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이를 드러내 놓고 말하고 싶어 하지 않지만, 완경은 어떤 ‘상실에 대한 사건’이다. 그것은 떠나 버림에 관한 것이다. 열감은 매번 내가 물리적 육체를 지닌 존재라는 것, 그리고 언젠가는 사라지고 말 필멸자라는 사실을 상기하게 한다. 열감이 나를 휩쓸고 가는 순간마다 정신은 스스로 그다지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진실을 깨닫도록 내몰린다. 내가 필멸하리라는 사실! 그것은 공포의 감각이다. 동시에 좀처럼 흔치 않은 기회를 제공해 주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 공포를 차분히 직면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한계에 대해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게 될 테니까.
뜨거운 열감과 불면이 얽혀 만들어 내는, 착잡하고 건조한 피로감은 어떤 진실을 느끼게 해 준다. 더 광범위한 감정을 포괄하는 흐름을 통해 이 세상을 더 큰 인지력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자아에 대해서도 더욱 첨예한 인식을 갖게 된다. 미네소타 대학교(University of Minnesota)에 설치된 ‘여성과 젠더 연구소(Center for Research on Women and Gender)’의 폴린 마키(Pauline Maki) 박사는 뜨거운 열감 현상의 예기하지 못한 부가 효과는 관대한 공감 능력의 확대라고 말했다. “뜨거운 열감은 당신 자신도 예상하지 못하게 찾아옵니다. 당신은 자신의 육체를 통제할 수 없음을 깨닫고, 이 점은 여성들로 하여금 같은 고통을 겪는 사람들에게 더 깊이 감정 이입하게 해 줍니다.”
[완경의] 열감은 화학적인 동시에 감정적이며, 과거와 현재의 좌절감을 한꺼번에 포괄한다. 그것은 또한 억눌린 자기표현이기도 하다. 그리어는 저서 『변화(e Change)』에서 완경기에 대해 우리가 가지는 부정적인 감정의 일부는 “여성의 분노 표현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우리 사회의 무지의 결과”라고 언급한다. 완경기를 겪는 여성들은 유례없이, 이전까지 계속 유지해 오던 정신적 자제력을 꺾고 본인의 감정을 솔직하게 쏟아 낸다.
자유가 눈앞에 다가와 있다. -육아와 가사 노동으로부터의 자유, 끊임없이 아름다워 보이기 위한 노력으로부터의 자유, 불쾌하게 힐끔대는 남성적 시선으로부터의 자유, 위험한 탈선을 부추기는 성적 욕구로부터의 자유. 그러나 우선 내 육체가 진화해야만 한다. 여자로서 나는 피와 살이 격동하는 변화를 겪는 데에 익숙하다. 사춘기를 지나오며 피부는 기름져졌고, 가슴은 앞으로 튀어나왔으며, 나 자신이 봐도 놀라울 만큼 팔다리 사이에서 검은 털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임신 마지막 달 동안 내 안의 생명체는 배 속 장기들 사이로 제 발가락 하나를 자주 밀어 넣고, 부풀어 오른 뱃가죽의 둥근 표면 위로 발바닥 형태가 도드라질 정도로 질질 끌기도 했다. 사춘기와 임신기라는 두 시기를 보내면서 나는 종종 혼란스럽고 얼떨떨하기도 했지만, 그 순간을 잘 견뎌 내면 확실한 보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성적 욕구는 월경과 함께 일어나고, 육체적 쾌락, 친밀감, 낭만적인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는 엉뚱한 변덕들이 이를 따른다. 출산은 모성의 총체적 변화를 가져다준다. 우리 뇌는 새로 등장한 자그마한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요구 사항으로 자기 삶을 재배치한다.
인생에 온전히 매진하게 하는 뚜렷한 지시 사항 없이 도래하는 것은 오직 완경뿐이다. 새로운 대상에 대한 집착과 책임감 따위는 아무것도 없으며, 그저 부정적인 감정만이 차오를 따름이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나이 든 여성들에게는 거의 공간을 내주지 않는 강압적 가부장제 문화가 만들어 낸 공허함이다. 직접 언급되지는 않지만 실로 무수한 방식을 통해 드러나는 메시지는 압도적으로 냉소적이며 허무하다. 당신은 이제 쓸모없으니, 이만 옆으로 물러나 달라고. 내적 공허함에 더해서 외적 투명화, 비가시화에도 맞서 싸워야만 한다. 한 여자는 50세가 되고 나니, 날마다 조금씩 더욱 남들 눈에 띄지 않는 사람처럼 느껴진다고 내게 말했다.
