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을 치고 지나가는 빛의 휘장
오로라는 빛의 현상에 불과한데, 그 빛의 휘장은 왜 영혼을 치고 지나가는 걸까.
여기 한밤중 전화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 일어났을 때만 울리는 전화가 있다. 바로 ‘오로라 콜’이다.
전화를 기다리는 장소는 나의 방. 어쩌면 결코 오지 않을 것을 기다리는 것. 무의미한가? 올 것을 기다리는 것은 당연한 것.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기다릴 때만 시작되는 태도가 있다. “무엇을 알기 위해서 무엇이 되기 위해서/선잠에 들었다 깰 때/가져보지 못한 것을 그리워할 때(「오로라 콜」)” 그런 불가능이 가능해지는 태도가 열리는 순간 만나게 되는 질문이 있다.
“꽃의 줄기를 해부했던/생물학자들의 밤은 얼마나 고요했을까(「꽃이 죽었다는 것을 언제 알게 되나요」)”
“새하얗고 새까맣고 새빨간 문장이라는 게 있을까(「태초에 마음이 존재했다」)”
“그러니까 진짜 마지막을/그 순간을 알 수 있을까(「종로」)”
이 질문들을 관통하는 것은 ‘지금 나는(혹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이것을(존재하기, 쓰기, 죽기, 사랑하기) 수행하는가?’로 수렴될 수 있을 것이다. 알 수 없는 것들,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일. 또는 이미 다 틀렸다는 걸 알면서도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이미 포기했지만 다시 포기해야만 하는 잔디 같은 것들). 오로라 콜을 기다리는 자세와 닮은 질문들이다.
숙희의 시 속 여성은 근래 다른 시들에서는 보기 드문 여성의 욕망과 절망을 보여준다. 희미하고 무성적인 존재가 아닌, 냄새나고 생동감 있는 육신을 가진 여성성. 거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아기는 필요 없지./내가 도착할 곳은 부드러웠던 과거가 아니니까.(「이상형 이분법」)” “모든 착한 여자애들은 죽기 전에 지옥에 갔대(「지나가던 파랑이 검정을 흉내 내며 웃었지」)”라고 발화하는 마음은 어디서 도래했을까?
숙희의 언어에는 욕망이 드러나 있다. 비뚤어진 관계를 집요하게 들여다보는 시선은 마치 가시가 많은 거울 같다. 그 안에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우리’, ‘이미 하나인 순간에도 어긋나는 중인 우리’가 끝없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요원함과 절실함의 척추를 꼬아 지어진 허방의 집 같다. 발밑은 까마득하고 머리 위는 충분히 캄캄하지 않은 도중의 집. 그런 집에 기거하는 나의(혹은 연인의) 이야기. 같이 있을 때 오롯이 혼자가 될 수 있는 비극이 가진 환희의 이야기가 여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