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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갑오년, 백성들이 들고일어났다!
1. 천하는 모두의 것이니, 임금의 자리 역시 마찬가지요 -조선의 공화주의자 정여립 2. 누구도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만듭시다! -신분 차별 철폐를 외친 허균 3. 누군 내고, 누군 안 내는 세금 제도 문제 있소이다! -대동법 전도사 김육 4. 나는 주자와 생각이 다르오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외친 윤휴 5. 땅을 국가가 나눠 줍시다! -토지의 균등한 분배를 주장한 유형원 6. 표현의 자유를 허하라! -문장 개혁가 박지원 7. 사람은 모두 평등한 존재요 -평등사상을 설파한 최제우 조선 사회 더 깊이 알기: 붕당정치 | 서얼 | 세금 | 유교 | 노비 제도 | 실학 | 세도 정치와 동학농민운동 에필로그-이제 어떻게 바꾸어야 할까 동학농민운동 이후 이야기 더 보면 좋을 자료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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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라에 임금이 계신데 어찌 다른 이를 임금으로 세운단 말씀입니까”
정여립의 눈매가 날카로워집니다. “나라는 온 백성의 소유물인데, 어찌 정해진 임금이 있겠느냐.” 제자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지요. 왜 안 그렇겠습니까. 이씨만이 왕위를 이을 수 있는 나라에서 다른 임금이라니요! 역적이나 할 소리 아닙니까! --- p.24 지금의 정당을 조선 시대에는 붕당이라고 했다. 붕당(朋黨;)이란 뜻을 같이하는 무리라는 뜻이다. 공자는 붕당을 “정치를 어지럽히는 사악한 무리”라며 부정적으로 봤지만, 송나라 성리학자 주자는 “붕당이라고 해서 다 나쁜 건 아니다. 소인배들이 모인 당은 나쁘지만, 군자들이 모인 당은 좋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이는 “붕당이 문제가 아니라 군자와 소인의 구별이 중요하다”며 주자의 주장을 옹호했다. --- p.38 친구들은 한 가닥 희망을 품고 상소를 올렸지만 별 반응이 없었습니다. 친구들은 크게 낙담했지요. 그 모습을 보니 허균은 착잡하고 씁쓸했습니다. ‘하늘이 사람을 낼 때 귀한 집 자식이라고 해서 재주를 더 주는 것도 아니요, 천한 집 자식이라고 해서 재주를 덜 주는 것도 아닌데, 신분 때문에 사람을 차별하는 게 말이 되는가. 그러면서 인재가 없다, 인재가 없어 하니 이보다 더 한탄스러운 일이 또 있을꼬.’ --- p.51 이런 서얼 차별이 부당하다며 없애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조광조는 “땅이 좁아 인물이 적은데 중국과 달리 서얼과 노비까지 제외하니 좋은 인재를 얻기 어렵다”며 서얼 차별 철폐를 주장했고, 이이도 같은 주장을 했다. 류성룡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서얼은 물론 천민까지 공을 세우면 관직에 오르도록 하자고 건의해 실제로 서얼이 관리가 된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등용 건은 다시 흐지부지된다. --- p.65~66 대한민국에는 신분제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차별이 없을까. 가난해서, 성정체성이 달라서, 여자라서, 장애인이라서, 피부색이 달라서, 민족과 국가가 달라서 등등의 이유로 차별받는 사람들이 곳곳에 있다. 허균이 지금 사회를 본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싸워야겠다며 다시 머리띠를 질끈 동여맬까? --- p.68 대동법은 지역특산품으로 내던 공물을 쌀로 대신 내게 하는 제도로, 토지 1결당 12두씩 내게 했죠. 벼농사가 힘든 산간 지역 사람들에게는 삼베, 무명 등을 받았고 나중에는 동전으로도 거두었지요. 땅이 없는 가난한 소작농을 비롯한 백성들이 얼마나 좋아했을지 눈에 선합니다. 김육은 온 인생을 대동법 실현에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백성들이 세금 때문에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 직접 보고 겪었기 때문이지요. --- p.74 김육은 백성을 가장 힘들게 한 것이 공납이라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이를테면 제주도에서는 감귤, 통영에서는 전복, 가평에서는 잣 따위를 정부에 바쳤습니다. 