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문화연구가 사실 하나의 정치적 기획, 즉 전후의 선진 자본주의 문화에 대한 하나의 분석방식으로 탄생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보면 문화연구의 출현이 독특한 정치적 집단인 신좌파의 탄생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두 운동이 아주 긴밀히 결합된 채 서로 나란히 진행되었다는 점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닙니다. 50년대 중반 신좌파, 특히 초기 형태의 신좌파는 정말로 상황이 달라지고 있고 이런 상황을 분석하는 데 자신들이 물려받은 이론적·분석적 도구의 상당수가 별로 효과적이지 않다는 것을 (마르크스주의자들을 포함한 전통적 좌파들과 달리) 인식하면서 사회의 성격에 대한 급진적 분석에 몰두했습니다.
--- p.31, 「1강 문화연구의 형성」 중에서
나는 구조주의와 보다 인간주의를 지향하는 문화주의 간의 차이를 일련의 치환으로 짧게 요약하면서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첫째, 인간 삶에 대한 프로메테우스적 개념에서 규칙적 개념으로의 치환. 둘째, 행위성과 의식의 영역에서 무의식의 영역으로의 치환. 셋째, 역사와 과정의 개념에서 체계와 구조의 개념으로의 치환. 마지막으로는 원인과 인과적 설명에 대한 관심에서 분류와 배치의 논리로의 치환입니다. 하지만 이외에도 주목할 만한 또 다른 치환들이 있습니다. 발화 주체의 치환입니다. 레비스트로스의 신화제작자, 즉 언어를 생산하고 이야기를 들려주고 문화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은 영감의 열매를 키우고 공유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아닙니다. 신화제작자는 자신이 다룰 수 있는 구조가 말하는 얘기를 듣습니다. 신화제작자는 이용할 수 있는 문화적 기구를 사용합니다. 그럴 때 신화 이야기하기는 주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주체 없는 과정의 문제입니다.
--- p.132, 「3강 구조주의」 중에서
오히려 토대, 혹은 다른 곳에서 ‘구조’라 정의된 것은 사회관계와 생산력의 결합입니다. 이것이 마르크스(나는 그가 계속해서 당혹스러워 하길 바랍니다)가 ‘경제적인 것’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범주와 관련하여 특정한 이론체계에서 일어나는 가장 큰 실수는 명칭들을 뒤섞어버린 데서 비롯됩니다. 경제적인 것의 이런 의미가 서구 세계의 자존심 센 경제학 교수들에게 인정받을 수 없으리라는 건 분명합니다. 마르크스가 사용한 ‘경제적인 것’은 이 용어가 가지는 더욱 좁고 기술적이며 분과학문적인 의미와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말은 같지만 그것들은 같은 게 아닙니다. 우리가 이런 혼동을 마르크스 자신의 정식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 용어의 두 가지 의미역은 같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토대와 상부구조 모델에 어떤 식으로 대응하더라도 인간사회의 유물론적 토대와 오늘날 우리가 경제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을 구분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 p.143, 「4강 토대/상부구조 모델의 새로운 고찰」 중에서
알튀세르가 제안한 또 다른 일반적 진전은 그가 나로 하여금 ‘차이’ 속에서 ‘차이’와 더불어 살 수 있게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알튀세르가 마르크스주의의 일원론적 개념과 단절한 것은 차이의 이론화, 즉 다양한 기원을 가진 다양한 사회적 모순이 있다는 인식을 갖게 하고, 나아가서 역사적 과정을 추동하는 모순들이 항상 동일한 장소에서 출현하는 것도, 항상 동일한 역사적 효과를 갖는 것도 아니라는 인식을 갖게 합니다. 우리는 다양한 모순 간의 접합, 그런 모순들이 움직이는 다양한 특수성과 시간적 지속들, 그리고 그런 모순들이 기능하는 다양한 양식에 관해 생각해야 합니다.
--- p.207, 「5강 마르크스주의적 구조주의」 중에서
이데올로기들은 단수적인 관념을 통해 기능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담론적 연쇄, 의미 다발, 의미의 장, 그리고 담론구성체 안에서 움직입니다. 이데올로기의 장에 들어가 마딧점을 이루는 재현이나 관념을 선택하면, 그것은 즉각 함축적 연상의 망 전체를 촉발하게 됩니다. 이데올로기적 재현은 서로를 함축-소환-합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사회구성체에서도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체계들과 논리들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단일한 지배 이데올로기와 단일한 종속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은 발달된 현대사회에서의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담론과 구성체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재현하는 데는 부적절한 방법입니다.
--- p.237, 「6강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투쟁」 중에서
좌파는 ‘선’과 ‘악’의 차이가 정의되는 공간에 대해선 별로 얘기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사회주의적 도덕성의 언어를 구축하려고 시도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따라서 이 공간은 종교적·도덕적 기업가들이나 교회와 도덕적 다수파들에게 전적으로 맡겨지게 됩니다. 그람시에게 (사회적·정치적·지적 판단뿐 아니라) 도덕적 판단을-자신들의 용어와 언어, 일상생활에서-계산하는 필수적 능력을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일의 의미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특정 정치세력(예컨대, 좌파)이 자신이 반드시 참여해야 할 전선에 개입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할 뿐입니다. 따라서 헤게모니 정치를 구성하고자 하는 시도에서 문화의 장을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문화의 장을 들어가도 되고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변덕의 문제로 보거나 자유로이 들어갈 수도 있고 들어가지 않을 수도 있는 어떤 곳으로 생각하는 사고-은 어리석은 생각일 수 있습니다.
--- p.296, 「7강 지배와 헤게모니」 중에서
문화의 영역은 고유한 특수성, 양식, 사회구성체의 다른 심급들로부터의 상대적 자율성 및 독립성을 갖습니다. 이는 문화의 영역이 다른 심급들의 구조적 영향력 밖에 있다거나, 그것이 존재의 조건으로서 문화적인 것 외의 사회적 실천 및 관계의 형식을 갖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문화는 사회구성체에 형태와 패턴, 배치를 제공하는 중심적 모순들, 즉 계급, 종족, 젠더를 둘러싼 모순들로 구조화된 장의 외부에 있지 않고 결코 있을 수도 없습니다. 한편, 문화는 이 모순들 밖에 있지 않지만 이 모순들로 환원할 수도 없습니다.
--- p.307, 「8강 문화, 저항, 그리고 투쟁」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