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기 시인은 질풍노도의 바다 위에서 세상을 향해 솟구치는 휘황찬란한 시어(?魚/詩語)를 잡기 위해 후릿그물을 당기는 호기를 부리지 않는다. 바다와 독대하는 시인의 품성은 겸손하고 바다를 품는 그의 언어는 질박하다. 시인은 오늘도 먼 바다에서 떠밀려온 이름 없는 것들, 낮은 목소리로 옹알거리는 “가장 추운 말”(「서쪽의 말」)을 줍는다. 바다가 타전하는 삶의 암호를 해독하기 위해 서해 낙도와 무인도를 서성거리는 것이다. 그렇다. 이세기 시인은 ‘바닷가의 수도사’다. 세상의 풍파와 생의 비애를 참고 견딘 벌거벗은 모래알 속에서 “시린 뼈로 빛나”(「언리 해변」)는 삶의 근간을 묵상하는 행자다. 그런데 이세기 시인은 뜻밖의 운명과 조우한다. 시인은 해변에서 ‘유리병 편지’를 발견한 것이다. 이는 오래전 시인이 자신에게 부친 내밀한 비망록이다. 이 편지에는 서해 소도의 아름다운 풍경, 심청전 설화, 유년의 가족사, 조락한 어촌의 실상, 섬사람들의 애환, 남북한 분단의 상처가 기록되어 있다. 섬에서 태어나고 자란 시인의 매일매일이 축적된 유리병에서 아버지의 입 냄새, 비릿한 몸내음, 미역줄기와 파래 냄새, 머굿대 볶는 냄새, 곤쟁이 냄새, 물메기 냄새가 피어오른다. 심장 깊숙이 이 모든 냄새를 들이마신 후, 시인은 다시 병을 봉인해 바다로 편지를 띄운다. 요컨대 이세기 시인에게 시 쓰기란 절해고도에서 발송한 투병통신(投甁通信)이다. 과연 누가 이 수취인불명의 유리병 편지를 읽는 지복을 누릴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