 해가 나타난 것처럼 어떤 생각이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아니다. 아하! 하고 어떤 아이디어가 갑자기 떠오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마치 서서히 타오르는 불길처럼, 서서히 밝아오는 여명처럼 내가 그동안 노력해서 얻은 지식과 경험의 조각들이 한데 짜맞추어지며 나온 생각이었다.

루빅스 큐브 프로젝트를 하면서 나는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신속히 이동하고, 새로운 문화에 재빠르게 적응해서 그것을 동영상으로 만들어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방법을 터득했다.

다운타임(Downtime)을 이용해 선명하고 아름다운 영상을 찾아서 60초짜리 콘텐츠로 압축해 만들어 올리는 법도 배웠다.

하버드에서 배운 경제학 덕분에 무한한 상상력을 냉정하고 녹록치 않은 현실인 돈 문제와 타협시킬 줄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이스라엘에서 자란 덕분에 어떤 영상을 만들어 올리든 결국은 사람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2016년 4월에 올린 첫 번째 나스 데일리 동영상을 보면 착잡한 생각이 든다. 순진하기 짝이 없는 낙관주의와 천진난만한 열정에 들떠 있어 놀라울 정도이다. 그저 두 달 동안 놀러 나가서 예쁜 경치를 찍은 비디오 영상을 매일 하나씩 올리면 되는 정도로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그날 카메라에 대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왜 이 일을 시작하는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재미있을 것 같아요! 매일 1분짜리 비디오를 한 편씩 만들 생각입니다. 드론 한 대와 헤비 카메라(heavy camera) 한 대, 고프로(GoPro) 액션캠 한 대, 그리고 벤모 티셔츠 몇 장과 영양바를 챙겨갑니다. 자 출발합시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당시 내가 가졌던 솔직함을 칭찬해 주고 싶다. 왜냐하면 당시 나는 내 앞에 어떤 일이 전개될지 전혀 몰랐다. 그래서 그런 식으로 기대치를 낮춤으로써 경영대학원에서 가르치는 ‘시장적합성’(product-market fit)을 갖춘 제품을 만들기까지 몇 번이고 실패할 수 있는 여지를 스스로 만든 것이었다.

다시 말해 나는 내가 만들 제품에 귀를 기울여 줄 청중이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들을 찾아내기만 하면 되었다.

이처럼 천하태평인 가운데서도 꼭 지켜야 할 몇 가지 규칙을 정했다. 첫 번째 규칙은 바로 영상의 길이가 60초를 넘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온라인 콘텐츠의 크리에이터 겸 소비자로서 나는 어떤 비디오건 너무 길면 사형선고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보리밭을 휘젓는 토네이도 영상도 10분을 넘기면 지루해진다. 그래서 나는 1분 안에 끝나지 않는 비디오는 아예 만들지 않겠다는 규칙을 만들었다. 예외는 두지 않겠다고 했다. ‘지금까지 원 미닛이었습니다. 내일 다시 만납시다.’(That’s one minute, see you tomorrow)라는 마감인사도 그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이것 못지않게 중요한 규칙은 하루 한 편씩 영상을 포스팅한다는 것이었다. 어떤 물건이든 양질의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런 꾸준한 성실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엄격한 일과표를 지키다 보면 내가 하는 일의 수준이 더 향상될 것이라고 믿었다.

이런 규칙을 만든 것은 어떤 대학교수가 생산성에 대해 강의하면서 학생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꽃병을 만드는 과제를 내준 오래된 일화에 근거를 두고 있다. 교수는 그룹 A 학생들에게는 주어진 수업시간 45분 동안 가능한 한 많은 꽃병을 만들라는 과제를 내주었다. 그리고 그룹 B 학생들에게는 최대한 완벽한 형태의 꽃병 한 개만 만들라고 했다.

어느 그룹이 더 나은 꽃병을 만들었을까? 보나마나 답은 그룹 A이다. 왜냐하면 이 그룹 학생들은 연습을 실컷 했기 때문이다.

내가 매일 동영상을 만들기로 한 것도 마찬가지 근거에서였다. 카메라를 손에 들기조차 싫은 날도 있었고, 순식간에 작품을 완성했지만 60초짜리 쓰레기뭉치로 끝난 날도 있었다. 무슨 일이나 제일 중요한 것은 과정이다. 더 나은 비디오 제작자, 더 나은 스토리텔러가 되는 유일한 방법은 하루도 빠짐없이 ‘하루 한 편’이라는 원칙을 고수하는 것이었다.

