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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제1부 비문과 문학 연구 1. 비문의 문학적 가치 2. 형성기의 석비문·비지문 3. 석비문·비지문의 발전과 문체미학 4. 석비문·비지문의 자료적 가치 (1) 일문 보충과 생애 사실 보완 (2) 인물 행적의 발굴 (3) 역사·문화 해석의 심화 (4) 학맥 혹은 법맥의 확인 (5) 교감 자료의 확장 5. 금석학과 문학 연구 방법론 6. 『금석집첩』의 탁본 자료 〈부록〉 『금석집첩』 및 『금석속첩』 수록 탁본 2,081점 제2부 석비문·비지문 문체의 역사적 개관 1. 비문과 문체 2. 문언어법 산문의 석비문과 비지문 출현 (1) 고대 비문의 제행·산행 혼합 (2) 고대 비문의 문언어법 한문과 이두식 한문 혼용 (3) 지석의 단형 기서체 산문 (4) 매지권 형식의 잔존 3. 변문 투식 산문의 석비문과 비지문 (1) 「신라문무왕릉지비」 (2) 변문의 수용 (3) 사산비명 (4) 변문의 발달 4. 한국식(이두식) 한문의 비문 (1) 고대 비문의 이두식 한문 (2) 고려시대 비문의 이두식 한문 (3) 조선시대 한국식 한문의 활용 5. 비문의 용운 (1) 낙랑 비문의 용운 (2) 용운법의 수용 (3) 비명에서의 용운 중시 (4) 고려시대 압운 명(銘) 양식의 발달 (5) 조선시대 비명의 용운과 유희 6. 고려와 조선의 비문 구조 (1) 행문의 첨삭 (2) 대론의 제시 (3) 평어·명과 일화의 조응 (4) 전고와 기실의 균형 (5) 대화문의 활용 (6) 복합 구성 7. 유이민 지문과 신발굴 비문의 문체 (1) 유이민 지문의 문체 (2) 신발굴 비문의 문체 감정 〈부록〉 「광개토왕비」와 사산비명의 구법·평측 분석 제3부 석비문의 문체 1. 고려 이전의 순수비와 기적비 (1) 「영일냉수리신라비」 (2) 「울진봉평리신라비」 (3)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 (4) 「황초령신라진흥왕순수비」 2. 불교 관련 석비 3. 고려·조선의 기념비와 기적비 (1) 고려의 산천 제사비 (2) 고려 말·조선 초의 기적비 (3) 「동래남문비」와 「삼전도비」 (4) 왕실 사적비 (5) 태실비 (6) 「화성기적비」 (7) 민간의 기적비 4. 전승비와 토적비 (1) 고려 말·조선 초의 전승 기념비 (2) 임진왜란 이후 전승비 (3) 토적비 5. 사묘비, 고릉비, 묘정비 (1) 기자묘비 (2) 문묘비 (3) 고릉비(古陵碑) (4) 묘정비 (5) 공신비 (6) 표충비 (7) 유허비 (8) 시사단 비명 (9) 관왕묘비와 무후묘비 6. 영건수축기념비 (1) 축성비 (2) 교량비 (3) 대장각비 7. 정려비와 의열비 (1) 정려비 (2) 의열비 (3) 복수비 (4) 호성비 8. 선정비와 거사비 (1) 목민관 칭송 선정비 (2) 제언비 겸 혜민비 (3) 해운비와 조산비 (4) 간이형 선정비 (5) 명나라 장수 거사비 (6) 조사 거사비 (7) 향리를 위한 불망비 9. 영험비, 약조비, 시비 (1) 영험비 (2) 약조비 (3) 시비(詩碑) 제4부 비지문의 문체 1. 탑비와 석종비 (1) 신라와 고려 초 화상비 (2) 고려시대 탑비 (3) 고려 말 석종비 (4) 조선시대 탑비 2. 고려시대의 비지문 (1) 권력자의 묘지 (2) 여성 묘주의 묘지 (3) 요절자를 위한 묘지 (4) 자찬 묘지 3. 고려 말 신도비와 묘표 (1) 신도비 (2) 부모 묘표 (3) 사시묘표 4. 조선시대 국왕 및 왕족의 비지문 (1) 조선 초 산릉의 지석 (2) 능지 (3) 사친 추존 비지 (4) 왕족의 비지 (5) 국왕이 작성한 비지 5. 조선시대 사대부의 비지문 (1) 신도비 (2) 묘표 (3) 묘갈 (4) 묘지명 (5) 순절·거의인의 비지 (6) 무인의 비지 (7) 자찬 비지 6. 조선시대 요절자를 위한 비지문 (1) 망아의 묘표와 광지 (2) 요절자의 비지문 7. 