동물이 된다는 것. 이것은 내가 야만적이거나 저열해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별로 복잡한 얘기가 아니다. 주의를 기울인다면, 우리 모두는 하루에도 수없이 동물이 된다. 성관계를 하거나 배변을 하거나 아기에게 수유를 하거나, 뛰고, 헤엄치고 먹고 혹은 완경기의 열감을 느낄 때도 말이다. 하지만 나는 동물적 자아와 함께 공허함 속에 고요히 앉아 있기가 어려웠다. 나는 몇 분마다 전화기를 들여다보거나 모닝커피에 넣을 두유가 충분히 있는지 확인하거나, 페이스북(Facebook)에 올린 고양이 사진을 몇 사람이나 좋아해 주었는지 보고 싶었다.
고속 도로를 타고 가다 보면 군데군데 너부러진 동물 사체를 볼 때가 있다. 칠흑 같은 피 웅덩이 속의 털 뭉치를 보노라면 동물들의 죽음이 더욱 실감 나고 서늘하게 다가온다. 완경은 속박된 인간의 조건과 죽음에 대한 감각을 강렬하게 환기시키며, 내가 오랫동안 부인하려고 애써 왔던 내면의 깊은 두려움을 폭로한다.
어떤 과학자들은 난소 안에 든 난자의 수가 일정 기준 이하로 낮아지면 완경 증상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다른 과학자들은 애당초 특정 시점에서 난자의 성숙이 갑자기 중단되고 호르몬 수치가 줄어드는 이유를 밝혀내지 못했음을 시인한다. 호르몬이 없어지면서 내 신체는 다시 변화를 겪는다. 넘쳐흐르는 에스트로겐 속에서 초경을 했던 예전 사춘기 때처럼 말이다. 여성의 월경 또는 정혈이 우리 문화권 내에서 여전히 다소 부정적으로 여겨지지만 -월경 중인 여성은 ‘성질이 나 있다’거나 급격한 호르몬 변동 탓에 ‘불안정한 상태’로 간주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임기는 여성의 일생 중 가장 본질적이며 중요한 시기로 인정된다.
이와 대조적으로 완경은 무가치하다고 폄하되며, 심지어 수치스러운 일로 여겨지기도 한다. 여자의 일생에서 유년기, 사춘기, 혹은 성인기를 없애 버려야 한다고 제안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직 완경만이 의료적 치료의 대상, 혹은 마땅히 정상화되어야 하는 문제, 완벽하게 폐기되어야 하는 시기로 생각된다.
내가 느낀 불편한 감정의 원인은, 호르몬 요법 자체보다 저자들의 어조나 방향성에 있었다는 사실을 결국 깨닫게 되었다. 각각의 책은, 어느 순종적이고 고분고분한 개가 배를 까뒤집고 강하고 우월한 인간에게 급소까지 내보이는 상황을 각자의 관점으로 풀어낸 격이었다. 우리 문화가 강력하게 뒷받침해 주는 순응적이고 나긋나긋하며 성적으로 대상화되는 여성성의 다양한 변주에 홀딱 넘어간 채, 이 저자들은 육체성과 창의성의 가치가 오직 젊음을 통해서만 유효하게 판단되고 있음을 재고하려 하지 않는다. 또 우리 전 생애에 포함된 모든 변화의 단계 속 성장의 책임을 받아들이려 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그동안 사회적으로 함구되어 왔던 주제에 대해 침묵을 깨고 혁명적 진리를 제시하는 양 가장하지만, 실상 특정 기업의 관계자들에게 주된 이득을 돌리면서 여성의 생식 가능한 시기만을 중요하게 강조한다. 다른 무엇보다 ‘에스트로겐 대체 호르몬 산업’ 자체를 위한 프로파간다를 퍼뜨리는 것이다. 그들은 중학교 시절에 숱하게 마주치던 여자 동급생 같은 인상을 준다. 당신이 친구들 사이에서 적응하기 어색해함을 뻔히 알면서도, 당신만의 고유한 개성을 인정해 주고 지지해 주기는커녕 화장법이나 머리를 손질하고, 살 빼는 방법 따위를 일러 주며, 여성성이라는 뻣뻣한 굴레로 들어오라고 부추기는 사람 말이다.
완경기의 육체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종종 잔혹해진다. 말라비틀어진 보지, 쭈그렁 할망구 같은 저열한 표현도 심심찮게 오간다. 윌슨이나 슈워츠처럼 호르몬 요법만이 유일한 해결책인 양 엄포를 놓는 의사들은 우리를 거세된 사람들, 중성화된 인류, 노상 변사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인터넷은 완경기 증상들을 가장 악의적인 방식으로 끝도 없이 늘어놓는다. 축 처지는 피부, 시들어 쭈글쭈글해진 질 내벽, 낡아 빠진 난소들. 이 목록은 허물없이 친근하면서도 냉담하기 이를 데 없는 어조로 쓰여 있는데, 마치 점점 나이 들어 가는 생명체를 관찰하고 기록해 두는 과학자의 일지 같다. 이처럼 제기되는 증상들을 솔직한 태도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실제 내게 일어나는 증상들을 감춰 봤자 아무런 이득도 없다. 나도 눈이 있으니까. 내가 봐도 몸에는 전에 없던 뱃살이 생겼고, 허벅지에 군살이 붙어서 무거워졌고, 음모에도 회색 가닥이 돋아나 있다. 입가에 잡히는 주름들은 더 깊어졌고, 완전히 피곤할 때만 생기던 눈두덩의 어두운 그늘도 항상 자리하고 있는 듯 보인다. 나는 언제나 조금씩 피로에 지쳐 있고, 약간 거친 태도를 드러낸다. 나는 물론 진실을 원한다. 그러나 이처럼 부정적인 것들만 무한히 추가되어 가는 목록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기운을 북돋워 주지도 못한다.
