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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 005
『계남집(溪南集)』 / 최숙민 / 013 『계초집(稽樵集)』 / 민치량 / 030 『곡은유고(谷隱遺稿)』 / 이육 / 042 『관산유고(管山遺稿)』 / 안정회 / 047 『귤은재유고(橘隱齋遺稿)』 / 김류 / 053 『난와유고(難窩遺稿)』 / 오계수 / 061 『남파집(南坡集)』 / 이희석 / 079 『노백헌집(老柏軒集)』 / 정재규 / 088 『노포유고(老圃遺稿)』 / 정면규 / 118 『농산집(農山集)』 / 정면규 / 123 『농암유고(聾巖遺稿)』 / 노재규 / 138 『다암유고(茶?遺稿)』 / 위영복 / 145 『담녕집(澹寧集)』 / 제갈하백 / 151 『대곡유고(大谷遺稿)』 / 김석구 / 159 『덕암만록(德巖漫錄)』 / 나도규 / 164 『동오유고(東塢遺稿)』 / 조의곤 / 177 『명호집(明湖集)』 / 권운환 / 184 『백석헌유집(柏石軒遺集)』 / 기양연 / 202 『보산선생유고(普山先生遺稿)』 / 기우승 / 207 『산석집(山石集)』 / 김현옥 / 214 『상고헌유고(上古軒遺稿)』 / 박로면 / 223 『석음유고(石陰遺稿)』 / 박로술 / 232 『석전집(石田集)』 / 이최선 / 244 『석천유고(石泉遺稿)』 / 이도정 / 254 『소두집(小?集)』 / 정하원 / 257 『소암유고(紹巖遺稿)』 / 유인규 / 265 『송사집(松沙集)』 / 기우만 / 270 『송와집(松窩集)』 / 최제태 / 314 『수학집(睡鶴集)』 / 허섭 / 320 『수헌집(睡軒集)』 / 기경연 / 331 『시암집(是庵集)』 / 이직현/ 341 『식재집(植齋集)』 / 기재 / 361 『신호집(莘湖集)』 / 김록휴 / 374 『쌍석유고(雙石遺稿)』 / 이희용 / 380 『연상집(蓮上集)』 / 안중섭 / 387 『오남문집(吾南文集)』 / 김한섭 / 396 『용산유고(龍山遺稿)』 / 기홍연 / 405 『월고집(月皐集)』 / 조성가 / 410 『월파집(月波集)』 / 정시림 / 429 『율수재유고(聿修齋遺稿)』 / 박해량 / 445 『일신재집(日新齋集)』 / 정의림 / 451 『지강문집(芝岡文集)』 / 민치완 / 470 『청고집(靑皐集)』 / 이승학 / 478 『춘담집(春潭集)』 / 기동준 / 487 『춘파유고(春坡遺稿)』 / 강인회 / 501 『춘파유고(春坡遺稿)』 / 위관식 / 506 『취은유고(翠隱遺稿)』 / 박로후 / 514 『현와유고(弦窩遺稿)』 / 고광선 / 520 『후석유고(後石遺稿)』 / 오준선 / 532 『후해유고(後海遺稿)』 / 송정묵 / 5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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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자 소개
최숙민(崔琡民, 1837~1905)의 자는 원칙(元則)이고 호는 계남(溪南)이며 관향은 전주(全州)이다. 시조는 고려 후기 전주 최씨 문성공파(文成公派) 최아(崔阿)이다. 그의 큰아들 최용생(崔龍生)은 문관에 급제하여 충정왕 2년(1350)에 지평으로 있으면서 경상도안렴사(慶尙道按廉使)에 임명되었는데, 원나라의 총애를 믿고 악행을 저지르는 환관들에 대해 글로서 백성들에게 알리자, 원나라 사신에게 고소를 당하여 사천(泗川)에 거주하면서부터 경상도에 전주 최씨가 살게 되었다. 최숙민의 가계는 임진왜란 때 진주성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8대조 모산공(茅山公) 최기필(崔琦弼, 1562~1593)을 파조로 하여 ‘모산공파(茅山公派)’라고 한다. 최숙민은 절의를 숭상하던 영남 남인 가문 출신의 학자이면서 한말 강우지역 노사학파의 대표적 선비로 안빈락도(安貧樂道)의 삶을 살았다. 최숙민은 경남 하동 출신으로, 『계남집』에는 가장(家狀), 행장(行狀), 묘비명(墓碑銘), 묘갈명(墓碣銘), 연보(年譜) 등이 수록되어 있지 않으나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이 썼던 「묘지명」과 정재규(鄭載圭, 1843~1911)가 지었던 「행장」을 통해서 그의 행적을 살펴볼 수 있다. 