조선시대 여성 묘주의 비지문 (1) 사대부 여성의 묘지 (2) 사대부 여성의 묘표와 묘갈 (3) 비빈·후궁의 신도비와 공주의 묘표 (4) 여대사 묘주의 비명 (5) 요절한 여성의 묘표 (6) 기생의 묘표 (7) 만시각자비(挽詩刻字碑) 8. 중인·서얼·군인·평민·내시·노비의 비지문 (1) 중인의 비지, 중인이 찬술한 비지 (2) 서얼의 비지, 서얼 문인이 찬술한 비지 (3) 군인의 묘비 (4) 평민의 묘비 (5) 내시의 비갈 (6) 노비의 묘표 제5부 비문의 문체미학과 정치 1. 비문의 찬술과 입비 (1) 비문 찬술과 입비 과정 (2) 비문 찬술의 자료 2. 비지문의 찬자 (1) 가족 및 친족의 입언자 (2) 친우와 지인 (3) 대작 3. 복수의 비지문 (1) 신도비문의 신찬 (2) 신도비문의 교체 (3) 후기와 추기 4. 비문 문체의 이론 (1) 이황의 비문 행장 공기론 (2) 송시열과 정호의 주빈 배치론 (3) 김창협의 비지 문체론 (4) 이광사의 순정구문무익론(循情求文無益論) (5) 박지원의 원방장단론(圓方長短論) 5. 비문의 문체와 정치 (1) 현창과 신원 (2) 생략 혹은 은폐 (3) 비문의 어휘 선택과 정치 (4) 묘주의 위상 변화와 일화 첨가 (5) 비지문의 기능 6. 비문의 서자 (1) 고대 비문의 서자 (2) 조선시대의 대표적 서자 (3) 집자비 7. 근현대 공간의 비문 맺는말 참고문헌 / 찾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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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중엽까지 석비는 순수비, 전승비(위령비 포함), 기적비(중수비·중흥비 포함), 탑기명비, 장경비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여기에 부도와 함께 세운 탑비 또한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는데, 이 탑비는 비지의 일종으로 분류하기로 한다. 석비의 찬술자는 사관과 같은 심경으로 사실을 엄정하게 보고하고자 했다. 조선의 김창협(金昌協, 1651~1708)은 비지(碑誌)는 해섬(該贍: 풍성하게 아우름)을 위주로 하는 사전(史傳)과 달리 간엄(簡嚴: 간략하고 엄정함)을 위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 근대의 임서(林?, 1852~1924)는 석비의 문체에 대해, 어휘가 순실하고 고고해야 하며, 음향의 결합이 굳세고 튀어 올라야 하며, 색조가 고아하고 소박해야 한다고 했다. 행문과 관련해서는, 긴 어구를 늘어놓아야 할 경우 짧은 어구로 끊고 허자를 덜 사용해야 응축적이고 묵중한 느낌을 준다고 했다. 이를테면, 한유(韓愈)의 「평회서비(平淮西碑)」와 「남해묘비(南海廟碑)」는 10여 자를 한 구로 한 예가 없다고 했다. (중략)
비지문은 후한 이후로 성행하기 시작해서 위·진남북조시대에는 북위에서 발달했으며, 위·진·수·당에서 널리 지어졌다. 지문은 본래 묘비의 글보다 간략했으나, 당·송의 문장가들이 전문적으로 제작하면서 묘비의 글과 마찬가지로 내용이 풍부하게 되었다. 즉, 비지문은 묘주의 성명·자호·관향·가계·선덕(先德)·출생·졸수(卒壽)·천분·자질·관력·행적·공적·학덕·품행·찬자·장일(葬日)·장지(葬地)·자손록 등을 기술하고 찬자의 평어, 세간의 평론을 첨부하는 방식이 발달했다. 또 이 내용을 바탕으로 운문으로 된 명(銘)을 붙여 결사(結詞)로 삼았다. 산문으로 기록한 서(序)와 글 전체를 운문으로 개괄한 명(銘)의 두 부분이 있을 때는 서를 ‘병서(幷序)’라고 했다. ---「제1부 비문과 문학 연구」중에서 일본 교토대학 부속도서관의 『금석집첩』은 탁본을 배접하여 책으로 만든 법첩(法帖)이다. 