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부터 ‘정치’라는 바다에 뛰어들어 ‘민주주의호號’라는 이름의 배를 타고 항해해 나갈 것이다. 정치는 매우 일상적으로 접하는 단어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익숙한 개념인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정치가 무엇인지,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부터 차근차근 살펴보며 정치라는 바다의 해도를 그려보아야 물길을 잃지 않고 항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치는 과연 왜, 어떤 과정을 거쳐 출현한 것일까. 정치의 출현을 설명하는 이론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정치가 특정한 목적을 이뤄내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목적론’이고, 다른 하나는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정치가 어떤 필요에 의해서 생겨났으며 그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가를 집중해 설명하는 ‘현실주의 이론’이다.
--- p.7~8, 「프롤로그」 중에서
민주주의는 갈등을 규칙과 과정에 의해 규제하고 처리한다. 하지만 갈등이 ‘궁극적으로, 완전히’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갈등은 다만 정해진 기간 동안 시민들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잠정적으로 중단되는 것이다. 이렇듯 갈등을 잠정적으로 중단시킴으로써 평화를 유지시키는 비밀병기가 바로 투표용지라는 ‘종이 돌paper stone’이다.
--- p.32, 「1장」 중에서
아테네 민주주의와 로마 공화주의는 차이점이 있지만, 두 체제가 공통적으로 받아들인 전제가 있다. 인간은 정치결사체에 참여해야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하고 윤리적 개인을 완성할 수 있는 ‘정치적 동물’이라는 가정이다. 아테네 민주주의가 상정했던 ‘선한 시민이 되어야 선한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선한 인간=선한 시민’의 공식을 로마 공화제도 공유한 것이다. 로마 시민들은 “로마 시민이 된다는 것은 최고의 영예다”라며 시민 공화주의에 대해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 p.60, 「2장」 중에서
대의민주주의는 아테네의 고전적 직접 민주주의를 모방한 것이 아니고 근대 시민들이 새롭게 발명한 민주주의다. 선거라는 수단을 통해서 시민들의 집단의사를 확인하고, 시민들의 대표를 통해 그 집단의사를 간접적으로 실현하려는 제도로, 18세기 이래 최고의 정치제도 혁신이었다. 아니, 18세기뿐 아니라 지난 천 년(1000~1999) 사이에 일어난 가장 빛나는 민주주의의 제도적 혁신이다.
--- p.74~75, 「2장」 중에서
자유민주주의는 18세기 경제적 신흥 지배계급으로 떠오른 부르주아지와 함께 발전했다. 이들은 부를 축적함에 따라 국가의 간섭과 개입으로부터 벗어나 생명, 재산, 자유와 같은 기본적 시민권이 보장된 사적 영역을 확보했다. 영국의 커피하우스, 프랑스의 살롱, 독일의 견본시(상품의 견본을 전시해서 판매를 촉진하는 시장)와 다과회 등이 그런 공간으로, 부르주아지들은 여기에서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를 이용해 문화적 토론을 하며 교양을 갖췄다.
--- p.88, 「3장」 중에서
포퓰리즘 사회에서는 서로 정치적 입장이 다른 파당 간에 분열이 심해지고 심지어 유혈적 대결까지 일어나 나라가 사실상의 내란 또는 내전상태가 될 수도 있다. 선진 민주주의라고 불리는 미국에서도 현재 그런 현상이 보이고 있다. 우익 기독교, 백인 인종주의자와 남성우월주의자와 같은 극우 포퓰리스트들이 해외 이주민이나 비기독교인, 여성 등 때문에 자신들이 경제침체기에 손해를 입었다고 분개하며 온라인 소통공간에서 막말을 퍼붓고 있다. 그리고 이런 보수주의자들의 분노를 이용해 정권을 잡은 것이 트럼프 대통령이었다. 트럼프주의자들은 기독교의 낙태 반대, 기득권자들의 총기소유권을 지지하며 보수 우파의 세력을 결집하고 있다.
--- p.125, 「4장」 중에서
헤테라키 민주주의는 수직적 위계질서에 바탕한 대의민주주의와, 수평적인 연계를 기반으로 삼는 소셜 미디어 민주주의가 결합된 민주주의다. 책임성을 갖춘 질서 있는 조직 원리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의민주주의적인 특성을 갖고 있는 한편 조직이 수평적이라는 점에서는 소셜 미디어 민주주의와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 한마디로 헤테라키 민주주의는 ‘힘이 실린 시민들이 질서 있게 통치하는’ 민주주의다.
--- p.142~143, 「5장」 중에서
현재 전 세계의 민주주의는 군사 쿠데타나 민간 독재자에 의해 민주주의가 전복되고 파괴됨으로써 일어나는 전통적 민주주의의 위기와 붕괴가 아니라, 투표를 통해 선출된 정부들이 민주주의를 점진적으로 퇴보시키는 위기에 처해있다. 이전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전례가 없는’ 민주주의의 위기다.
--- p.155, 「에필로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