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을 사랑했네 1 / 作 이정하
삶의 길을 걸어가면서
나는, 내 길보다
자꾸만 다른 길을 기웃거리고 있었네.
함께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로 인한 슬픔과 그리움은
내 인생 전체를 삼키고도 남게 했던 사람.
만났던 날보다 더 사랑했고
사랑했던 날보다
더 많은 날들을 그리워했던 사람.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함께 죽어도 좋다 생각한 사람.
세상의 환희와 종말을 동시에 예감케 했던
한 사람을 사랑했네.
부르면 슬픔으로 다가올 이름.
내게 가장 큰 희망이었다가
가장 큰 아픔으로 저무는 사람.
가까이 다가설 수 없었기에 붙잡지도 못했고
붙잡지 못했기에 보낼 수도 없던 사람.
이미 끝났다 생각하면서도
길을 가다 우연히 라도 마주치고 싶은 사람.
바람이 불고 낙엽이 떨어지는 날이면
문득 전화를 걸고 싶어지는
한 사람을 사랑했네.
떠난 이후에도 차마 지울 수 없는 이름.
다 지웠다 하면서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눈빛
내 죽기 전에는 결코 잊지 못할
한 사람을 사랑했네.
그 흔한 약속도 없이 헤어졌지만
아직도 내 안에 남아
뜨거운 노래로 불려지고 있는 사람.
이 땅 위에 함께 숨쉬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마냥 행복한 사람이여,
나는 당신을 사랑했네.
세상에 태어나 단 한 사람
당신을 사랑했네.
--- p.19
추억, 오래도록 아픔
사랑이라는 이름보다도 늘 아픔이란 이름으로 다가오던 그대. 살다보면 가끔 잊을 날이 있겠지요. 그렇게 아픔에 익숙해지다 보면 아픔도 아픔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겠지요. 사랑도 사랑 아닌 것처럼 담담히 맞을 때도 있겠지요. 사랑이란 이름보다는 아픔이란 이름으로 그대를 추억하다가.
무덤덤하게 그대 이름을 불러 볼 수 있는 날이 언제인지. 그런 날이 과연 오기는 올는지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언제쯤 그대 이름을 젖지 않는 목소리로 불러 볼 수 있을지, 사랑은 왜 그토록 순식간이며 추억은 또 왜 이토록 오래도록 아픔인 것인지....
--- p.107
이 한세상 살아 가면서
슬픔은 모두 내가 가질 테니
당신은 기쁨만 가지십시오.
고통과 힘겨움은 내가 가질 테니
당신은 즐거움만 가지십시오.
줄 것만 있으면 나는 행복하겠습니다.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사랑때문에 밤을 새워 본 기억이 있는지. 그로 인해 설레이고 가슴 떨리며, 그로 인해 세상의 종말까지도 경험해 본 적이 있는지. 몸서리치도록 사랑하다 함께 죽어도 좋다 생각한 사람이 당신에겐 있는지. 가슴이 아팠다. 이 시집을 쓰면서 나는 내내 가슴이 아팠다...
--- 책 머리에
비오는 간이역에서 밤열차를 탔다 4
이 정하 <한 사람을 사랑했네>
열차는 도착하지 않았지만
나는 이미 떠나고 있었다.
역사의 낡은 목조 계단을 내려가며
그 삐걱이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내 생애가 그렇게 삐걱대는 소리를 들었다.
취하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 마신 술이
잠시 내 발걸음을 비틀거리게 했지만
나는 부러 꼿꼿한 발걸음으로 역사를 나섰다.
철로변 플랫폼엔 비가 내리는데
구멍 숭숭 뚫린 천막 지붕 사이로 비가 내리는데
나보다 더 취한 눈으로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고
낡은 의자 위 보따리를 가슴에 품은 채 잠에 떨어진
아낙네도 있었다. 밤화장 짙은 소녀의 한숨 같은
담배 연기도 보였지만 나는 애써 외면했다.
외면할 수밖에, 밤열차를 타는 사람들 저마다
사연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이제 곧
열차가 들어오면, 나는 나대로 또 저들은 저들대로
그렇게 좀더 먼 곳으로 흘러가게 되리라.
그렇게 흘러 흘러 우리가 닿는 곳은 어디일까.
나는 지금 내 삶의 간이역 어디쯤 서 있는 것일까.
어느덧 열차는 어둠에 미끄러지듯 플랫폼으로 들어서고
열차에 올라타며 나는 잠시 두리번거렸다.
철저히 혼자였지만 혼자인 척하지 않기 위해.
배웅 나올 사람도 없었지만 배웅 나올 사람이
좀 늦나 보다, 하며. 아주 잠깐 그대를 떠올렸지만
나는 곧 고개를 흔들었다. 그대 내 맘속에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며,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며, 기다릴 그 누구도 없는
비 오는 간이역에서 나는 밤열차를 탔다.
이제는 정말 외로움과 동행이다.
열차는 아직 떠나지 않았지만
나는 벌써 떠나고 없었다.
--- p.56-57
무덤덤하게 그대 이름을 불러 볼 수 있는 날이 언제인지. 그런 날이 과연 오기는 올는지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언제쯤 그대 이름을 젖지 않는 목소리로 불러 볼 수 있을지, 사랑은 왜 그토록 순식간이며 추억은 또 왜 이토록 오래도록 아픔인 것인지....
--- p.107
멀어질수록
만나고 싶을 때 언제라도 만날 수 있다면
보고 싶을 때 언제라도 볼 수 있다면
이처럼 마음 저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만나고 싶을때 만날 수 없기에
보고 싶을 때 볼 수 없기에
그대는 정녕 내게 아픔입니다.
다가 가려 하면 멀어지고
붙잡으려 하면 이미 사라지고 없는
그리하여 내게
어두운 그림자로만 남아 있는 그대여,
늘 나로부터 멀리 서 있으려는 그대여.
그대는 아는가, 그대가 나를 떠났을 때
나는 나의 모든것을 닫았다는 것을.
그대가 멀어질수록 나는 점점
한없는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 p.102
네가 내 앞에 서 있지만
그때의 너는 이미 아니다.
내 가슴을 적시던 너는 없다.
네가 보는 나도 그때의 내가 아니다.
그때의 너와 난 이 지구상 어디에도 없다.
---p. 23
나는 내가 지칠 때까지
끊임없이 그대를 기억하고
그리워할 것입니다.
그대를 잊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안에 간직하기 위해서.
또 더 이상 아파해야 할 것이 없어질 때까지
그대와 함께한 추억을 샅샅이 끄집어내어
상처받을 것입니다.
사랑을 원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아픔에 무감각해지기 위해서.
-- < 잊기 위해서가 아니라>전문
--- p.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