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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추천사 · 6
머리말 · 8

제1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1. 물음 중의 물음 · 18
2. 영혼에 대한 믿음과 회의주의 사이에서 · 28
3. 후손을 통해 영원히 산다? · 40
4. 끝없이 환생한다? · 52
5. 우주로 귀환한다? · 65
6. 소멸하고 싶은 갈망 · 82

제2부 이스라엘의 체험

1.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 · 96
2. 철저한 이승 중심주의 · 101
3. 저세상과 거리 두기 · 109
4. 하느님 품 안에 · 117
5. 부활 신앙의 싹 · 126
6. 여전히 유효한 이스라엘의 통찰 · 134

제3부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온 것

1. 예수님의 선포 · 144
2. 예수님의 권능 행위 · 155
3. 예수님의 무능 · 160
4. 예수님의 부활 · 167
5. 죽은 이들 가운데서 맏이 · 175
6. 새 창조 · 182

제4부 우리에게 일어날 일

1. 하느님과의 최종적 만남 · 195
2. 심판인 죽음 · 211
3. 자비인 심판 · 224
4. 죽음에서의 정화 · 232
5. 그렇다면 지옥은? · 240
6. 한 인간 전체 · 248
7. 세상 역사 전체 · 257
8. 온 피조물 전체 · 265
9. 고대하던 도성 · 278
10. 시간의 상대성에 대해 · 290
11. 영혼 불멸에 대해 · 305
12. 참여에 대해 · 314

제5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1. 죽은 이들을 위한 책무 · 336
2. 그리스도교적 죽음 · 346
3. 영원은 언제 시작되는가? · 357

부록
주 · 376
감사의 글 · 411
옮긴이의 말 - 로핑크, 종말론 · 413

저자 소개 2

게르하르트 로핑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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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rhart Lohfink

1934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출생. 림부르크 교구 사제. 1986년까지 독일 튀빙엔대학교에서 신약성서 주석학을 가르쳤다. 현재 독일 뮌헨에 있는 가톨릭 통합공동체(Katholische Integrierte Gemeinde)에서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으며 성서학자로 또 영적 지도자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의 저서 가운데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분도출판사, 1987), 『예수마음 코칭』(생활성서, 2015), 『주님의 기도 바로 알기』(생활성서, 2018) 등이 국내에서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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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소속 사제로,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광주가톨릭대학교 총장으로 교의 신학을 가르치며 사제 양성에 힘쓰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쇤보른 추기경과 다윈의 유쾌한 대화』와 『예수 마음 코칭』, 『사람아, 그대의 품위를 깨달으라』가 있으며, 논문으로 「예외 없는 희망? 발타살의 ‘지옥’ 담론과 그 종말론적 귀결에 대한 고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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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2월 22일
쪽수, 무게, 크기
416쪽 | 153*225*26mm
ISBN13
9788984816107

책 속으로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오는가?’라는 물음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인간의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는 물음이다. 아무 신문이나 들고 거기 나오는 부고를 자세히 들여다보기만 해도 된다. 거기에는 죽음의 의미를 두고 그리스도교적 또는 비그리스도교적 고백과 철학적 또는 문학적 고백이 이리저리 뒤섞여 있다. 죽음 이후에 대한 물음은 모든 사회를 관통하는 물음이다.
---「제1부 1장 물음 중의 물음」중에서

(오늘날 서구에서 유행하는 영혼의 환생에 관한 세계관과) 인과응보 체계가 처음 보기에는 근사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실제로는 지극히 비인간적이다. 가난과 질병과 위기, 모든 형태의 사회적 차별이 자신의 잘못과는 전혀 무관한 원인들에서 기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가난이 자연재해에서 기인할 수도 있고, 아니면 훨씬 더 이전의 불의한 구조나 단순히 그 시대 권력자의 야만적인 폭력에서 기인할 수도 있다.
---「제1부 4장 끝없이 환생한다?」중에서

(인간이 죽음 이후에) 나무와 산과 별똥별 속에서 흩어지는 것을 행복하게 여기는 이 전반적인 해체 신비주의를 들여다볼 때면, 이런 의문이 생긴다. 인간의 생물학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는 그런 것과는 정확히 정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곧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이 늘 더욱 강화되는 쪽으로, 본능과 억압에서 자유롭게 되는 쪽으로, 집단주의의 초권력超勸力에서 해방되는 쪽으로, 인격화 쪽으로, 각 개별자의 대체 불가능성을 더욱 강력하게 깨닫는 쪽으로 말이다.
---「제1부 5장 우주로 귀환한다?」중에서

