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테니얼 경이 그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삽화들이 불현듯 살아 움직이며 눈앞에 펑 나타나는 바람
에 출발은 무산되었다. 직립보행하는 거북이. 물고기와 개구리 시종들. 화려한 재킷 소매 한 짝으로 장식한 도도새, 끔찍한 공작부인과 요리사, 그리고 앨리스까지. 앨리스는 참 보기 딱하게도, 홍차가 나오지 않는 끝없는 티파티를 우울하게 주관하고 있었다. 나는 이 느닷없는 환각의 폭격이 저절로 생겨났는지, 아니면 드림인의 간판이 발산하는 강력한 자기장 때문인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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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스트라토캐스터 전자기타의 줄을 한창 뜯고 있을 때 문득 지저분한 포니테일 머리의 남자가 허리를 굽히더니 내 부츠에 토했다. 2015년의 마지막 신음, 뿜어진 토사물이 새해의 문을 열었다. 좋은 징조일까, 나쁜 징조일까? 글쎄, 현재 이 세계가 처한 상황을 생각해보면 누가 그 차이를 구분할 수나 있을까?
--- p.16
우리의 첫 콘서트 날 아침, 레니 케이와 함께 마린카운티의 중환자실을 찾았다. 여기저기 호스를 꽂고 섬뜩한 침묵을 휘감은 혼수상태의 샌디. 우리는 침대 양옆에 서서 마음으로 그를 꼭 붙잡고 놓지 않겠다고, 모든 채널을 열어두고 어떤 신호라도 포착하고 수신하겠다고 약속했다. 샌디가 잘 쓰던 말대로, 사랑의 파편이 아니라 큰 잔에 그득그득 흘러넘치는 사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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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많은 진실과 수많은 세계가 있어, 간판은 경건하게 말했다.
- 그래, 나는 몹시 겸허한 마음이 되었다. 그리고 네가 옳았어. 나는 꿈을 꿨어, 수많은 꿈을, 그 꿈들은 단순한 꿈 이상이었어. 마음의 새벽에서 발원한 것만 같았지. 그래, 나는 분명히 꿈을 꾸었어.
간판은 아주 조용해졌다. 야자수들도 더는 휘어지지 않았고 달콤한 침묵이 언덕을 감쌌다.
--- p.36~37
샌디 펄먼은 지금 의식을 잃고 마린카운티의 중환자실에 있다. 샘 셰퍼드는 서서히 쇠락하는 질병의 단계들을 넘어가고 있다. 나는 복수의 방향으로 작용하는 우주의 인력을 느꼈고, 특수한 힘의 장場이 또 다른 장을 감싸고 있는 게 아닐까 궁금해졌다. 그 장의 중심에는 작은 과수원이 있어, 측정할 수 없는 핵심을 품은 과실이 묵직하게 매달려 있는 건 아닐까.
--- p.39
- 아예 꿈이 아닌 꿈들도 있어요. 그냥 각도를 달리한 물리적 현실이지요.
- 그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내가 물었다.
- 꿈은 말이죠, 어니스트는 말했다. 완전히 독창적인 방식으로 등식이 풀리게 돼요. 바람을 받아 빨래가 빳빳해지고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들이 등을 돌리고 나타나는 식으로 말이지요.
--- p.54
그러나 생각해보면 결국 만물은 변한다. 세상의 이치다. 죽음과 부활의 순환, 그러나 언제나 우리가 상상한 방식으로 일어나는 건 아니다. 이를테면, 우리는 죽을 때 입을 리 없는 옷을 입고 전혀 다른 모습으로 부활할 수도 있다.
--- p.59
그날의 오후는 저녁으로 녹아내렸다. 거의 다 차오른 달이 떠올라 내 몸가짐에 영향을 미쳤다. 야트막한 시멘트 벽에 걸터앉아 저 멀리 WOW카페의 불빛이 꺼지는 광경을 보았다. 대답이라도 하듯이 아득하고 영원한 별들이 하나씩 떴다. 불현듯 꼭 샌디와 함께 병원에 머물러야 할 필요는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이십 년 동안 우리는 극과 극의 해안에 살면서 4800여 킬로미터를 초월할 수 있는 마음의 힘을 믿으며 채널을 열어두지 않았던가. 굳이 달라져야 할 이유가 있을까? 나는 어디에 있든 그를 살필 수 있다. 다른 유의 자장가를 작곡하면서. 잠에 침투할 수 있는 자장가, 그리하여 그를 깨울 수 있는 자장가를 작곡하면서.
--- p.64~65
돈을 테이블에 놓고 나왔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워치캡을 썼다. 벽화를 지나치며 유태인 바이올리니스트에게 고개를 까닥여 인사했다. 붙잡아도 친구들이 하나씩 떠나버리는, 차마 말할 수 없는 두려움을 함께 나누는 사이로서.
--- p.76
몇 킬로미터를 걸은 느낌이었지만 모든 건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듯 보였다. 엄청나게 많이 걸었다고 확신했지만 아무 진전도 없었다. 속도를 냈다가 속도를 늦추기도 해봤다. 그러면 나 자신과 충돌해 순환이 깨어지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그런 행운은 없었다. 긴 사막의 파노라마는 계속 자가 조정을 거쳤고 새로운 화면은 그 자체로 순환했다.