많은 여자들처럼, 나는 완경기 이전의 삶 대부분을 분노보다는 슬픔 속에서 보냈다. 나는 분노를 꾹 눌러 압축하면서, 내게는 그런 감정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설득할 수 있을 때까지 속으로 분노를 짓눌렀다. 자신을 쪼개고 또 쪼개서, 얇고 투명해서 속이 다 비치는 존재가 될 때까지 막무가내로 밀어붙였다. 그것은 마치 스스로를 높은 곳에서 무심하게 세상만사를 내려다보는 초월적 존재인 양 상정하고, 개별적 자아가 없는 듯 행동하는 것과 비슷했다. 유령처럼, 무게감 없이 몽롱하게 부유하는 존재가 되는 것. “여자가 분노를 터뜨리지 않으려면,” 심리 치료사 메리 밸런티스(Mary Valentis)는 이렇게 쓰고 있다. “여자는 모든 감정에 무감각해져야 할 것이다.”
우리 문화가 전반적으로 얼마나 여성의 분노 표출을 불편하게 받아들이며, 화내는 행동은 숙녀답지 않다는 말을 얼마나 많이 듣는지, 분노가 얼마나 비여성적이며 심지어 여성을 비인간적 존재로 치부하게 하는지, 불평등한 관점을 강조한다. 분노하는 여자들은 대단히 위협적인 대상으로 간주되었다. 역사적으로 분노한 여자들은 악마에게 홀렸다는 비난을 받고 처형당했다. 화가 난 남자는 그냥 남자일 뿐이다. 반면 화가 난 여자는 낙인찍히고 편견 어린 관념으로 정형화된다. 강짜를 부리는 아내, 미치광이 전 여자 친구, 페미나치. 나는 분노의 감정을 스스로 두려워한 나머지, 표출 여부뿐 아니라 그런 감정의 존재를 의식하는 것까지도 억지로 통제하려는 여성들을 보면서 나의 모습을 발견한다.
나는 완경이, 바로 진정성에 대한 요구를 환기해 준다고 주장한다. 최소한 부분적으로나마 성생활부터 뒤흔들고 재정비하면서, 삶의 기만적인 부분들을 근절해 나가야 할 필요성이 대두하는 것이다. “나이 든 여자는,”시몬 드 보부아르는 이렇게 쓰고 있다. “자신이 성적으로 물화되는 것이 중단되는 순간을 아주 잘 감지해 낸다. 자신의 육체에 더는 남자들을 위한 신선한 포상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과거와 경험이 어떻게든 그를 에로틱한 사물이 아닌 한 인간으로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그는 오직 자신만을 위해 열심히 싸워 왔고, 사랑했고, 의지를 다졌고, 고통받았고, 즐거움을 발견했다. 여성이 쟁취하는 이러한 독립성은 남성과 그 사회에 어마어마하게 위협적이다.”
회의장에 모인 의사들은 이른바 전문가들이다. 그들은 무엇이 내게 최선임을 알고 있어야만 한다. 나는 그들을 믿고 싶다. 하지만 나는 지금 질에 장애가 있다고, 정상이 아니라고, 그래서 즉각적인 약물 치료와 레이저 시술이 필요하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진화의 결정에 의해 생식 기간이 끝났고, 따라서 내 몸은 변화하고 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이 사실 자체가 제대로 인식되지 않고 있다. 그 대신 의료계는 내 몸을 결함이 있는 존재로, 고쳐야 할 대상으로 바라본다. 나는 허벅지의 늘어진 피부와, 손에 잡히는 뱃살과, 정맥이 울퉁불퉁하게 도드라진 발을 내려다봤다. 그들은 내가 나이 들어 가는 몸을 스스로 아끼고 사랑하기 위해 얼마나 힘겹게 노력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 자기 신체에 대한 혐오감을 물리치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노력해야 했는지? “나는 하나의 몸이었다,” 록산 게이는 저서 『헝거(Hunger)』에서 이렇게 쓴다. “언제나 수리가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몸이었는데, 사실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전적으로 인간적인 몸을 지닌 채 살아가고 있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