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또 계속된 기술 성장과 기계의 확장 능력에 시장과 안보를 접목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을 망치는 행보다. 우리가 점점 더 의존하고 있는 여러 기술은 인간이 열등한 소모성 존재라는 가정하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회를 확장하는 것에서 사회를 파괴하는 것으로 전환되는 속도가 유례없이 빠르다 보니 우리에게는 이번이 그 전환 과정을 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이 과정을 이해하고 나면 농경과 교육에서부터 통화와 민주주의에 이르기까지 역사상 수많은 전환 과정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보일 것이다.
지금 우리는 한 세대 내에서 이 전환이 일어나는 것을 실시간으로 경험하고 있다. 이번이 우리에게는 기회다. 더 이상 이런 전환 과정에 순응하지 않고 거기에 반대하는 선택을 하면 된다.
이제 인간의 어젠다를 다시 점검할 때다. 이는 우리가 다 함께 추진해야 할 과제다. 지금까지 우리는 스스로가 개별 플레이어라고 생각해 왔지만, 사실 우리는 한 팀이다. ‘인간’이라는 팀, ‘팀 휴먼(Team Human)’ 말이다.
--- p.17~18, 「1장 팀 휴먼」 중에서
정신 건강은 흔히 ‘자율성을 확장하면서도 타인과 이질감 없이 어울릴 수 있는 능력’이라고 정의된다. 이 말은 나의 행동을 좌우하는 것은 내면이지만 기본적으로는 우리가 세상과의 조화로운 교류를 지향한다는 뜻이다. 우리의 동기는 내면에 있을지 몰라도 우리의 모든 활동은 더 큰 사회 환경과 관계를 맺으며 일어난다. 타인과의 관계가 아니면 우리는 자율성을 표현할 길이 없다.
만약 우리가 상호 의존성이 없는 자율을 가지려고 하면, 우리는 고립이나 자아도취에 빠진다. 자율이 없이 상호 의존만 한다면, 정신적 성장이 저해된다. 건강한 사람들은 이 두 가지 필수 요소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줄 알거나, 혹은 이 둘을 결합시킬 수 있는 사회 집단 속에서 살아간다.
--- p.37~38, 「2장 사회적 동물」 중에서
식물은 에너지를 지배하고, 동물은 공간을 지배하고, 인간은 시간을 지배한다면, 네트워크로 연결된 알고리즘은 무엇을 지배할까? 그것들은 ‘우리'를 지배한다. 사물인터넷에서 ‘사물’은 우리 ‘사람들’이다.
알고리즘의 프로그래밍은 모든 사람, 모든 사물을 도구화된 목적을 향해 몰고 가려는데, 자율이나 사회 계약, 학습과 같은 인간의 이상들은 그런 방정식을 벗어난다. 디지털 환경 속 인간들은 기계처럼 되어 버린 반면, 디지털 물질로 이루어진 것들, 즉 알고리즘은 살아 있는 존재처럼 되어 버렸다. 알고리즘들은 마치 진화의 단계에서 우리의 후계자라도 되는 양 행동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가 알고리즘의 행동을 흉내 내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 p.114, 「5. 디지털 미디어 환경」 중에서
우리는 모든 문제에는 답이 있고 모든 시작에는 끝이 있기를 기대하는 훈련을 해 왔다. 우리는 마무리와 해결을 바란다. 참을성은 점점 더 줄어들었고, 쉽게 답이 보이지 않으면 낙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는 자본주의와 소비지상주의에 더욱 불을 지핀다. 자본주의와 소비지상주의는 주식시장이 한 번만 더 오르고 제품을 하나만 더 구매하면 만족할 수 있을 거라고 사람들이 믿을 때만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한 나라에 동기를 부여하기에도 좋다. 10년 안에 달에 사람을 보내고, 다른 나라와 전쟁을 벌이자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사고방식은 우리가 길고 어려운 문제와 싸워야 할 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기후 변화와 난민 위기, 테러 공격에 손쉬운 해결책이란 없다. 문제가 과연 해결됐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꽂을 깃발도 없고, 투항 조건도 없는데 말이다. 한 사회가 답이 정해져 있지 않은 여러 난관에 대처하도록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접근법 역시 폭넓은 가능성을 인정하면서 가야 한다. 클라이맥스를 향해 치달으려는 우리의 충동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미해결 상황도 감당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십분 활용해야 한다. 그러려면 살아 있는 인간이 필요하다.
--- p.202~203, 「9장 역설에서 경외로」 중에서
환경보호론자들은 종종 인간이 문젯거리인 듯 말할 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문젯거리가 아니다. 인간은 지구에 암과 같은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의지를 가진 존재이고, 우리의 기분에 따라 자연환경을 바꿀 수 있고, 우리를 위협하는 것을 지배하려는 성향이 있다는 사실도 무시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만들어 낸 치명적 위협에도 똑같이 과감하게 문제 해결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전 세계를 위협할 재앙에 대비할 수 있다면, 그런 재앙을 막기 위한 일도 할 수 있다. 분산형 에너지 생산, 공정한 자원 경영, 지역 협동조합 개발 등은 재앙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재앙을 가져올 수 있는 긴장 상황을 줄이는 데도 도움이 된다.
지금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식의 낙천주의를 버릴 때가 아니라, 세계 지배보다 더 높은 우선순위를 향해 그 방향을 돌려야 할 때다.
--- p.254, 「11. 자연과학」 중에서
우리는 인간의 위치에 대한 생각을 옮겨 가는 중이다. 옛날 르네상스가 우리를 ‘부족’에서 ‘개인’으로 옮겨 왔다면, 지금의 르네상스는 개인주의에서 또 다른 무언가로 우리를 데려가고 있다. 우리는 과거에 무의식 상태로 형성된 공동체보다 더 다차원적이고 참여적인 집단 감수성을 발견하는 중이다.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개인주의라는 중간 단계를 통과해야만 했다.
아이는 부모와 떨어지는 법을 배우고 자기 주도형 개인으로 경험해야만 타인과 교감하고 의미 있는 관계를 맺거나 친밀성을 키울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처음에는 배경에서 밖으로 나와 전경이 되는 과정이 필요했다. 모두가 각자 자신만의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야 했다. 이는 한 차원의 도약이었다. 하나의 큰 물방울에서 나와, 교차하는 여러 정체성을 가진 개별 물방울이 되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또 한 번의 도약이 필요하다.
--- p.284, 「12. 현재진행형 르네상스」 중에서
우리가 뚝뚝 떨어져 있는 개인들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서로 공유하고, 유대감을 느끼고, 서로에게 배우고, 심지어 서로를 치유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인간은 모두 동일한 집단 신경 체계의 일부다. 이는 종교적 신념이 아니라 생물학적 ‘팩트’(fact)다.
우리는 아무리 원한다고 해도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 우리가 치유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방법뿐이다.
--- p.311, 「14. 혼자가 아니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