이 동영상 시리즈를 ‘나스 데일리’(Nas Daily)로 부르기로 한 것도 나에게는 매우 큰 의미가 있었다. 내가 나스(Nas)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것은 6년 전 대학 신입생 때 어떤 룸메이트가 내 이름 ‘누세이르’(Nuseir)를 발음하기가 너무 어렵다며 “지금부터 유명 래퍼 이름을 따서 그냥 ‘나스’(Nas)로 부르겠다.”고 선언하면서부터였다. 물론 그 친구는 아랍어로 알 나스(al-nas)가 ‘사람’을 뜻한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지만, 나스라는 별명은 그때부터 내게 붙어 다니게 되었다.

그러니 이 시리즈에 나스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속임수가 아니라 아주 잘 어울리는 이름을 지은 것이다. 깊은 뜻을 지닌 이름이다. 첫날부터 나는 시청자들이 나의 눈을 통해 자신의 진짜 모습, 다시 말해 자신의 알 나스(al-nas)를 보기 바랐다. 이 여행 비디오의 해설을 내가 맡기 때문에 비디오에는 어쩔 수 없이 나의 관심사, 나의 견해, 내 호기심, 나의 열정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

나는 동영상을 제작하면서 다음과 같은 원칙을 세웠다. 매일 한 편씩 동영상을 만들고, 가능한 한 최상의 삶을 살도록 하고, 그렇게 해서 만든 동영상을 페이스북에 올려 사람들과 공유하겠다는 원칙이다. 하지만 이러한 원칙을 고수하기 위해서는 카메라 저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최상의 삶을 살 수 있을까에 대해 영감을 불어넣어 줄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다. 초기에는 비디오의 소재가 장소에 너무 몰려 있었다. 예를 들면 에티오피아의 어떤 레스토랑, 인도에 있는 어떤 별 볼 일 없는 폭포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으로는 부족했다. 비디오가 특별한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멋진 해변에서 커피 마시는 클립만으로는 모자란다. 그런 것은 단순한 블로깅(vlogging)인데, 나는 블로거가 아니다. 보다 친숙한 방법으로 시청자들과 소통할 필요가 있었다.

52일째 되던 날 어떻게 하면 그런 식의 소통이 가능할지에 대해 어렴풋이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7일간 히말라야 여행을 마치고 네팔로 돌아온 직후였다. 수도 카트만두에 들러 지진으로 황폐화된 현장을 비디오에 담았다. 불과 13개월 전 2015년에 진도 7.8의 지진이 국토 중심부를 강타해 마을들을 완전히 파괴했다. 9,000명 가까운 사망자와 2만 2,000여 명의 부상자를 내고, 수십만 명의 이재민이 생겨났다.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카트만두의 더르바르 광장에 있는 사원 여러 채가 참혹하게 파괴됐다. 나는 해설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파괴의 현장인 광장 곳곳을 영상에 담았다. 파괴된 현장 영상이 피해의 참상을 직접 말하도록 한 것이다.

그날 저녁 영상을 페이스북에 올리자 첫 번째 뷰어들 가운데 네팔에 사는 노파코른 라자라는 사람이 이렇게 코멘트를 달았다. “너무 가슴이 아파요. 네팔, 어서 회복되기를 바랄게요.” 그리고 포스트 옆에 천사 이모지를 달아놓았다.

특별히 눈길을 끄는 코멘트는 아니고, 긴 글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코멘트를 보고 지구상 어딘가에 내가 올린 포스트를 보고 감동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어떤 사람이 내가 올린 이야기 때문에 감동을 받아 고통 받는 사람들과 연결된 것이었다. 감동을 받은 그는 자신의 감정을 고통 받는 사람들과 나누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나에게 많은 의미를 안겨주었다. 이제는 매일 이 일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실하게 다가왔다.

나스 데일리 이야기를 단행본으로 엮는 데 있어서 한 가지 걱정되는 점이 있다면 가장 긴밀한 협력자인 내 드론의 뛰어난 활약상을 글로는 제대로 나타내 보여주기 어렵다는 사실이었다.

나스 데일리 시작 나흘째 되던 날 DJI 팬텀 2쿼드콥터(2quadcopter) 드론을 처음으로 공중에 띄웠다. 케냐 나이로비 교외에 있는 축구장에서였다. 처녀비행에서 드론은 지극히 평범한 수준의 사진들을 보내왔다. 하지만 적응기간은 길지 않았고, 이후 1,000일 동안 6개 대륙에서 50개 가까운 나라의 하늘을 날아올랐다. 그리고 훈련받은 전문가의 눈으로 지구의 갖가지 단편을 담은 놀라운 영상들을 보내왔다. 이탈리아 아말피 해안의 밝은 금속성 청색 바다에서부터 위풍당당한 싱가포르 다운타운의 휘황찬란한 빌딩군에 이르기까지 아름다운 영상들이 드론의 눈에 포착되어 날아왔다.