최숙민은 아버지 최중길(崔重吉)과 남명학을 가학으로 이어왔던 하덕망(河德望, 1664~1743)의 손녀인 진양 하씨(晉陽河氏) 사이에서 1837년 3월 16일에 태어났다. 그는 용모가 비범하고 재주가 뛰어나 어려서부터 가르치지 않아도 스스로 학문에 매진했으며, 젊어서는 경전과 역사서 등 여러 책을 두루 읽어 섭렵하였다. 20세(1856) 때에 과거시험에 응시하여 한양에 갔는데, 선비들의 풍속이 예전 같지 않은 것을 보고서 실망하여 과거를 포기하고 귀향하여 성현(聖賢)의 공부인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념하였다. 최숙민이 고향에서 학문에만 뜻을 둘 수 있었던 것은 형 귤하(橘下) 최식민(崔植民, 1831~1891)의 보살핌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최숙민은 그 후 몇 년 동안 독학하면서 스승을 찾다가 30세(1866) 즈음에 조성가(趙性家, 1824~1904)의 권유로 기정진의 문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노사는 최숙민의 학문적 자질을 높이 평가하고 『논어』를 읽으라는 가르침을 주었는데, 그는 돌아와서 4년 동안 다른 경서를 보지 않고 『논어』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노사가 죽기 전(1879)까지 그의 문하생이 되어 정재규·조성가 등과 학문적으로 교유와 사상적 기반을 구축하였다. 기우만은 최숙민에 대해 “가난한 삶 속에서도 오직 학문하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깨우치기 전까지는 책을 놓지 않는 선비이다”라고 말하였다. 53세(1889) 때에 조식(曺植, 1501~1572)이 강학했던 덕산(德山) 산천재(山天齋)에서 후손들과 강학하였고, 가수(嘉樹)의 뇌룡정(雷龍亭)과 단성(丹城)의 신안서사(新安書社)에서 열렸던 강회에 참여하였다. 이 시기에 허유(許愈, 1833~1904) 곽종석(郭鍾錫, 1846~1919) 등 이진상(李震相, 1818~1886)의 문인과 김평묵(金平默, 1819~1891)·최익현(崔益鉉, 1833~1906) 등 화서학파 학자들과도 사상적으로 교유하였으며, 이중철(李重轍) 등 퇴계학파 계열의 남인들과 교류하였다. 55세(1891) 때에 정여창(鄭汝昌, 1450~1504)과 남명학파 오건(吳健, 1521~1574) 등의 유적지로부터 율곡학파 유적지, 퇴계학파 근거지인 도산서원, 남명학파 발원지를 답사하였다. 60세(1896) 때에 단발령이 내렸을 때 “부모가 온전히 낳아 준 신체를 훼손하면 자식이 아니다. 선왕이 대대로 지키던 법복을 바꾸면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목숨을 걸고 항거하였다. 말년에 자옥산(紫玉山) 남쪽 골짜기에 서당을 짓고 머물며 강학하다 1905년 11월 28일 69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뒤에 그의 학문과 덕망을 기리기 위해 후손과 유림들이 하동군 옥종면 두양리에 남계정(溪南亭)을 세웠다. 2. 문집 구성과 내용 『계남집(溪南集)』은 시문집으로 30권 10책의 한적 목판 선장본(線裝本)이다. 표제와 판심제 모두 『계남집』으로 되어 있으며, 책의 크기는 가로 19.6cm, 세로 29.5cm이다. 이 문집은 전남대학교, 경상대학교, 국립중앙도서관, 성균관대학교, 숙명여자대학교, 한국중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서문과 발문 등 부록이 없어 간행의 경위나 편찬에 체제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권1~권4에는 시(詩) 510수가 수록되어 있으며, 연대 순서로 정리되어 있다. 권5~권19의 서(書) 268편은 스승을 비롯한 사우, 문인, 친족과 교류한 것들이다. 권20~권22에는 잡저(雜著) 41편, 권23~권25에는 서(序) 16편, 기(記) 18편, 발(跋) 19편, 권26에는 명잠(銘箴) 4편, 사(辭) 5편, 상량문(上梁文) 2편, 축문(祝文)과 제문(祭文) 29편으로 되어 있고, 권27에는 비명(碑銘) 1편, 묘표(墓表) 3편, 권28에는 묘갈명(墓碣銘) 7편, 묘지명(墓誌銘) 9편, 권29에는 행장(行狀) 11편, 권30에는 사장(事狀) 1편, 유사(遺事) 5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詩)는 지인들과 주고받은 것 외에 명승고적을 답사하면서 즉흥적으로 쓴 것이 많은데, 그 가운데 절반 이상이 기행시(紀行詩)이다. 