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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이문열
민음사 2000.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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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1. 누가 당편이를 모르시나요
2. 풀씨
3. 뿌리 내리기
4. 봄, 봄
5. 인민의 딸, 참된 무산자
6. 유전
7. 황장군전 - 경외서
8. 그들의 봉별
9.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10. 영락의 세월
11. 마지막 봄
12. 기호의 행방, 혹은 이별의 의식
13. 작가의 말

저자 소개 1

Lee Mun-yol,李文烈,이열

1948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북 영양, 밀양, 부산 등지에서 자랐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서 수학했으며.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 「새하곡」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이후 「들소」, 「황제를 위하여」, 「그해 겨울」, 「달팽이의 외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등 여러 작품을 잇따라 발표하면서 다양한 소재와 주제를 현란한 문체로 풀어내어 폭넓은 대중적 호응을 얻었다. 특히 장편소설 『사람의 아들』은 문단의 주목을 이끈 대표작이다. 한국문학에 미치는 영향력이 워낙 커서 문학 작품이 발표될 때마다 많은 찬사와 비판을 동시에 받고 있지만, 가장 많은 독자층을 가지
1948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북 영양, 밀양, 부산 등지에서 자랐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서 수학했으며.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 「새하곡」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이후 「들소」, 「황제를 위하여」, 「그해 겨울」, 「달팽이의 외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등 여러 작품을 잇따라 발표하면서 다양한 소재와 주제를 현란한 문체로 풀어내어 폭넓은 대중적 호응을 얻었다. 특히 장편소설 『사람의 아들』은 문단의 주목을 이끈 대표작이다.

한국문학에 미치는 영향력이 워낙 커서 문학 작품이 발표될 때마다 많은 찬사와 비판을 동시에 받고 있지만, 가장 많은 독자층을 가지고 있는 이 시대 대표 작가라는 점은 변함이 없다. 오늘의 작가상,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 호암예술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2015년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 그의 작품은 현재 미국, 프랑스 등 전 세계 20여 개국 15개 언어로 번역, 출간되고 있다.

작품으로 장편소설 『젊은날의 초상』, 『영웅시대』, 『시인』, 『오디세이아 서울』, 『선택』, 『호모 엑세쿠탄스』 등 다수가 있고, 단편소설 『이문열 중단편 전집』(전 6권), 산문집 『사색』, 『시대와의 불화』, 『신들메를 고쳐매며』, 대하소설 『변경』(전12권), 『대륙의 한』(전5권)이 있으며, 평역소설로 『삼국지』, 『수호지』, 『초한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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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00년 03월 31일
쪽수, 무게, 크기
299쪽 | 크기확인중
ISBN13
9788937403392

책 속으로

이미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으나 그야말로 처녀이어선지 당편이에게는 아직도 남자에 대한 포기심과 수줍음이 남아 있었다. 웃통을 겉어붙인 크고 건장한 남자가 뿜어내는 숫게에 이끌렸는지 멀거니 장군 쪽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히잇, 하는 그녀 특유의 탄성과 함께 왼고개를 틀었다. 그 소리에 장군도 당편이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그때 당편이가 다시 장군 쪽을 돌아보며 두 눈길이 마주치면서 불꽃이 튀었다, 고 했으면 좋겠지만 실은 그렇지가 못했다.

--- p.160

우리 당편이와 황 장군은 서로 다른 성(性)이 아니면 할 수 없는 행위와 관계로 맺어졌다. 그것도 어느 정도는 공인된, 그리고 제법 지속적이면서도 반복적인 행위와 관계였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게 무엇인지 이름하기는 매우 난감하다. 차차 알게 되겠지만 그걸 결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모자라는 구석이 많고 야합(野合)이라 하기에는 지나쳐 넘치는 데가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라고 이름하기에는 스스로 온전하다 믿는 우리가 좀 허전하고, 그렇다고 본능적인 성의 교환이라고 규정짓고 보면 그들에게 너무 잔인한 짓을 한 느낌이 든다.