죽음 이후에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신앙 안에서만 알 수 있고, 결국 신앙을 토대로 해서만 이야기할 수 있다. 이 점을 나는 여기서 분명히 밝혀 둔다. 나는 자연 과학자나 종교학자, 또는 철학자로서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다. 나는 그리스도교 신학자로서, 달리 말해 하느님 말씀을 해석해야 하는 사람으로서 이 글을 쓴다. 그러니 다시 한번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곧 죽음 이후에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에 대해 우리는 오롯이 하느님을 통해, 그리고 듣는 신앙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리스도교 전통은 이를 ‘계시’라 일컫는다.
---「제2부 1장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중에서

구약 성경을 펼치고, 죽음이 무엇이고 죽음 이후에 무엇이 오는지 그 답을 찾고자 한다면, 일단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현상과 맞닥뜨리게 된다. 곧 저승에 대한 모든 종교적 관념에 대한 깊은 회의주의와 만나게 되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구약 성경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알지 못한다. 죽음으로 끝이다. 사무엘기 하권에서, 요압 장군이 다윗 임금에게 보낸 여인이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반드시 죽기 마련이니, 땅바닥에 쏟아져 다시 담을 수 없는 물과 같습니다.”(2사무 14,14).
---「제2부 2장 철저한 이승 중심주의」중에서

이스라엘에서 처음 오랫동안에는 부활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주님hwhy에 대한 신앙이 가나안의 사자死者 숭배나 이집트의 저승 중심주의와는 양립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 세상이 바로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바라신 세상이라는 데에도 그 이유가 있었다. 세상은 주님께서 바라시고 기대하신 것, 그분의 피조물이었다. 그분이 바라신 것은 저 너머의 그 어떤 가상의 세계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이었다. 이스라엘은 이 점을 명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세상과는 동떨어진 저승 중심주의의 모든 의식과 문화는 당연히 의혹의 대상이 되었다.
---「제2부 4장 하느님 품 안에」중에서

부활 신앙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은 이스라엘에서 비교적 후대에 등장한다. 그 이유는 이미 살펴본 대로다. 이스라엘은 주변 세계의 사후 의식과 문화, 스스로 영원한 생명을 확보하려는 시도에서 일단은 거리를 두어야 했다. 이스라엘의 자립이 이 세상에서 충분히 굳건하게 확보된 다음에야 비로소 새로운 행보가 있을 수 있었다. 곧 하느님께서 선사하시는 부활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이 등장할 수 있었다. 부활을 통해 ‘먼지의 땅’인 셰올에서의 그림자 같은 존재 방식에서 벗어난다는 관념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제2부 5장 부활 신앙의 싹」중에서

가톨릭 교회는 재의 수요일에 신자들의 머리에 재를 뿌리면서 사제를 통해 이렇게 말한다. “사람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재의 수요일, 재를 머리에 얹는 예식). 창세기 3장 19절에서 따온 이 말씀은 사순 시기를 멋있게 시작하기 위한 세련된 미사여구가 아니다. 머리에 재를 얹는다는 것은 아주 근본적인 차원을 가리킨다. 곧 부활을 준비하는 보속의 시기인 사순 시기는 함께 모인 공동체가 먼지와 같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먼지는 차갑게 식은 별들에서 왔다. 그리스도인은 이스라엘의 그러한 냉철한 인식에 빚을 지고 있다. 이 작은 민족과 그들의 신학자들이 사후 세계에 대한 주변 민족들의 압도적인 문화에 맞서 그러한 인식을 충실하게 지켜 냈다. 이스라엘의 그러한 통찰 없이는 부활의 기쁨도 없다.
---「제2부 6장 여전히 유효한 이스라엘의 통찰」중에서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기도의 모범으로 주신 주님의 기도에는 죽음이나 저세상, 죽은 이들의 부활에 관한 말이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주님의 기도에서는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고 그 나라가 오기를 간구한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이름이 어떻게 거룩히 빛날 수 있는가? 이는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백성이 됨으로써 가능하다. 이를 이해하려면 에제키엘서 36장 16-28절을 보아야 한다. 하느님 나라는 어디로 임하는가? 당연히 이 세상, 이 땅, 이승의 역사로 임한다.
---「제3부 1장 예수님의 선포」중에서