최숙민은 자신의 거주지 하동을 중심으로 산청·진주·함양·거창·합천뿐만 아니라, 남해·구례 등을 모두 유람하였다. 심지어 속리산과 천마산을 넘어서 금강산까지 두루 둘러보면서 많은 기행시를 남겼다. 서(書)는 스승을 비롯한 당시 지식인들에 의문난 점을 물었던 문목(問目)이 51편이 있으며, 최익현·김평묵·정재규·양회일(梁會一)과 왕복한 서찰이 많다. 특히 「상노사선생문목(上蘆沙先生問目)」은 이기론(理氣論)과 심성론(心性論)에 대한 내용이다. 「답제태질문목(答濟泰姪問目)』에는 조카인 최제태(崔濟泰, 1850~1907)가 질문했던 리(理)와 기(氣)의 선후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이경항문목(答李敬恒問目)」에는 리와 기의 불상리(不相離)와 불상잡(不相雜)를 도(道)와 기(器)의 관계로 설명하였다. 「답유종원(答柳鍾源)」에는 유종원이 심(心)을 기(氣)로 보는 견해에 대한 답한 편지로, 경전내용을 인용하여 심을 기 하나로 표현할 수 없다고 설명하였다. 「여정재규(與鄭載圭)」에도 심통성정(心統性情)의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여정부윤(與鄭厚允)」에는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에 대해 인성과 물성은 결코 다르지 않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잡저」의 「운담문답(雲潭問答)」에는 영남의 심설(心說)에 대한 논의가 심즉리(心卽理)·심즉기(心卽氣)·이기합(理氣合) 세 가지가 있는데, 심즉리가 심의 본래 의미에 가깝다고 보았다. 「변전간재우량의기의(辨田艮齋愚凉議記疑)」는 기정진의 「납량사의(納凉私議)」를 비판한, 전우(田愚, 1841~1922)의 「납량사의의목(納凉私議疑目)」을 재비판하는 글이다. 이일분수(理一分殊)에 대해 분수의 차별성이 기(氣)로 인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리 가운데 내재해 있다는 스승의 논리로 전우의 비판을 반비판하였다. 「명덕변(明德辨)」에는 ‘명덕이 바로 심’이라는 설에 대해 논술하였다. 「심설(心說)」에는 왜 심즉리의 관점이 심의 본래 의미에 가까운 이유를 설명하고, 심통성정은 명칭이 다를 뿐 하나라고 보았다. 「답정시경문목(答鄭蓍卿問目)」에는 정시경이 질문한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관계에 대해 심은 모두 도심이지만 중절하지 못한 경우에 인심이라고 설명하였다. 최숙민은 노사를 만나기 전에는 남명학파의 실천정신이 각인되어 있던 학자였는데, 기정진을 만나면서 스승의 주리설을 계승하게 되었다. 그의 학문적 성향은 남명학과 노사학을 접하면서 이론적 측면과 실천적 측면의 조화를 이루었다. 그래서 최숙민은 오랑캐와 서양문명을 배척하고 중화문명을 중시하는 시대의 변화에 보수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지만, 그 상황에 대한 춘추의 의리정신을 잘 표출하였다. 3. 문집 목차 卷一 詩: 山水吟 讀易偶題 訪樹宋極源 宋性浩同 酬姜文 病後吟 朝起有懷詩上家兄以相慰 霽後 醉後與渭濱登高 登前峯望江亭 相酬 慕寒齋唱酬 大源菴四首 石甕 宿大浦村塾 還家又賦古風一首 和鄭雙洲韻 慕寒齋相酬 次月村河丈韻 多率寺待友 渡露梁 過笠峴 龍門寺 上白蓮菴 上錦山二首 菩提菴 觀日出 龍窟 過忠烈祠遺墟 慕寒齋次諸友詩 春宵偶題 伏次文巖韻上塤案 携友深寂菴微雨旱餘乍下 挽韓桐湖 愚川相送以程明道春日偶成詩二十八字分韻得淡字 水齋與權海閭朴光唱和二首 挽權文九三首 題赤壁 奇友松沙訪余于丹邱艾山乃近地友生數十人皆來會遂登縣學拈韻相酬 別松沙 挽鄭子安 挽權丈周老 挽渭濱子三首 十月十七日到岳陽省親宿山下乘月訪李上舍虞卿不在然寫兩絶留呈 河江界華山亭元韻月趙丈改拈以和 次鄭汝明冬至吟 江樓春日憶權榮汝 次權子厚韻二首 春日陪家兄遊仙遊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