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에서 올라와 수도권에서 사는 나는 햇수를 세어 보니 고향에서 산 날보다 이제 고향을 떠나 산 지가 더 오래되었다. 그동안 사투리를 고치기 위해 애를 썼는데 단어는 어찌어찌하여 고치게 되었으나 억양만큼은 아직 어쩌지 못하고 있다. 조심조심 이야기하고 있으나 술에 취하면 그 억양이 제대로 뻗어 나온다. 그 말과 그 억양이 아니면 표현할 수 없는 세계가 있다. 언어를 잃어버리면 사실 그때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표준어라고 일컬어지는 이방의 언어로는 「몽혼주사」의 석찬이 성도, 「혼불」의 풍경도 제대로 보여 줄 길이 없다. 그때의 사람들을 그려 보는 방법은 그때의 언어가 아니면 안 된다.
어디까지가 가족이냐고 물으면 나는 가족 그림을 그려 보라고 한다. 거기에 그릴 수 있는 사람까지가 가족이다. 아이들에게 그림을 부탁하면 할아버지, 할머니를 그리는 아이가 드물다. 그때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가족이었다. 동네 사는 형들도 가족이었다. 「연옥분」의 이야기를 읽으면 누군가의 죽음이 내 꿈과 연결되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게 연결된 사람은 수십 년간 만나지 못해도 가족이었다. 꿈속에 찾아온 성님을 보러 마침내 초상에 도착한 연옥분 씨가 업어 키우던 뱅도가 반백이 되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렇게 오래 떨어져 있어도 가족이었다. 상주보다 더 서러운 울음이 가족을 증명한다.
현대 사회는 가족의 범위가 좁아져서 내 가족은 나밖에 남지 않아서 우리가 외롭게 사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된다. 어떤 시집은 색다름을 불러일으킨다. 새로움에 중독된 우리는 우리가 지워 가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지낸다. 부끄러워서 내가 지우고 있었던 사투리로 시인은 그때를 완벽히 복원한다. 이 시집은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그리움을 들여다보고 싶은 사람에게 이 시집은 너무나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