예수님이 몸소 실천하시고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도 요구하신 절대적 비폭력에는 결과적으로 무력함이, 철저한 무능이 뒤따른다. 예수님의 무능은 하느님과 그분의 구원 행위에 온전히 자신을 내맡기는 일이다. 그리하여 그러한 무능이 그 어떤 무기보다, 그 어떤 형태의 완력보다, 타자를 상대로 자신을 관철시키려는 그 어떤 강압보다 더 강하다. 죽음의 힘에 맞선 예수님 투쟁의 최고의 정점은, 그분이 죽음을 피할 수도 있었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그 정점은 그분이 인간의 폭력에 완전히 무력하게 내맡겨졌다는 데에, 그 끔찍한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남김없이 하느님께 신뢰를 두셨다는 데에 있다.
---「제3부 3장 예수님의 무능」중에서

첫 증인들이 체험했던 것은 부활하신 분의 바로 그러한 ‘전체성’이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갈릴래아에서부터 함께 떠돌던 분, 자신들을 가르치고 이끌어 주시던 분으로 체험했다. 그들은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바로 그분으로 체험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당신 몸에 수난의 상처를 지니고 계신다. 그분에게 그 상처는 영광을 받은 상처로 남아 있다. 부활은 한 인간이 살아생전에 겪었던 모든 순간이 하느님과 함께하는 영원한 삶으로 진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후대의 그리스도교 성화들 역시 그분 몸에 난 상처를 비롯해 부활하신 분의 온전한 육체성을 기꺼이 묘사한다. 그리고 이것이 예수님 부활의 증인들이 겪은 놀랍고도 조작 불가능한 체험에 정확히 부합한다. 부활하신 분은 바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그 예수님이셨다.
---「제3부 4장 예수님의 부활」중에서

죽은 이들의 부활은 순전히 은총이지만, 그럼에도 이는 하느님의 창조 계획에 속한다. 창조는 처음부터 완성을 목표로 계획되었다.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영광, 하느님 안에서 사는 고향 집이 그 목표다. 따라서 죽은 이들의 부활은 순전히 자연적인 사건이 아니라 오롯이 하느님의 선물이다. 또한 세상의 지속적인 창조는 이미 하느님의 순전한 호의이며 그분의 창조적인 사랑의 행위다. 그리고 이렇게 보면, ‘세상 창조’와 ‘부활에서의 새 창조’는 하나로 모아진다. 기본적으로 그 둘은 서로 연관된 사건이며, 둘 다 흘러넘치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생겨난다.
---「제3부 6장 새 창조」중에서

죽은 이가 정의의 ‘체계’에 따라 책임을 지고 심판을 받는다는 (기타 종교와 문화권의) 생각은 어쨌든 모두 문제가 있다. 오솔길, 다리, 칼, 심연, 감독관, 법정, 심판 위원회 등 여러 종교의 수많은 개념은 신화적 세상 체계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그런 체계가 정의를 보장한다고 여겨진다. 바로 여기서 유다-그리스도교적 사고와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성경적 신앙에 따르면, 죽은 이를 심판하는 것은 어떤 체계가 아니라 살아 계신 하느님이시다. 하느님 홀로 모든 정의의 근원이시다. 그분은 정의의 화신이나 상징도 아니시고, 정의의 ‘소유’자도 아니시다. 그분 자신이 정의이시다. 하느님은 온전하고 절대적인 정의이시다. 그리하여 그분은, 당신 사랑에서 창조된 세상이 당신 자신을 반사하는 의로운 세상이 되는 것 외에 다른 것을 결코 바랄 수 없으시다.
---「제4부 2장 심판인 죽음」중에서

거룩하신 하느님 앞에서의 정화는 있어야만 한다. 하느님의 의화 은총이 인간 안에 굳어진 모든 고집과 반항을 그저 아무렇지 않게 덮어 버리거나 아예 무시해 버린다면, 의화는 죄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마법이 되고 말 것이다. 하느님이 인간 안에 있는 불행과 악에 주술을 부려 달콤하게 미화시키는 일이 될 뿐이다. 그럴 수는 없다. 하느님은 당신 피조물을 그런 식으로 허투루 취급하고 넘어갈 수 없으시다.