각 비문마다 잘라 붙인 항수(行數)와 항자수(行字數)가 균일하며, 대지(擡紙)를 배접하고 서배(書背)를 맞춘 것 또한 정교하다. 전액(篆額)은 한 글자마다 탁본하여 이어 붙였다. 문자의 크기가 큰 것은 탁본 끝을 책 중앙에 붙이고, 나머지를 안쪽으로 접어 두었다. 그리고 탁본을 1종에서부터 24종까지 모아 각각 책을 이루고, 조선시대 서적 장정법에 따라 제첨(題簽)을 따로 붙이지 않고 묵서(墨書)로 제명(題名)을 기재했다. 왕실에서는 능비(陵碑)를 세우면서 탁본도 같이 제작했는데, 상신(相臣)이나 부마(駙馬)의 신도비도 건립 때 탁본을 따로 제작한 듯하다. 탁본은 주로 건탁이나 습탁으로 제작했으며, 문자만 칠해 떠낸 선시탁(蟬翅拓)도 간혹 있다. 원탁(原拓)으로는 바탕에 두드린 자국이 남고 색깔이 옅을 경우, 글자를 제외한 바탕을 다시 먹으로 칠하는 오금탁(烏金拓)의 방법을 사용했다. 왕실에서는 오금탁을 한 후 종이와 비단을 덧대어 족자로 꾸며서 보관했는데, 문벌가에서도 같은 방법으로 탁본을 보관했을 듯하다. 그런데 『금석집첩』의 탁본은 원문을 판독하기 어려울 때, 해당 원문을 작성한 찬자의 문집을 열람하여 전사(塡寫)하거나 추기(追記)해 두기도 했다. 즉, 자(字)·사(詞)·행(行)에 걸쳐 백서(白書)한 예가 적지 않다. 간혹 주서(朱書)가 보이는데, 이것은 원탁에서 묻어난 듯하다. 자구를 보완할 때는 배접지 상단[천두(天頭)]이나 하단[지각(地脚)]에 적어 두기도 하고, 첨지에 묵서하기도 했으며, 탁본의 일부분을 뜯어내고 배접지에 직접 묵서하기도 했다. 『금석집첩』의 속편인 『금석속첩』에는 덧칠이나 보사가 없다. 일부 책자의 등[背]에는 ‘흠흠헌(欽欽軒)’이라고 묵서되어 있는데, 이것은 김재로의 헌호(軒號)로 추정된다. ---「제1부 비문과 문학 연구」중에서 삼국시대와 남북국시대의 석비 및 비지에 새겨진 비문은 비의 기능과 성격에 따라 문체가 상당히 다르다. 408년(광개토왕 18) 제작된 「덕흥리고분묘지」와 414년(장수왕 2) 건립된 「광개토왕비」, 고구려의 「중원고구려비」, 신라의 「단양신라적성비」와 4개의 진흥왕순수비 등은 문언어법의 한문 문체로 비문이 작성되어 있다. 하지만 「임신서기석」처럼 한국어 어순을 따른 한문 문체를 사용한 예나, 5세기경 「모두루묘지」처럼 이두 표기를 혼용한 한문 문체를 사용한 예도 병존했다. 이후 한국식 한자어나 이두어를 사용하고 한국어 어순의 한문 표기를 혼용한 한국식(이두식) 한문을 사용한 비문이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한문 문장은 같은 글자 수의 구끼리 규칙적으로 이어나가거나 교차시켜 나가기도 하고, 전혀 규칙적이지 않게 의도적으로 늘어놓거나 규칙 자체를 의식하지 않고 벌려놓기도 한다. 전자를 제행(齊行)이라 부르고 후자를 산행(散行)이라고 부른다. 제행 가운데는 두 구끼리 짝을 이루는 대우(對偶), 같은 형식의 3개 구 이상을 늘어놓는 유구(類句)도 있다. 4·4구나 4·6구를 늘어놓으면서 대우를 고려하고 평측을 교호시킨 문체가 변문(騈文)이다. 한문 문장의 일정한 위치에 운자(韻字)를 놓는 경우가 있는데, 제행은 물론 산행에도 압운(押韻)을 할 수 있다. ---「제2부 석비문·비지문 문체의 역사적 개관」중에서 「황초령신라진흥왕순수비」(이하 「황초령순수비」)는 선조 때 신립(申砬)이 탁본한 이후 인조 때 낭선군(朗善君) 이우(李?)가 『대동금석첩』에 탁본을 수록했다. 1790년(정조 4)에 유한돈(兪漢敦)이 비석을 발견하고, 1835년에는 권돈인(權敦仁), 1852년에 윤정현(尹定鉉)이 비석을 재발견했다. 이때까지 비석은 세 조각 가운데 일부의 파편만 알려져 있다가 1931년에 제3석이 발견되었다. 비분은 12행에 각 행 33자 정도가 새겨져 있다. 하지만 「황초령순수비」는 제1행의 윗부분이 떨어져 나가 건립 연대를 확정하기 어려우나, 비문의 내용이 「마운령신라진흥왕순수비」와 거의 같기 때문에 김정희의 고증 이후 진흥왕 29년(568) 건립이라고 추정한다. 