--- p.101
- 사람은 모두 죽어, 샘은 서서히 힘을 잃어가는 손을 내려다보며 그런 말을 했었지만, 난 차마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내 삶을 살았으니까.
--- p.122~124
저녁 식사를 하고서 나는 밖으로 나가 현관 계단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다. 달은 이울고 있는 초승달로 샘의 엄지와 검지 사이에 있는 문신 같았다. 일종의 마법이지, 나는 속삭였다. 다른 무엇보다도 간절한 염원에 가깝게.
--- p.127
페소아의 도시에서 나는 떠나지 못하고 머무르지만, 정확히 내가 뭘 하고 있다고 말할 수가 없다. 리스본은 길을 잃기에 좋은 도시다. 카페들에서 또 다른 공책에 글을 끼적거리며 맞는 아침들, 빈 페이지 한 장 한 장이 도피처를 제공하고, 펜은 유유히 믿음직하게 봉사한다. 나는 잘 자고, 꿈을 별로 꾸지 않고, 방해받지 않는 간주곡 안에 그저 존재한다. 어스름한 산책 길에 오래된 도시를 따라 흐르는 한 자락 음악이 우리 아버지의 낮고 울림이 있는 목소리를 떠올리게 한다. 그렇다, 〈리스본 안티구아(Lisbon Antigua)〉, 아버지가 좋아하던 노래다. 어렸을 때 제목이 무슨 뜻이냐고 아버지에게 물었던 기억이 있다. 아버지는 미소를 띠고 비밀이라고 했다.
--- p.142
내 작은 텔레비전을 켜고 조심스럽게 뉴스를 피한다.
화면에 금발의 오로르 클레망이 나와서 프랑스어로 뭐라고 속삭이며 아편 파이프를 채운다.
- 두 사람의 당신이 있어요, 그녀는 마틴 쉰에게 가까이 다가서며 말한다. 사람을 죽이는 당신과 죽이지 않는 당신.
- 두 사람의 당신이 있어요, 그녀는 프레임 밖으로 슬며시 빠져나오며 같은 대사를 되풀이한다. 세상을 걷는 당신과 꿈을 걷는 당신.
--- p.153
나는 우리가 부엌 식탁 앞 각자의 자리에서 뿌리를 내리는 상상을 한다. 양철 뚜껑이 덮인 각자의 통에 살면서, 잠에서 깨어 머리를 빼꼼 내밀고 커피와 땅콩버터 토스트 앞에 앉아 해가 뜨기를 기다리는 모습, 우리가 마치 혼자 있는 것처럼 선을 긋고, 함께 외롭지는 않되 각자가 혼자여서 서로 혼자됨의 아우라에 간섭하지 않는다.
--- p.163
‘죽은 자들의 날’이었다. 곁길마다 설탕으로 만든 해골들로 꾸며졌고 공중에는 어떤 퀴퀴한 광기가 걸려 있었다. 원숭이의 해에 벌어지는 선거에 내 예감은 좋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 모두가 말했다. 다수가 승리할 거야. 그렇지 않아, 나는 반박했다. 말 없는 자들이 결정하고 그들이 선거를 판가름할 거야, 투표하지 않는 사람들 말이야. 게다가 누가 그들을 탓할 수 있겠어? 전부 거짓말투성이인데, 이 쓰레기가 난무하는 오염된 선거에서?
--- p.187
그 밑에는 제단화의 절정인 〈신비한 어린양에 대한 경배〉가 있는데, 당시에 그림을 보고 혼절한 사람이 여럿이었다는 말이 전한다. 예술 작품을 통해 시각화된 신성한 신비. 승리하였으나 또한 금욕적인 어린양은 지상의 모든 시련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예언의 말씀과 같이 그 허리에서 뿜어 나오는 피가 성배로 흘러들고 있다. 갈증은 갈증이기를 멈추고 상처는 상처이기를 멈추리라, 예상했던 방식으로는 아니겠지만.
--- p.197
모두가 못 박인 듯 눈길을 떼지 못하고 지켜보았고, 세계 또한 배신하지 않는 우매함 속에 계속해서 빙글빙글 돌아갔다. 그리고 나는 원숭이가, 혼돈의 미러볼이, 그 위로 뛰어올라 돌연 춤을 추기 시작하는 광경을 보았다. 그리고 내 꿈속에서는 가슴이 무너져 복수심이라도 품은 듯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지만 나는 날씨를 의식하지 않고 우비도 없이 밖으로 나가 타임스스퀘어까지 걸어갔다.
--- p.207~208
- 있잖아요, 아메리카대륙에 세워진 가장 오래된 건물의 한 널판에 고대 영어로 새겨진 금언이 있어요. 여기는 탕헤르섬이다. 이곳이 사라지면, 우리도 사라지리라.
- 실제로 본 적이 있어요? 내가 물었다.
- 그런 건 눈으로 보는 게 아니에요. 중요한 것들이 모두 그렇듯 느끼는 거지요. 그런 것들은 도래하고, 꿈속으로 들어오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그는 수줍게 덧붙여 말했다. 당신은 지금 꿈을 꾸고 있잖아요.
--- p.222~223
그래도 나는 머지않아 무언가 멋진 일이 생길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어쩌면 내일. 연속되는 내일들을 모조리 다 지나고 오게 될 어느 내일에.
--- p.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