그분은 피조물의 정화와 변모를 원하신다. 그분은 당신과 반대되는 것을 적당히 얼버무리고 덮어 둘 수 없으시다. 인간에게는 이 정화가 끔찍한 아픔이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기도 하다. 한편으론 자신의 불행과 악에 대한 처절한 아픔과 다른 한편으론 끝없는 기쁨이 모두 하나로 엮여 하느님의 빛 속으로 들어선다.
---「제4부 4장 죽음에서의 정화」중에서

지옥은 끔찍한 가능성으로 존재한다. 그리하여 성경은 지옥에 대해 말한다. 신학적으로 지옥을 간단히 제거하고, 그 자리를 종말론적 ‘만유 회복설apokatastasis’로 대체한다면, 적절하지 않다. 인간에게는 악독함의 능력이 있는바, 그 악과 독에 대한 말과 자신이 스스로 만드는 지옥에 대한 말을 세상에서 치워 버리는 것이 세상을 더 밝고 인간적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그 어두운 심연을 더욱 모호하게 할 뿐이다.

지옥에 대한 말로 인해 우리는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는 우리 일상의 선택들에 우리의 시선을 돌리게 된다. 우리는 날마다, 세상의 악을 쉽게 허용하며 고통과 불의와 폭력에 눈을 감을지, 아니면 인내와 복음의 정신으로 우리 자신의 악과 세상의 악에 맞설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제4부 5장 그렇다면 지옥은?」중에서

부활은 한 인간 전체가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을 지니고 하느님께 도달하는 것이다. 온갖 것으로 가득 찬 삶의 역사를 지니고서 말이다. 그 밖에도, 한 개인의 삶의 역사는 다른 수많은 이들의 역사와 연결되어 있고, 더 나아가 모든 시대의 변화 및 가치관의 세계들과도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았다. 따라서 각 개인과 함께 모든 이의 역사도 하느님께 도달하지 않을 수 없다.
---「제4부 8장 온 피조물 전체」중에서

이제껏 내가 인간과 하느님의 최종적인 만남에 대해 말한 모든 것을 동일한 방식으로 신약 성경은 빠짐없이 다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이야기한다. 우리의 죽음은 예수님과의 엄청난, 최종적인 만남을 의미한다.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신다. 십자가에 못 박히셨지만 권능과 영광을 지니신 분으로 나타나신다. ‘그분’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그분’이 악과 선을 가르시고, ‘그분’이 영원한 삶을 약속하시며, ‘그분’이 우리의 덧없는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의 형상으로 변모시켜 주실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신약 성경이 예수님에 대해 하는 말이다.
---「제4부 12장 참여에 대해」중에서

죽음은 예수님에게서와 마찬가지로 무력함, 힘을 잃음, 내려놓음, 모든 것을 내맡김을 의미한다. 그러면서도 죽음은 바로 최종적으로 생명에 이르는 것, 자신의 온 삶을 얻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의미대로 그렇게 그리스도교적으로 죽을 수 있다면,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렇게 살고 죽은 한 그리스도인을 그의 임종에서 동반할 수 있다면,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여기 서로 동떨어진 두 세계가 있다. 한쪽 세계에서는 사람들이 죽음 이후에 대해 아무 생각 없이, 짧게, 고통 없이, 걱정에서 자유로이, 평탄하게 죽고 싶어 한다. 다른 쪽 세계에서는 사람들이 희망에 가득 차 마지막까지 신뢰하는 가운데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싶어 한다. 우리는 어느 세계의 사람인가?

---「제5부 2장 그리스도교적 죽음」중에서

출판사 리뷰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가
새로 쓴 현대인을 위한 종말론


우리 인생에서 죽음처럼 자명한 일도 없는 반면 죽음과 그 이후처럼 알 수 없는 베일에 싸인 ‘신비’도 없어 보인다. 부활은 그리스도교의 가장 핵심 사건이지만 성탄처럼 우리 마음에 잘 와 닿지는 않는다. 문학이나 미술 같은 예술 작품에서도 그러하다. 교회의 사말(四末: 죽음, 심판, 지옥, 천국) 교리 역시 이성理性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우리 몸은 죽은 지 5분이 지나면 부패가 시작된다는데, 그럼에도 우리의 전존재가 심판을 받는다면, 그것은 어떤 상태인지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연옥, 지옥, 천국도 ‘이해’는 포기한 채 믿거나 아니면 믿지 않거나 할 뿐이다.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는 『죽음 부활 영원한 생명 바로 알기』에서 죽음 그 이후를 부활과 영원한 생명에 초점을 두면서 심판, 연옥, 지옥, 천국, 피조물의 완성 등에 대해 과거의 신학적 언어를 되풀이하거나 정리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대인이 알아듣고 받아들일 수 있는 새로운 언어로 책임 있는 답변을 한다.