진흥왕의 순수 사실을 기록한 제기(題記) 부분(제1행), 순수 경위를 기록한 기사(記事) 부분(제2행~제7행 제10자), 수행한 신료의 명단을 기록한 부분(제7행 제12자~제12행)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탁본 사진에서 확인되는 199자 가운데 16자는 판독이 불가능하다. 여기에는 운문의 명이 없다. (중략) 이 비문의 제7행 이하는 수행 인물의 부명·관등명·인명을 나열했다. 탁부(喙部)와 사탁부(沙喙部)의 제3관등 잡간(?干), 제5관등 대아간(大阿干), 제8관등 사간(沙干), 제9관등 급간(及干), 제10관등 대나말(大奈末), 제11관등 나말(奈末), 제12관등 대사(大舍), 제13관등 소사(小舍), 제14관등 길지(吉之) 등의 관명과 이름을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제1행에서 제6행까지의 기서에는 4언구나 4언 골간의 구절을 다용했다. 1 □巡□狩管境, 刊石銘記也. 2 世道乖眞, □(??)化不敷. [早以帝王建?, 莫不脩己, 以安百姓.] 3~4 紹太祖之基, 纂承王位, 兢身自愼(植), 恐□[□□.] [又蒙天恩, 開示運記, 冥感神祗, 應□□□.] 4 四方託境, 廣獲民土, 隣國誓信, 和使交通. [□忖撫育, 新古黎庶, 猶謂道化.] 5 巡狩管境, 訪採民心, 以欲勞□. [□□(有)忠信, 精誠才□] 6 (爲)國盡節, 有功之徒, 可加賞爵物, 以章勳?□. 이상에서 「황초령순수비」는 4언구 및 4언구 제행의 비중이 높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4언구는 구중 평측교호법이나 구말 평측교호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종결사는 제1행에 ‘也’ 자가 1회 사용되었을 뿐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4언 중심의 문언문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겠다. ---「제3부 석비문의 문체」중에서 경북 군위군 화산(華山) 기슭의 인각사에는 보각국사 일연(一然, 1206~1289)의 탑비 「인각사보각국사비(麟角寺普覺國師碑)」가 있다. 비제는 「고려국의흥화산조계종인각사가지산하보각국존비명병서(高麗國義興華山曹溪宗麟角寺迦智山下普覺國尊碑銘幷序)」, 전액은 「보각국존비명(普覺國尊碑銘)」이다. 비제에는 국존이라 했으나 제액에서는 국사라 했다. 1289년(기축) 6월 일연이 입적하자, 충렬왕이 제조(制詔)를 내려 시호를 보각(普覺), 탑호를 정조(靜照)라 하고, 그해 10월 탑을 인각사 동남쪽 속칭 부부마을 뒷산에 세웠다. 운문사 주지 대선사 청분(淸?)이 일연의 행장을 지어 충렬왕에게 올리자, 충렬왕은 민지(閔漬, 1248~1326)에게 비문을 짓게 했다. 민지는 서너 해 뒤 비문을 완성했다. 문인 죽허(竹虛)가 왕희지 글씨를 집자해서, 1295년(충렬왕 21) 수성암 비석이 건립되었다. 보각국사비는 보각국사탑과 떨어져 석불좌상과 나란히 있다. 비신은 극히 일부가 남아 있지만, 오대산 월정사(月精寺)에 비문의 사본이 있다. 민지의 비문은 서와 명으로 이루어져 있고, 서는 변문투의 제행, 고문의 산행, 삽입시, 백화체 대화문을 얽어서 무애변지(無?辯智)로 종횡했다. 비문은 대의론으로 시작했다. 처음은 4언 중심으로 대우를 많이 사용하되 염률은 따르지 않고 평측교호를 행하더니, 차츰 고문의 산행으로 써 내려갔다. ---「제4부 비지문의 문체」중에서 박지원(朴趾源)이 쓴 「백자증정부인박씨묘지명(伯?贈貞夫人朴氏墓誌銘)」은 널리 알려진 여성 묘주 묘지명이다. 주지하듯이, 윤광심(尹光心, 1751~1817)의 『병세집(幷世集)』에 수록된 「백자유인박씨묘지명(伯?