대부분의 전자기기들이 그렇듯이 기계에 적응해 나가면서 나는 드론과 함께 점점 더 멋진 작품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타이페이의 유명 상업지구인 신이 지구 상공에서도 드론을 날렸더니 고층빌딩 숲으로 이어진 장엄한 마천루 지평선을 보내왔다.

알카트라스섬을 둘러싸고 파도가 출렁이는 샌프란시스코만 상공으로도 드론을 날렸다. 드론은 그때까지 최장거리인 2.4킬로미터 비행을 무사히 마치고 숨을 헐떡이며 의기양양한 자태로 돌아왔다. 드론의 기술능력을 믿은 나는 153일째 되는 날 스위스의 한 교외에서 드론을 아우디(Audi) R8 스포츠카와 경주를 시켰는데 보기 좋게 이겼다.

나스 데일리를 시작하고 2년 동안 드론을 12번 교체했다. 쓰고 있는 드론이 망가지거나 더 나은 모델이 새로 출시되면 새 것으로 바꾸었다. 드론이 망가지는 경우는 자주 있었다. 한 대는 루마니아에서 캠핑 여행을 가는 동안 나무에 부딪쳐 부서셨고, 또 한 대는 맨해튼에서 종말을 맞았다. 연에 매다는 것처럼 드론 꼬리에 피자 박스를 매달아 날렸다가 그렇게 된 것이다. 그리스에서도 실수로 배터리를 너무 세게 부착해서 한 대가 최후를 맞았다. 네 번째로 망가진 드론은 투견인 핏불테리어의 공격을 받아 끝장이 나고 말았다.

드론의 가장 무서운 적은 날씨나 고약한 지형, 날리는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 드론 비행을 막는 정부의 조치들이다. 나스 데일리 여행을 계속하면서 이런 비행금지 조치를 너무도 자주 당했다. 모로코와 인도, 터키, 일본은 작은 비행물체를 싫어했다. 히말라야 산맥 주위의 당국들도 드론을 날리는 것에 대해 적대적인 반응을 보였다.

“당신은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로 출발하는 나를 보고 군복차림의 보안요원은 이렇게 말했다. “카메라를 여기 맡겨놓고 올라가는 방법이 있고, 또 하나는 카메라를 갖고 이 나라를 떠나는 것이요.” 실랑이해 봐야 소용이 없었다.

여행을 계속하면서 촬영을 위해 법을 어긴 경우가 몇 차례 있었다는 점을 실토하지 않을 수 없겠다. 드론을 허가구역 바깥까지 날린 적도 있었다. 인도에서 드론 불법운항죄로 3시간 억류당한 적이 있지만 운좋게 감방신세는 면했다. 자진해서 드론 촬영을 자제한 곳이 딱 한 곳 있었는데, 바로 시리아 국경에서였다. 법을 어긴 적은 많지만, 나도 그런 무모한 짓을 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비용은 말할 것도 없고, 드론을 사용함으로써 일으킬 이런 여러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내가 거의 3년 동안 여행을 계속하면서 굳이 드론을 고집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세상이 한층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는 이유 때문이다.

필리핀의 발리카삭 아일랜드는 지상에서 보면 아름답지만 평범한 섬이다. 하지만 390미터 상공에서 내려다보면 너무도 매혹적인 완벽한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코스타리카의 어느 해변도 지상에서는 특별할 게 없어 보였다. 하지만 드론이 촬영한 영상을 보니 정확히 고래꼬리 모양을 하고 있었다.