세계적인 성경학자인 그는 당연히 신구약 성경을 바탕으로 해석학적 관점에서 바라본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신앙 전통에서, 또 과거와 현재의 위대한 신학자들의 사유에서도 답을 찾기 위해 애쓰며,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선물로 주신 최고의 재능인 인간 이성도 풀가동한다. 그래서 자신이 믿고 있는 바를 이해하고 싶은 현대인들의 이해 추구를 돕는다. 일례로 심판에 대한 그의 설명 일부를 보자.

심판은 하느님 또는 그리스도께서 충격적인 장면 가운데 등장하시어 무자비한 선고를 내리시고 그에 따른 배상을 요구하시는 게 아니다. 하느님께서 높은 자리에 앉으시어 이런 이런 처벌과 배상을 하라는 판결문을 내리시는 게 심판이 아니다. 본질에서 절대적 진리이신 하느님 앞에서 인간이 스스로 자기 자신을 심판한다. 우리 스스로가 판결을 내린다.

물론 살아 계신 거룩하신 하느님 앞에서 우리 자신이 스스로 판결을 내린다는 말만으로 끝난다면, 아직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우리 자신 때문에 생겨난, 그리하여 죽음에서 가차 없이 내 시야에 들어올 ‘희생자들’ 앞에서도 판결을 내려야 한다.

내가 도울 수 있었음에도 돕지 않았던 수많은 이들, 내가 위로할 수 있었음에도 위로하지 않았던 이들, 내가 그들에게 신앙의 모범이 될 수 있었음에도 그렇지 못했던 이들, 내가 무시하고 실망시키고 부끄럽게 하고 경멸하고 오류와 잘못으로 이끌었던 수많은 이들, 내가 내 목적만을 위해 이용했던 수많은 이들 앞에서도 그래야 한다. 그들 모두가 죽음에서 내 앞에 모여와 나를 바라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그들 역시 나에게 심판이 될 것이다. 게다가 더 나아가, 나 때문에 ‘희생된 이들’을 심판에서 만나게 되면, 내가 그들에게 가했던 모든 고통을 나 역시 그때 비로소 겪게 될 것이다.

이처럼 죽음에서 하느님과의 만남은 진리와의 만남이 될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진리, 다른 이들에 대한 진리, 세상에 대한 진리,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에 대한 진리와의 만남이 될 것이다. (제4부 2장 심판인 죽음, 222-223쪽)

로핑크 신부는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심판’을 기꺼이 ‘희망’할 수 있다고 한다. 진리 앞에서 우리는 기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앞에서 우리는 자신이 간절히 원했던 바가 무엇이었는지를 체험하고, 죄와 무죄로 서로 엮인 것들이 풀려 정말로 선한 것이 드러나고, 위선이 벗겨지며, 자기 안의 악이 밝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을 관통하는 하느님의 진리 앞에서 그렇게 다 밝혀지는 것은 분명 참으로 온전히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며, 어쩌면 그때에 하느님의 한없는 자비도 밝히 드러날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죽음과 부활에 대한
우리의 궁극적 물음과 답


로핑크 신부는 『죽음 부활 영원한 생명 바로 알기』를 쓰게 된 이유를 머리말에서 밝힌다. 사실 이 물음들이 자신의 물음이기도 했다고 고백하는 로핑크 신부는 구순을 앞두고 있어, 누구보다 죽음과 부활을 실감하며 간절히 묵상했을 것이다. 그가 밝힌 물음은 대략 다음과 같다.