孺人朴氏墓誌銘)」이 초고에 해당하고, 『연암집』에 수록된 그 글은 여성 묘주 박씨가 정부인에 추증되고 나서 개작한 것이다. 276자의 단형이면서 감성의 토로가 구성과 비유 등 형식적인 요건과 어우러진 탁월한 문장이다. 명은 칠언절구 형식으로, 수구(首句)에도 압운했다. 묘지명의 서는 현재의 객관적 사실과 누이에 대한 회상, 주변 경관의 묘사를 교차시켜 슬픈 심회를 은은하게 드러냈다. 문장 마침에 종결사를 드물게 사용했다. ⓐ 유인(孺人)의 이름은 아무이니, 반남 박씨이다. 그 동생 지원(趾源) 중미(仲美)가 묘지명을 써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유인은 16세에 덕수 이택모(李宅模) 백규(伯揆)에게 시집가서 딸 하나 아들 둘을 두었고, 신묘년 9월 1일 세상을 뜨니, 득년 마흔 셋이었다. 지아비의 선산이 아곡(?谷)인데, 장차 그 경좌(庚坐: 서향)의 음택에 장사 지내려 한다. ⓒ 백규가 어진 아내를 잃고 나서 가난하여 살길이 막막하자, 어린 것들을 이끌고, 계집종 하나, 솥과 그릇, 옷상자와 궤짝을 가지고 강물에 배를 띄워 협곡으로 들어가려고 상여와 더불어서 함께 출발했다. 나는 새벽에 두포(斗浦: 두모포)의 배 가운데서 이를 전송하고, 통곡하고는 돌아왔다. 아아! (중략) ⓕ 떠나는 이는 간곡하게 뒷날 기약을 남기지만 오히려 보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이 옷깃을 적시게 하네. 조각배 이제 가면 언제나 돌아올까? 보내는 이는 하릴 없이 언덕 위로 돌아가네. ---「제4부 비지문의 문체」중에서 이광사는 “사람들이 자잘한 행사까지 시시콜콜하게 적은 가장(家狀)을 가져와서 비지문에 모두 드러내길 청하면, 감히 스스로 지어내어 주장하지를 못하므로 볼 만한 글이 전혀 없습니다. 당나라 한희재(韓凞載, 902~970)처럼 비폐(碑幣)를 수레에 실어 돌려보내지를 못하니, 비지를 후대에 전하려고 하지만 어찌 전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이덕수는 “후세의 비지가 예스럽지 못한 것은 그 때문만이 아니네. 문장의 기세가 점점 떨어져 경중과 거취를 모르게 되었기 때문이네. 『사기』와 『한서』의 장처는 전(傳)을 세울 때마다 먼저 그 사람의 성품과 행실을 서너 구로 표하고, 그 아래 수백 수천 언어가 모두 여기에서 연유하네. 이것은 화가가 전신(傳神)하는 것과 같았지. 뒷사람들은 이런 안목이 없고 이런 필력이 없어서, 사람의 덕을 형상할 때마다 온갖 행실을 다 적으므로 흐물흐물하여 볼 만한 것이 없네.”라고 했다. 이광사는 이덕수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전신의 글이 나올 수 없는 이유를 두 가지로 해석했다. 첫째, 옛사람에게는 일단의 두드러진 장처가 있어, 한평생 행한 일이 모두 여기에서 나왔고, 남보다 뛰어난 곳도 모두 이 때문이었으며, 과실을 저질러 죄를 얻는 것도 역시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후세에는 풍기가 문드러져서, 오로지 세속에 아부하는 것을 일삼기에 자신만의 개성이 없다. 둘째, 옛사람은 글을 지을 때 자신의 장점을 장점으로 삼았지, 두루 이를 수 없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건만, 후인은 유고 속에 한 법(양식)이라도 불비하지 않을까 우려하여 죄다 효빈(效嚬)을 하여 한 가지 기예도 우람한 것이 없다. ---「제5부 비문의 문체미학과 정치」중에서 고려 초의 탑비문은 서에서 변문을 사용했다. 고려 초 최언위(崔彦?)는 11편의 비문을 남겼다. 943년 건립된 「정토사법경대사자등탑비(淨土寺法鏡大師慈?塔碑)」의 「유진고려중원부고개천산정토사교시법경대사자등지탑비명병서(有晉高麗中原府故開天山淨土寺敎諡法鏡大師慈?