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온 뒤로 이문은 항상 초조했다. 이문의 부모는 많이 일하고 적게 버는 노동을 당연한 듯 평생 해온 사람들이었다. 이문의 이십대가 어떻게든 그들과 다른 미래를 만들고 싶어서 애쓴 시간이었다면 삼십대는 그들과 같은 미래라도 얻기 위해 애가 닳은 시기였다. 첫 직장에서 퇴직금도 못 받고 해고된 후로도 이문은 비슷한 규모의 사업장을 옮겨다니며 시키는 모든 일을 했지만 이
저 칸칸마다 농축된 어둠이 너무 짙었다. 이 작은 지옥 안에서 몇 년을 더 보내야 하는지, 보낼 수 있을지, 그러고 나면 자기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지 이문은 계산해보려고 했다. 정확히 알 수 있을 것 같다가도 모든 게 깜깜했다. 이문이 앉아 있는 이 칸에 쌓인 어둠만큼, 딱 그만큼은 확실한 것 같다가도 그마저 흐물흐물 풀어져 사라졌다.
개인적 저항의 언어가 사회적 무감각의 언어로 어떻게 전락하는지를 보여주고 -p.34 김기태, <진취적 시민을 위한 15분 읽기> - 삶의 효율성을 추구하는 ‘나‘의 연인이었던 ’그 애‘는 빠른 배송, 빠른 요약 등에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내며 ’굳이’라 말한다. 하지만 ‘그 애‘는 안전 장치 설치에 ’굳이‘ 우리가(?)라는 시각을 갖는 사측에 의해, 공장 근무 중 기계에 빨려들
노동자를 쉽게 자를 수 없는 조건을 갖춘 기업, 잃을 게 많아서 여론을 무서워하고 직원들을 어르고 달래야 하는 기업에 들어가고 싶었다. 그렇다고 내가 뭐 엄청나게 대단한 환경 을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저 총무과와 인사과가 따로 있는 정도 파티션으로 자리가 나뉘어 있고, 식대 카드 한 장을 여럿이 돌려 스지 않는 곳. 주기적으로 방문하는 청소 노동자가 있어 직원들이 직접 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