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 본 사람이 쓴 시는 읽는 사람도 아프게 한다. 정솔 시인이 고백 하는 그가 살아온 세상은 “나비 숲이면서 나비 숲이 아닌/나비 세상 이면서 나비 세상이 아닌/나비들의 감옥”(「훨훨」)이었다. ‘온통 정지선 이 쳐진 세상’, “지지” “지지”(「지지」) 손사래를 치면서 외면해야 하는 것 들이 지천인 세상에서 시인의 날갯짓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물에 젖 은 나비의 가녀린 날개를 파닥여 나아가는 세상이라니….
시인은 또 자신이 살아온 방식이 “지는 연습”(「서바이벌리즘」)이었다고 고백한다. 지는 연습에 몰두한 나머지 집으로 돌아오면 “약봉지 같 은 허전함”(「슬하」)이 켜켜이 쌓여 갔으리라.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 허전함이, 지는 연습에서 획득한 패배감과 낭패가 암덩이를 떼어내 듯 시인에게서 시를 밀어내기 시작했으리라. 왜 모르겠는가.
다행히도 시인에게는 “아무리 흔들어도 떨어지지 않는 발자국”(「고비 사막」)이 있다. 또한 무서운 세상을 회피하지 않고 마주 응시하는 눈 빛이 있다. 암癌조차도 탐닉하는 앎에 대한 갈구가 있다. 시를 쓰지 않고 어떻게 배기랴! 이제 시인은 “지는 연습”을 끝내고 어떤 객체로 부터도 우위를 점하는 단단한 주체로 자신을 일으켜 세운다. ‘주체’ 가 된다는 것은 더 이상 “지지” “지지”하며 손사래를 치지 않아도 된 다는 것이다. 감옥을 빠져나온 나비가 되어 온갖 정지선을 넘어서 날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가 쓴 시 속에 갇혀 허우적거리지 않고 노를 저어 자기가 가고자 하는 곳으로 나아가는 시인을 만나는 일은 적잖이 반가운 일이다.
자, 그럼 “예상치 못한 비에//(······)//작은 손가방을 머리에 이고 달릴 까/비 올 적마다 사는 우산을 또 살까/궁리에 궁리를 더하다//빗속 으로 뛰어든다”(「궁리」) 시인을 따라 정솔 시인의 시집 『사막여우가 우 는 저녁』 속으로 뛰어들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