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한 책이 나왔다. 《지구와 물질의 철학》에서 릭 돌피언은 특유의 스타일과 리듬으로 그가 ‘지구철학’이라 부르는 유물론을 제시한다. 이 유물론의 기원에는 스피노자가 있다. 마치 지각이 약해진 기회를 틈타 터져 나오는 마그마처럼, 스피노자주의라는 거대하고도 은밀한 흐름이 기후위기, 팬데믹, 전쟁 등 우리 시대의 위기를 맞아 지구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분출한 것이다. 지표를 뚫고 나온 용암이 새로운 지형을 형성하듯, 지구철학은 신유물론, 포스트휴머니즘, 에코페미니즘 등 다양한 사상 운동과 교차하면서 새로운 사유를 자극하고 있다. 우리 시대의 지구적 위기로부터 사유를 시작하는 것, 인간과 비인간을 가로지르는 지구를 상상하는 것, 그리고 지구친화적인 삶의 형식을 상상하는 것이야말로 지구철학의 과제다. 이런 과제를 떠맡는 이들을 돌피언은 기하학자라고 부른다. 기하학자는 지구를 탈영토화하는 자, 다른 지구를 발명하는 자, 새로운 지구가 되는 자이다. 돌피언은 들뢰즈/가타리와 도나 해러웨이, 무라카미 하루키와 미셸 투르니에, 소설과 형이상학, 춤과 양자역학을 종횡무진하면서 ‘지구로 철학하기’가 무엇인지를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다. 난해한 주제들을 다채로운 사례와 밀도 높은 서술로 풀어나가는 돌피언의 솜씨는 놀랍다. 무엇보다도 《지구와 물질의 철학》은 유물론의 풍요로움을 경험할 수 있는 유익한 형이상학책이다. 지금 지구에 사는 사람들, 앞으로 다른 지구를 만들어 갈 사람들, 잠재적 기하학자들에게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