之塔碑銘幷序)」, 954년(고려 광종 5) 건립된 「태자사낭공대사백월탑비(太子寺朗空大師白月塔碑)」의 「신라국고양조국사교시낭공대사백월서운지탑비명(新羅國故兩朝國師敎諡朗空大師白月栖雲之塔碑銘)」은 모두 서가 완전한 변문의 문체이다. 고려시대에 사대부 묘에는 묘지를 묻었는데, 중엽 이후 지문의 서는 문언어법 산문이 중심이 되었다. 고려 중엽 이후로 비문에 변문을 전적으로 사용한 예는 드물게 되었다. 하지만 고문에 변려의 투식을 교직한 예가 드물지 않다. (중략) 고려 중기 이후의 석비나 묘비는 정제된 한문을 활용해도 대개 제행과 배비구를 중첩하지는 않았다. 비지문은 산문의 서(序)와 운문의 명(銘)으로 이루어져, 서는 서사(敍事), 명은 찬(贊)의 기능을 지녔다. 고려 초 최언위가 작성한 「태자사낭공대사백월탑비명」에서 사(詞)는 4구 1전운 형식이다. 이성미(李成美)가 찬술한 「이자연묘지명(李子淵墓誌銘)」에서 명은 입성 屑운을 일운도저·격구압운했다. 100여 년 뒤 보문각대학사동수국사(寶文閣大學士同修國史)로 치사한 김훤(金?)은 스스로 묘지명을 짓고 용운(用韻)의 명 4장을 붙였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지석은 단형 기서체에 그치지 않고 평가의 언어를 수반하는 것이 주류를 이루었다. 민수(閔脩)의 풍자연(風字硯) 묘지는 비제도 없고 명도 없으나, 인물 평어(評語)를 포함하고 있다. 12세기에는 관료 문인들의 묘지가 묘지명 양식으로 바뀌고 서의 내용도 풍부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석비든 비지든 고문의 서와 운문의 명으로 구성하는 것이 관행이 되었다. 다만 신도비에 명을 첨부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있었고, 일부 묘비는 산행의 명에 운자를 사용하기도 했다. ---「맺는말」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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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부터 국가, 집단, 개인은 영토를 표시하고 권력을 과시하고 이념을 선전하기 위해 비석을 세웠다. 또 인물의 삶을 기리고 묘역을 표시하며 가계나 학맥?법맥 및 망인의 정치적 위상을 현시하기 위해 묘비를 건립하고 묘지를 묻었다. 이 책에서는 전자를 석비(石碑)로, 후자를 비지(碑誌)로 지칭한다. 기공비·신사비·전몰비·기적비·전승비·장경비·정려비·유애비 등이 석비에 속하고, 신도비·묘비·묘갈·묘표·지석 등이 비지에 속한다.
비문의 문학적 가치 한국의 석비와 비지는 효용과 목적에 따라 그 비문의 양식이 다르고, 기서(記敍) 체계의 차이에 따라 비문의 문체가 분화했다. 문체는 대체로 한문의 문언어법을 따랐으나, 경우에 따라 한국식 한문을 사용하기도 했다. 선진고문(先秦古文)에 토대를 둔 문언문(文言文)이나 변문(騈文) 투식의 문언문이 발달한 이후에는 명(銘)의 압운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비문의 기록은 사실을 중시하므로 당대 사료로서 가치가 있지만, 그 문장은 사건이나 인물에 관한 정보를 독특한 관점에 따라 재구성한 수식(修飾)의 결과물이다. 따라서 비문은 사건의 경과나 인물의 삶을 고찰하는 자료인 동시에 문학 연구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비문의 찬자는 한문 기서 방식에 숙련된 문망 있는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입언(立言)의 역할을 중요시하여 비문의 문체를 고민하고 연구했으며, 인물의 행적과 사건의 과정을 응결시켜 제시해야 하는 비문의 특성상 사건과 행적의 어떤 부분은 적절히 숨기고 어떤 부분은 드러내고 찬미했다. 