이 공납이 왜 백성을 힘들게 했냐면, 땅이 많은 부자나 밭 한 뙈기 없는 서민이나 같은 양의 공물을 내야 했고, 자기 지역에서 나지 않는 공물을 내라고 하면 공물을 취급하는 방납업자에게 사서 내야 했는데 그 가격이 매우 비쌌기 때문이지요. --- p.75 위원장 모처럼 바람직한 개혁가와 개혁 방안이 나와서 제 마음이 다 흡족합니다. 위원 평생 자신들을 위해 애쓴 걸 알았던지 김육이 죽자 충청도 어느 마을에서는 김육을 기리는 공덕비를 세우기도 했지요. 김육은 훗날 실학자들에게도 많은 영감을 준 정치가입니다. --- p.79 농민들은 군역 때문에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는 데다 서울까지 가는 비용도 부담스럽고 보인에게서 지원받은 면포 1필로는 끼니를 잇기도 어려웠다. 실제로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다치거나 물에 빠져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였고, 간신히 서울에 올라왔지만 면포를 팔아 산 쌀이 너무 적어 굶어 죽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농민들 입장에서는 당연히 자기 대신 군역을 서 줄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사서 보내는 대립(代立)이 훨씬 나았을 것이다. 16세기 이후 대립이 성행한 이유다. --- p.97 어느 날 송시열이 윤휴를 찾아와 이상하다는 듯 물었습니다. “그대가 《중용》을 주자와 다르게 해석했다는 게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송시열이 다시 물었지요. “주자의 해석은 완전무결한 것인데, 어찌 그리 괴이한 행동을 하였는가?” 윤휴는 의아하다는 듯 송시열의 눈을 바라보며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천하의 많고 많은 이치를 어찌 주자만 알고 저는 모른단 말입니까?” --- p108 조선의 유학자들이 주자를 성현으로 떠받드는 까닭이 있습니다. 주자는 송나라의 유학자로, 유학의 한 종류인 성리학을 체계화한 인물입니다. 그는 《예기》의 한 편이었던 〈대학〉과 〈중용〉을 편집해 《논어》, 《맹자》와 함께 사서(四書)의 반열에 올려놓았습니다. 조선 유학자들은 그의 해석과 분류를 절대적으로 신봉하여 그와 다른 해석이나 분류를 용납하지 않았지요. 그런 선비들의 정점에 송시열이 있었습니다. --- p.110 유교는 조선 시대에 수입된 것이 아니다. 고조선 때 이미 유교가 전해졌는데, 본격적으로 전파된 건 삼국 시대였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372)에 대학이라는 국립 학교를 세우고 학생들에게 《시경》, 《서경》, 《역경》 같은 유교 경전을 가르쳤다. 비슷한 시기에 불교가 수입되고, 훗날 도교도 전해져 고구려에서는 유불선이 함께 공존했다. --- p.129 “선생님, 선생님이 말씀하신 균전제를 실시하려면 우선 토지를 국유화해야 하는데, 토지를 몰수하면 지주들이 가만히 있을까요?” “양반들의 토지를 다 몰수하는 게 아닐세. 국유화한 뒤 양반들에게도 주지 않나. 그뿐인가. 그들의 자녀나 친척에게도 땅이 돌아가니 그렇게 억울해할 일은 아니라고 보네.” --- p.148 광종이 특별히 노비를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커서 그랬을까? 그런 면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현실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광종이 즉위했을 때 고려는 호족 세력의 힘이 왕권을 위협할 정도로 컸다. 광종은 호족의 힘을 약화하고 왕권을 강화할 목적으로 호족들이 소유한 노비를 양인으로 면천시켜 준 것이다. 의도대로 호족의 힘은 약해지고, 늘어난 양인이 세금을 냄으로써 국가 재정도 좋아졌다. --- p.163 조선의 노비 제도에서 가장 특이한 점은 세습된다는 것이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부모 중 한쪽만 노비여도 자식은 노비가 되었다. 유형원은 이건 너무 비인간적이라고 생각했다. 중국에서도 죄를 지은 사람을 노비로 삼기는 하지만 그 자식까지 노비로 삼지 않는다며 노비 세습을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p.168 “전하께서는 문체가 무너지면 세상 질서가 무너진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네. 그래서 성리학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문체에 집착하시는 거겠지. 이것만 보면 전하는 개혁군주라는 명성과 달리 참으로 보수적인 임금이신 거 같네.” --- p.188~189 위원장 이야기 잘 들었소. 