--- p.159

예전 그들이 우리 곁에서 어떤 역학을 하면서 함께 어울려 살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어쩌다 머릿속에 그들의 모습과 행적을 떠올리면 까닭 모를 미소가 입가에 함께 떠오르고 때로는 가슴 깊이 뭉클 그리움까지 치솟는 것 보면, 그들이 단순히 성한 우리들의 짜증 섞인 동정 위에 더부살이한 것 같지만은 않다.지금보다 훨씬 살이 어려운 시절에도 그들을 부양하기 위해 추가된 부담을 마냥 힘들어하지 않은 것이며, 그들 환유의 특성이 우리 삶에 끼치는 여러 불편이나 혼란을 웃음으로 참아 넘긴 것도 어쩌면 그게 우리가 그들에게 해주어야 할 당연한 보상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 당편이도 그들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녀는 가장 늦게까지우리 곁에 남아 있어 오히려 우리가 남겨두고 떠나지 않을 수 없었던 예외였다. 그렇다. 몸이 떠났든 마음이 떠났든 먼저 그녀를 떠난 것은 우리였다.

--- p. 9

'보자, 참말로 죽기는 죽었나'

장군의 얼어붙은 시체가 도가로 떠메어져 왔을 때, 당편이가 표정 없이 한 말은 그랬다. 그리고 정말로 확인이라도 하듯 숨결도 맡아보고 가슴에 귀도 대어보고 했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염을 하기 위해 옷을 갈아입히려고 장군을 벌거벗기자 갑자기 장군의 아랫도리를 가리며 남의 일처럼 말했다.

'에이구우, 참말로 죽기는 죽었구나. 살아 펄펄할 때는 팔뚝 같던 게, 인제 이게 뭐로? 똑 알라들 손가락만하다'

--- p.191

달이여, 너는 내 사랑을 알고 있는가
무덤도 없이 떠난 그녀를
어느 하늘가를 떠도는지
부서진 가슴으로 내 사랑을 찾아 한없이 헤매었네
만일 그녀를 만나거든 내가 울고있다고 전해다오

달무리 슬픈 그밤 이별의 눈물
안녕히, 안녕, 내 사랑아
다시 만날날을 믿으며
헤어져 멀리 있더라도 언제까지나 잊지 않으리라
달빛속에 사위어 가는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 마지막페이지

니가 아무리 미련하기가 소 같은 머슴놈이라 카지마는, 어째 주인 낯을 깎아내라도 이래 여지없이 깎아내룰라 카노? 나는 새도 궁해 품안으로 날아들믄 안 잡는다카는데 니가 사람 껍데기를 쓰고서, 그래, 명색 사람이 찾앙톤 거를 어예 이래 박대할 수 있노? 보이 하마 내 집안 줄 알고 찾아온 거를, 그것도 살리달라꼬 찾아온 거를, 뭐라? 꺼다 매삔다꼬? 개 끌듯 끌어낸다꼬? 예라 이, 이 숭악하기가 도척 같은 놈아!

--- p.23

그런 면에서 보면 당편이에게 건어물전 영감과의 만남은 그녀 생애에서 처음 있는 성적인 생산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때까지 그녀는 한번도 이성의 전인격적 보호와 배려 안에 서 있어본 적이 없고, 그로부터 불안정한 기능적 생산을 보완받아 보지 못했다. 따라서 우리는 설령 그것이 그녀의 육체적 여성상을 제공한 대가이며, 그래서 용감하고 능력 있는 동성들에 의해 매음으로 규정 받는다 하더라도, 그 무렵의 그녀가 누리던 평온과 자족이 오래 오래 지속되기를 바랐다.

--- p.280

그때 우리는 당편이가 떠나는 당편이의 심경을 섬뜩하게 이해했다. 누군가 말했듯, 존재한다는 것은 그저 <거기에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거기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거기에 속한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거기 있는 다른 존재들과 관계를 맺고있다는 것이 된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존재, 누구 또는 무엇과도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 존재는 없다.

그중에서도 특히 사람의 존재를 존재답게 해주는 소속과 관계는 소통에 바탕한다. 타자와 소통이 없이는 소속도 관계도 없다. 그런데 그 소통은 대개 기호와 인지의 형태로 이루어진다. 기호는 존재의 발신이며 인지는 타자의 수신이다.

어떤 아프리카 인들에게는 남에게 기억되는 시간이 곧 살아있는 시간이라고 한다. 이는 인지를 기억으로 갈음하며 존재를 존재답게 만들어주는 소속 혹은 관계를 소박하게 표현한 듯한데 우리들의 당편이에게도 그랬던 것이 아니었는지.