저자는 이러한 사실에 주목하여 한국의 석비문과 비지문 유형을 나누고, 그 주요 사례를 중심으로 각 비문의 문체적 특징을 분석했다. 한국문학 연구의 확장 저자는 일찍부터 고대 석비의 문장에 압운의 명이 정착되는 과정, 고려 비문의 탁본과 문집 수록 자료의 차이, 사대부 신도비·비지의 기원과 발달 양상, 여성을 위한 묘비의 실상, 이중 비지문 제작 사례, 자찬의 묘지에 나타난 주체의 자의식과 생사관 등에 대해 주로 연구해 왔다. 2016년에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석비문과 비지문에 대한 연구를 종합하기 시작하여, 2017~2019년에는 교토대학 부속도서관에 소장된 『금석집첩』(18세기에 김재로와 그 후손들이 석비와 묘비의 탁본 2,000여 점을 수록하여 엮은 『금석집첩』과 『금석속첩』의 통칭)을 전부 열람함으로써 연구 대상을 확장했다. 이러한 연구 과정을 거친 결과물이 이 책이다. 저자는 과안의 실물 자료, 기존의 판독문이나 문집 수록 글들을 다량으로 활용하면서, 자교(自校)와 타교(他校)의 방법으로 원문을 확정하고 기존 번역물을 수정하거나 새로 번역했다. 비문의 판독에 문체 분석 방법을 도입하여 저자 나름의 방법론과 판독 결과를 제시하기도 했다. 석비와 비지에 새긴 글은 금석문(金石文)의 일종이다. 이 책은 석비와 비지에 새긴 문장이나 입비(入碑)를 위해 찬술된 문장만을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금석학의 관점에서 보면 한정된 연구라고 할 수 있지만, 한국문학의 연구 대상을 금석문으로 확대시킨 시도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이 책의 구성 이 책은 크게 5부로 구성했다. 제1부 「비문과 문학 연구」에서는 석비와 비지의 글을 문학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 협의의 문학성과 광의의 문학성을 개괄하고 있다. 제2부 「석비문·비지문 문체의 역사적 개관」에서는 한국에서 문언어법 산문(4언 중심과 제행·산행 병용), 변문 투식 산문, 한국식(이두식) 한문의 세 종류 한문이 발달하면서 그것이 비문에 반영되고 활용된 사실을 검토했다. 또한 8세기 무렵부터 한국에서 운어(韻語)를 중시하게 되고 용운(用韻)을 최상위 고급문화의 표지로 간주하게 됨으로써 한국문화의 체질이 변화하게 된 궤적을 살펴보았다. 제3부 「석비문의 문체」에서는 석비의 종류를 그 기능과 역사적 배경의 차이에 따라 구분하고, 각각의 주요 사례를 예시했다. 특히 최근 발굴된 사례들이나 역사·문화적으로 의의가 있는 자료들을 중심으로 석비문의 문체를 논했다. 제4부 「비지문의 문체」에서는 묘비문과 묘지문을 입비의 동기나 목적에 따라 분류하고, 각각의 주요 사례를 중심으로 해당 비지문의 문체를 논했다. 고대국가와 고려 때 탑비와 석종비가 주류를 이루었다가, 고려 중엽에 묘지가 발달하고, 고려 말 사대부의 신도비와 묘표가 출현한 후, 조선시대에 묘갈과 묘지가 크게 발달하게 되는 과정을 통시적으로 개괄했다. 그리고 비문이 문자권력의 소산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국왕과 왕비·왕족의 비지문과 사대부의 비지문, 정치적 소외 계층의 비지문을 구별해 살피고 있다. 이와 동시에 문자권력에서 소외되어 있던 여성들이 조선 중기 이후에야 지상에 묘비를 건립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제5부 「비문의 문체미학과 정치」에서는 문자권력이 비문을 통해 실현되는 양상을 서술했다. 비문의 찬술과 입비, 건비, 매지의 과정, 복수 묘도문의 존재, 문자 표현에 관철된 정치적 선언과 비난·변호·생략(은폐)의 사실도 함께 살펴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