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논쟁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순전히 논쟁을 일으키기 위함은 아니며, 내 견해를 과신해서도 아니다. 논쟁을 일으키는 것은 이 책에 담긴 기본적인 확신, 즉 신앙은 원칙적으로 지극히 사적인 문제일 뿐만 아니라 지극히 공적인 문제라는 확신 때문이다. 교회의 건강과 궁극적인 성숙은 성직자와 평신도, 교회에 나오지 않는 대중이 공개적으로 밝히고 논의하는 몇 가지 문제들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보는 확신 또한 논쟁적이다.
--- p.7~8
종교 부흥이 다원주의 사회인 미국의 이념적, 종교적 뿌리를 드러낸 현상이라면, 개신교가 무비판적으로, 너무 쉽게 저 부흥을 후원했다면 그 부흥이 사그라든 지금 개신교는 살아남을 만한 신앙, 고결함, 체력, 유효성을 과연 갖고 있는가? 종교 부흥에서 비롯된 좌절, 실패, 혼돈 이후 이 사회에서 (저 종교 부흥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종교 부흥이 확장되는 데 기여한) 개신교는 개인의 삶이나 공적인 삶의 영역에서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무엇을 대변할 수 있을까? 종교 부흥에 앞서 자본화되고 대중화되고 상품화된 이단들을 너무나도 손쉽게, 무비판적으로 지지함으로써 개신교 교회들에 생긴 구멍은 무엇일까?
--- p.15.
전도라는 사명이 교회 밖이 아니라 교회 안을 향하고, 교회 생활의 핵심이 예배가 아니라 복음을 배우는 것이 되어버린 현상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전해야 할 곳은 세상과 그곳의 평범한 공간들이다. 회중은 하느님의 말씀을 공적으로 기념하고 찬미하기 위해, 달리 말하면 예배하기 위해 복음화된 이들의 모임이다. 저잣거리가 아닌 회중이 복음 전도의 대상이 될 때 세상과 예배당에는 입에 발린 말만 떠돌게 된다. 이러한 현실에서 성직자와 평신도의 관계는 모호하고 혼란스러우며 과민한 상태가 된다. 평신도는 암묵적으로 성직자를 자신과 마찬가지로 복음화되어야 할 존재로 취급하고, 성직자는 평신도를 암묵적으로 이교도 취급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황에서는 참된 복음화(전도)도, 예배도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그리고 성직자와 평신도들의 시선에서 세상은 사라진다.
--- p.61~62.
온전한 삶, 세상에서의 삶과 교회에서의 삶이 상호침투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표지다. 때때로 어떤 이들이 주장하듯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이라고 말하는 옷, 식생활, 개인 윤리 같은 외적인 모습은 표지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지닌 힘, 혹은 능력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점에 있다. 그리스도인은 교회에서 찬미하고 기념하는 하느님의 말씀이 이 세상에서, 이미 자신과 함께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은 현실주의자다. 그는 자신이 바라는 대로의 세상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바라본다. 그러한 세상을 보고 부끄러워하거나 회피하지 않는다. 현실을 얼버무리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세상으로부터 숨거나 현실을 부정하거나 위장하려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빛뿐만 아니라 어둠이 있음을 안다. 그리스도인은 전쟁과 질병, 가난, 고통, 탐욕, 증오가 있음을 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평화와 건강, 안전, 사랑과 용서가 있다는 것도 안다. 그리스도인이 알지 못하거나 두려워하거나 부인해야 하는 극단적인 인간 경험이란 없다.
--- p.94~95.
일상에 임한 하느님의 말씀, 세상에 임한 하느님의 말씀을 분별하는 은사를 받은 교회,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세상 가운데 세상을 섬길 수 있는 근본적인 자유를 지니고 있다. 하느님의 말씀이 모든 곳에 있기에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모든 곳에서 자유를 누린다. 세상이 기다리는 분이 이미 오셨으므로 누구도 그 자유를 제한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그 자유를 실현하는 것, 그 자유를 바탕으로 이미 성취된 세상을 섬기는 일은 사람들이 통념적으로 알고 있는 자선charity, 이른바 ‘선한 일’, 다른 사람을 돕는 일이 아니다. 이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이스트 할렘과 그 밖의 여러 지역에서 나는 많은 자선 단체를 봤다. 이스트 할렘에는 수많은 사회복지사, 자원봉사단체, 정부 기관이 활동하고 있다. 모두 진심으로 자녀 양육, 결혼 생활 상담, 구직활동 돕기, 비행과 탈선 예방, 재활 치료, 주택 지원, 세입자 보호 등 주민을 돕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나는 그들의 활동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증언과 섬김은 그러한 ‘선한 일’과 구별되어야 한다. 한 사람이 다른 누군가에게 ‘선한 일’을 한다는 생각이 지닌 가장 커다란 위험은 이웃과 마주한 가운데 어떠한 결단을 내릴지, 어떠한 행동을 할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그러한 생각이, 결국은 그러한 생각을 하는 자기가 하느님의 자리에 오른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위한 자신의 행동이 ‘선하다’는 주장은 사실상 자신의 행동이나 결정을 하느님이 어떻게 심판하실지 이미 알고 있다는 주장과 다를 바가 없다. 이는 교만이다.
--- p.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