한번 형성된 기호는 스스로 파괴되거나 지워지는 법은 없다. 타자의 수신 거부나 인출불능만이 그 기호를 파괴하고 지울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무관심 혹은 둔감이라 부르는 주의 소홀은 바로 그 수신 거부의 효과를 가지고, 보다 뒤에 수신된 강력한 신호들의 간섭은 기억의 쇠잔이나 불용과 마찬가지로 그 인출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고향 사람들에게 당편이라는 기호의 특징은 문제적인 데 있었다. 그런데 그녀 생애의 절정과도 같은 그 단옷날 하루가 그런 특징을 지워버렸다. 장터거리 사람들이 이제 당편이도 성하고 똑똑한 자기들과 다름없는 삶으로 편입되었다고 안도하는 순간, 무관심과 둔감이 그들을 덮쳐 당편이라는 기호는 수명을 다했다. 거기다가 현대성이란 말로 뭉뜽거릴 수 있는 여러 강력한 신호들이 사람들을 간섭해 이미 저장된 기억도 인출이 불가능해졌다

따라서 마지막 몇 년 동안 당편이는 분명 장터거리 한 모퉁이에 존재하고 있었지만 수신되지 않아 무의미해진 기호였다. 그녀가 살아있었던 것은 오직 영감에게뿐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홀연 그가 죽자 철저하게 홀로임을 깨닫게 된 그녀는 늙고 병든 코끼리가 스스로 무덤을 찾아가듯 제 갈 곳을 찾아간 것임에 틀림없었다

p294-296.

그날 아침 장터거리 사람들은 거의 비명에 가까운 감탄사로 단오 나들이를 나온 당편이와 영감을 바라보아야 했다. 동네에서 모아준 헌 옷을 계절에 따라 더께 입거나 벗거나 하던 당편이와 회색인지 흰색인지 모를 꾀죄죄한 한복을 무슨 제복처럼 걸치고 있는 영감만 보아온 그들에게는 낯설어도 너무 낯선 그들 한 쌍의 차림 때문이었다. 당편이는 붉은 인조 비단 치마에 자주 고름 남끝동 달린 녹색 나일론 수단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갓 시집온 새댁네에게나 어울릴 색조에 화학섬유 특유의 번쩍거림이 더해지니 그 요란스러움은 보는 사람의 눈이 어질어질할 지경이었다. 영감은 눈부시도록 하얀 포플린으로 지은 한복 차림이었는데 두루마기까지 갖추고 있었다.

--- p.281

출판사 리뷰

『아가』는 『선택』 이후 3년 만에 이문열이 발표하는 장편소설이다. 그러나 작가는 이 작품의 출간을 앞두고 "1991년 『시인』을 발표한 이후 처음 소설을 발표하는 것 같은 기분"이라는 감회를 밝혔다. 이 작품을 구상하며 문학적 변모의 열망이 컸었고 그 만큼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려 했음을 짐작케 하는 말이다.

1997년에 장씨 부인이라는 전형적인 현모양처의 일생을 따라간 『선택』을 발표하여 여성의 미덕 및 사회적 역할을 둘러싼 페미니즘 논쟁에 불을 지폈던 이문열이 이번에 발표하는 소설은 사회 속의 한 개인이 그가 속한 사회 속에서 어떤 기능을 수행하며 어떤 기호로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존재한다는 것은 '거기에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거기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거기에 속한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거기 있는 다른 존재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 된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존재, 누구 또는 무엇과도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 존재는 없다.

『아가』는 정신적, 신체적으로 온전하지 못한 여인 당편이를 주인공으로 삼아 양파의 속처럼 쪼개진 동심원들의 집합 같은 형태로 존재하는 오늘날의 공동체가 거기에 속한 성원들에게 제 기능과 기호를 부여할 수 있는가를 묻고 있다. 이문열은 [작가의 말]에서 『아가』를 '교양 욕구에 지나친 배려를 보내는 일', '미문(美文)의 만연(蔓衍)함에 도취하는 일' 없이 쓰고 싶었다고 밝혔다. '한때는 우리들 곁에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사람', '험한 세상 바람을 탄 가엾은 풀씨 하나'처럼 모질게 살았던 여인의 희극적이면서도 슬픈 삶의 진상을 한여름 밤의 옛날 이야기처럼 들려주는 『아가』는 분명 이문열 문학의 새로운 분기점으로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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