글 좀 쓴다고 해서 최고 개혁가 후보에 올리기는 좀 약한 것 같은데요. 위원 글만이겠습니까? 《열하일기》를 보면 아시겠지만 그 책 안에는 청나라의 새로운 문물에 관한 묘사가 가득하지요. 그러면서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받아들여 조선을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를 달리 북학파(北學派) 실학자라 하겠습니까? --- p.189 조선 후기 들어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통치 원리로 삼았던 성리학에 대한 생각이다. 두 번의 전쟁을 겪고 난 백성들은 양반들이 그렇게 강조하던 성리학이 나라를 온전히 지켜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또한 전쟁이 끝난 이후 양반 사대부들이 반성은커녕 여전히 공허한 탁상공론만 일삼으며 성리학적 신분 질서를 강화하려는 데 크게 실망했다. 하지만 모든 양반이 그랬던 건 아니다. 백성들만큼 성리학에 실망한 양반들이 있었고, 그들 속에서 싹튼 것이 바로 실학이다. --- p.203 세도 정치라 하여 권력을 가진 일부 가문이 정치를 좌지우지하고, 지방 수령들은 제 잇속만 차리느라 백성의 고혈을 쥐어짜 백성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소. 위아래 할 것 없이 탐욕에 지배당하고 윤리는 땅에 떨어진 세상. 이런 세상에서 민중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미신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었소. 세상의 질서가 무너져 가는 걸 목도했소. 이런 와중에 서양 세력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서학이라 부르는 천주교를 포교하니, 그야말로 말세 직전이 아닌가 싶었소.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누천년을 이어 온 유교의 도와 불교의 도로는 이 어지러운 세상을 구하지 못할 거라 깨달았소. 그래서 세상을 구할 바른 도를 구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오. --- p.219 서양인들은 천주의 뜻이라 하여 부귀를 취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다른 나라를 공격하고 있소. 얼마 전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청나라 수도 북경을 침략하지 않았소? 바로 이들이 들여온 것이 서학인데, 서학은 침략을 위한 종교일 뿐이오. 게다가 제 부모가 죽으면 제사도 안 지내면서 저는 죽어 천당에 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이기적인 종교요. 동학은 인간의 이기심이 세상을 타락시키는 근본원인이라 보고 이기심을 버리라고 가르치고 있소. --- p.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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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조선 사회를 바꾸려 한 개혁가 7명을 엄선해 그들 일생과 주요 개혁 내용을 쉽고 흥미롭게 들려주는 역사 교양서다. 개혁가는 정여립, 허균, 김육, 윤휴, 유형원, 박지원, 최제우. 김육, 유형원, 박지원을 빼고는 역적으로 처형된 인물들이다. 변화는 반역을 내포한다. 기존의 것을 뒤흔들지 않고는 그 사회를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이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조선에서 바꾸고 싶어 한 것들은 무엇일까?
왜 이씨만 왕이 되어야 할까, 왜 신분이 다르다고 차별받아야 할까? 정여립은 ‘천하공물(天下公物)’을 주장했다. 천하는 모두의 것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왕도 무능할 때는 갈아 치울 수 있다고 보았다. 왕은 하늘이 내린 것이고, 이씨 혈족만이 그 자리를 이을 수 있다고 굳게 믿던 사회에서 이런 생각은 가히 혁명적이다. 정여립을 ‘조선의 공화주의자’라 부르는 이유다. 조선은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다. 허균은 《홍길동전》을 통해 서얼 차별을 부각함으로써 신분제가 정당한지 묻는다. “하늘이 사람을 낼 때 귀한 집 자식이라고 해서 재주를 더 주는 것도 아니요, 천한 집 자식이라고 해서 재주를 덜 주는 것도 아닌데, 신분 때문에 사람을 차별하는 게 말이 되는가.” -51쪽에서 신분제 덕분에 온갖 특혜를 누리는 기득권층, 즉 양반들이 이런 문제 제기에 가만있을 리 없다. 