뉴질랜드에서 7,400만 마리의 양떼를 지상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사방이 온통 양떼 천지이다. 하지만 드론으로 찍은 항공사진을 보면 양떼가 마치 목자이신 하느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어디론가 몰려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항공사진을 통해 보면 우리 인간의 본성, 그리고 때로는 비인간적인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는 사실이다. 방콕 시내의 호화 리조트에서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자리하고 있는 빈민촌을 찍은 드론 사진은 소득불평등의 부끄러운 현실을 말해준다. 현대적인 도시 히로시마의 지금의 모습을 찍은 항공사진은 1945년 이 도시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피해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얼마나 많은 시리아 난민이 전쟁의 공포를 피해 유럽으로 탈출하기 위해 매일 목숨을 걸고 거친 바다를 건너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리스의 외딴 산속에 높이 쌓아놓은 이들이 입고 온 구명조끼를 드론이 찍었다. 이 사진을 통해 우리는 이들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이들이 느꼈을 공포감과 안도감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 책에 대해 몇 마디 덧붙이고자 한다. 2018년 1월 나스 데일리를 단행본으로 만들자는 제안을 받고 내가 보인 첫 반응은 ‘좋아요. 하지만 어떻게요?’라는 세 마디였다. 내가 만든 것은 60초짜리 비디오이다. 작은 비디오 영상물을 페이지마다 촘촘히 앉히는 게 아니라면, 어떤 마법을 부려서 나스 데일리 내용을 한 권의 책 안에 모두 담겠다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 다음 나는 동영상 시리즈로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했던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바로 사람, 문화, 삶, 인간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 세상의 모든 멋진 카메라 작업이 모두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매일 나스 데일리를 보는 사람들의 가슴에 전해진 것도 그런 이야기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바로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이제 남은 일은 이야기를 어떻게 구성할 것이냐였다. 랩탑 컴퓨터 앞에 앉아서 비디오 영상을 만지작거리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책을 다큐멘터리 여행 이야기로 만들 것인가? 아니면 개인 일기로? 여행 가이드북? 가이드북으로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더 어려운 일은 어떤 이야기를 소개할 것인지 선별하는 작업이었다. 1,000일 넘는 시간을 길에서 보냈기 때문에 내용을 선별하는 작업이 간단치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당연히 들었다.

우선 내가 전 세계를 여행하면서 배운 것 중에서 가장 의미 있는 일들을 뽑아서 모으기로 했다. 사실 나는 햇살이 작렬하는 몰디브 해변에서부터 달빛이 내려쬐는 파푸아뉴기니의 숲에 이르기까지 어디를 가든 새로운 교훈, 기대하지 않은 새로운 깨달음을 얻어 여행가방에 담아왔다. 이스라엘 북부의 고향집 방안에 틀어박혀 인터넷을 뒤지며 놀던 수줍음 많은 소년시절에 비하면 열 몇 살을 더 먹었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배우고 싶은 열망에 싸여 있었고, 나스 데일리는 나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었다. 그렇게 새로 배운 일들을 많은 사람과 나누는 일이 너무 영광스러웠다.

나스 데일리 300일째 보너스로 소개한 화보특집도 책에 포함시키기로 했다. ‘나스 스토리’(Nas Stories)라고 이름 붙인 이 화보에는 특별히 소개할 만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이나 장소를 모았다. 베스트 중의 베스트를 골랐다. 여행하는 동안 잠시 멈추어 사색하고 싶은 순간들도 있었다. 카메라 영상으로는 잡히지 않고 직접 말로 설명해야 하는 경험들도 있었다. 잠시 동안 모든 것을 내려놓고 골똘히 생각에 잠기게 하는 순간들이었다. 이런 순간들은 ‘나스 모먼트’(Nas Moment)라는 이름으로 모았다.

책의 내용을 어떤 순서로 읽으라든가, 어떤 시간 순으로 읽어야 한다는 정해진 공식은 없다. 정해진 순서에 따라 읽는다면 더 재미없을 것이다. 나는 미리 계획한 일정에 따라 여행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나에게 여행이란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 채 부딪쳐 나아가면서 느끼는 흥분의 연속 같은 것이다.

독자 여러분에게도 이런 미지의 흥분을 계속 느끼도록 해주고 싶다. 우리 인생도 모르는 일을 계속 부딪쳐 나갈 때 훨씬 더 재미있다. 몰디브에서 이스라엘로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몇 주 전 나스 데일리의 마지막 편 촬영을 마쳤고, 앞으로 며칠 동안의 일정 가운데 정해진 것이라고는 묵을 장소밖에 없다. 앞으로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달콤한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것이다.

내가 확실히 아는 게 한 가지 더 있는데, 그것은 바로 도착하면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새 친구들이 나를 맞아줄 것이라는 사실이다. 어쩌면 이런 사실이야말로 나스 데일리가 내게 안겨준 최고의 선물이다. 이제는 어디를 가든 여행하는 모든 도시에서 새 친구들이 나를 맞이해 준다. 단순히 나와 인사를 나누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이 500명에서 많게는 1,000명에 달한다.

길거리에서 나를 보면 달려와 셀피 사진을 찍자고 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들과 사진 찍는 것을 나는 항상 영광으로 생각한다. 낯선 도시에 허겁지겁 도착했는데 친근한 곳 같은 느낌이 든다면 정말 근사한 일이다. 가는 도시마다 내가 아는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것은 마치 세상 어떤 곳에 가든 소속감을 갖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편도 비행기 티켓 한 장을 들고 시작한 외로운 여행자였다. 그런데 1,200만 명의 축하를 받으며 그 여행을 마쳤다. 지금부터 나의 이 여행 이야기를 시작한다.
--- 「프롤로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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