결국 허균 역시 정여립과 마찬가지로 역모 죄를 뒤집어쓰고 죽임을 당한다. 최제우는 여기서 더 나아간다. 그는 동학을 창시해 조선의 신분제를 뿌리부터 뒤흔든다. 최제우는 모든 인간 안에는 신성이 있으니, 하늘 아래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고 설파했다. 그렇잖아도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후 신분제가 흔들려 불안한 양반들은 최제우 역시 혹세무민 등 여러 죄명을 갖다 붙여 참형에 처한다. 남과 다르게 생각하면 안 되는 걸까, 내 생각대로 쓰면 안 되는 걸까? 조선은 성리학 중에서도 주자 성리학만을 신봉했다. 주자와 다른 해석을 하면 사문난적으로 낙인찍혔다. 대표적인 희생자가 윤휴다. 윤휴는 주자의 글은 일점일획도 고칠 수 없다는 근본주의자 송시열에게 “선생님, 천하의 많고 많은 이치를 어찌 주자만 알고 저는 모른단 말입니까”라고 반문한다. 그러면서 “주자가 살아온다면 저의 학설이 인정받지 못할 것이나, 《중용》을 지은 분이 다시 온다면 저의 학설이 인정을 받을 것입니다”며 맞선다.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고, 상대성과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은 이런 조선의 태도는 조선이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걸림돌이 되었고, 결국 조선이 망하는 한 원인이 된다. 학문과 사상의 자유만 없었을까. 조선 후기 정조 때에는 문체마저 검열의 대상이 되었다. 정조는 박지원을 필두로 당대의 선비들이 기존 전통적인 문체가 아닌 중국 패관문학 풍의 문체를 구사하는 것을 크게 우려한다. 자칫 나라 기강이 흔들릴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런 글을 읽고 쓰다 보면 세상 풍속과 인심이 바르지 않게 되고, 풍속과 인심이 바르지 않으면 나라의 질서가 무너지고 말 것이다.” 이런 정조를 당대의 명문장가 박지원 역시 못마땅해한다. “전하께서는 문체가 무너지면 세상 질서가 무너진다고 생각하는 것 같네. 그래서 성리학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문체에 집착하시는 거겠지. 이것만 보면 전하는 개혁군주라는 명성과 달리 참으로 보수적인 임금이신 거 같네.” -189쪽 하지만 연암 이후 조선에서는 자유로운 글쓰기가 큰 흐름이 되었고, 그 물줄기를 되돌릴 수는 없었다. 땅을 국가가 갖고 나눠 주면 안 되는 걸까, 세금을 공평하게 거둘 방법은 없는 걸까? 경제 분야에서 개혁을 시도한 이들도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유형원과 김육이다. 유형원은 18여 년 동안 조선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안을 담은 《반계수록》을 썼는데, 이 중 가장 심혈을 기울여 쓴 파트가 바로 토지 제도 개혁이다. 조선은 농본 국가여서 토지 문제가 아주 중요했지만, 토지를 대부분 양반들이 갖고 있어 번번이 개혁을 이루지 못했다. 유형원은 모든 토지를 국가가 소유한 후 양반, 노비 차별 없이 백성들에게 토지를 고르게 나눠 주는 균전제를 제안했다. 일곱 명의 개혁가 중 유일하게 살아생전에 자신의 뜻을 관철한 사람이 김육이다. 김육은 세금의 일종인 공납 문제를 해결하는 데 평생을 바친다. 공납은 땅이 많은 부자나 밭 한 뙈기 없는 서민이나 같은 양을 내야 하는 데다 자기 지역에서 나지 않는 것까지 납부하게 하는 등 제도의 허점이 많아 조선 시대 백성들을 가장 괴롭힌 세금이다. 김육은 이런 폐단을 없애기 위해 대동법을 거듭 제안한 끝에 생애 말년에 시행되는 걸 본다. 대동법은 지역 특산물 대신 토지 1결당 쌀 12두를 내게 한 제도다. 자연 땅을 많이 가진 양반들이 세금을 더 낼 수밖에 없었다. 대동법이 시행되었을 때 농민들은 덩실덩실 춤을 추지 않았을까. 조선은 고루한 사회? 인물로 보는 생동하는 조선사 이 책은 조선 시대 하면 공자, 맹자 왈 하는 고루한 시대로 생각하던 청소년들에게 그 시대 안에도 변화를 꿈꾸는 사람들이 들끓고 있었음을 보여 줌으로써 조선 시대를 다른 각도에서 볼 기회를 준다. 또한 7명의 개혁가가 문제시한 것들이 현재도 숙제로 남아 있음을 알려 줌으로써 역사적 인물과의 거리감을 좁힌다. 이 책은 ‘라이브 역사 청문회’ 시리즈 두 번째다. 1권 《새 지폐에는 나를 넣으시오》처럼 청문회 형식이라 술술 읽히고, 각 개혁가의 일생과 주요 개혁 내용을 구현해 놓은 ‘카드뉴스’는 마치 유튜브를 보는 듯한 생동감을 선사한다. 이번 책에서는 ‘조선 사회 더 깊이 알기’란 새 코너도 넣었다. 붕당정치, 서얼, 세금, 유교, 노비 제도, 실학, 세도 정치와 동학농민운동 등 핵심 키워드를 뽑아 조선 사회를 더 깊이 보여 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