1) 많은 이들이 죽음 문제에 직면하기보다 ‘자연으로의 소멸’, ‘후손을 통한 영생’, ‘끝없는 윤회’ 등과 같은 임시방편적인 생각으로 도피하는데, 이에 대한 진정한 해결책은 없는가?
2) 구약 성경에는 왜 오랫동안 부활에 대한 희망을 찾을 수 없는가?
3) 예수님 부활의 참의미는 무엇인가? 부활에 대한 희망을 확증할 뿐인가 아니면 예수님 부활 없이는 우리 부활도 없고 부활 자체에 대한 숙고도 이루어질 수 없는 기초적인 출발점인가?
4) 부활은 언제 시작되는가? 아득한 미래인 종말인가? 죽음 그 즉시인가?
5) 우리가 부활한다면, 추상적인 인간이 부활하는가? 아니면 생각하고 의도하고 열망하고 사랑했던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그 사람의 온 역사까지도 부활하는가?
6) 우주와 물질과 동물은 어떻게 되는가? 세상에 나올 기회조차 없는 수많은 낙태아들은 어떻게 되는가? 그들에게도 부활이 있는가?
7) 천국에는 하느님만 계시는가? 아니면 우리가 사랑했던 모든 것이 있는가?

이 모든 물음에 대해 로핑크 신부는 『죽음 부활 영원한 생명 바로 알기』로 성실하고 설득력 있게, 그리고 때론 감동적으로 답한다. 이 책은 총 5부로 구성돼 있는데, 첫 1-3부에서 영혼에 대한 고대의 믿음, 저승에 대한 오늘날의 생각, 예수님의 선포, 신약 성경의 부활 신학 등을 주로 역사적 관점에서 살펴본다. 이어서 제4부는 핵심 내용으로, ‘우리에게 일어날 일’을 말하며, 5부에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이야기한다. 로핑크 신부는 독자를 지루하게 하고 싶지 않아 교도권의 신학적 가르침과의 논쟁은 미주로 달아서 본문 독서는 방해하지 않으면서 더 관심이 있는 이는 미주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게 한다.

사순과 부활 시기의 준비를 위해
정순택 대주교의 추천


서울대교구장 정순택 대주교는 오는 사순 시기와 부활 시기를 준비하면서 읽을 책으로 『죽음 부활 영원한 생명 바로 알기』를 추천했다. 정 대주교는 세상을 오도하는 그릇된 종교가 득세하는 오늘날에는 올바른 종말론 연구가 더욱 절실하다며 이 책의 출간 소식을 반긴다. 그래서 서울대교구장으로서는 이 책을 첫 번째로 추천하며, ‘자신이 믿는 바를 올바로 이해하고 싶은 오늘의 신앙인에게’ 일독을 권한다.

오늘날 세상을 오도하는 그릇된 종교에는 그릇된 종말론이 뒤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올바른 종말론 연구가 더욱 절실해진 이 시대에,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님의 이 책의 출판이 더욱 반갑습니다. 자신이 믿는 바를 올바로 이해하고 싶은 오늘의 신앙인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해 드립니다. 무엇보다 사순과 부활 시기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자기 자신의 죽음과 부활 및 영원한 생명을 깊이 묵상하도록 이끌어 주리라 믿습니다. (정순택 대주교의 추천사, 6-7쪽)

궁금했던 이유에 대한 놀라운 답들
구약 성경에서는 왜 부활 신앙이 잘 보이지 않는가?


학자들은 구약 성경에서는 아주 늦게 거의 신약 시대가 가까운 시기에 집필된 성경에서만 부활 신앙이 보인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심지어 신약 시대에 이르러서도 ‘오경’만을 믿는 사두가이들은 예수님께 부활이 없다는 증거로 그들의 형사취수兄死娶嫂 풍습을 들어, 후사 없이 죽어 일곱 형제의 아내가 되었던 여인은 부활한다면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고 시비를 걸 정도였다.
그래서 구약 성경 역시 그리스도교 정경인데, 왜 구약에서는 유독 부활 신앙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까 하는 의구심이 생기곤 한다. 이에 응답이라도 하듯 로핑크 신부는 구약 성경에는 왜 부활 신앙이 잘 보이지 않는가에 대한 새롭고도 명쾌하면서도 자세한 답을 내놓는다.

이스라엘에서 처음 오랫동안에는 부활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주님hwhy에 대한 신앙이 가나안의 사자死者 숭배나 이집트의 저승 중심주의와는 양립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 세상이 바로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바라신 세상이라는 데에도 그 이유가 있었다. 세상은 주님께서 바라시고 기대하신 것, 그분의 피조물이었다. 그분이 바라신 것은 저 너머의 그 어떤 가상의 세계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이었다. 이스라엘은 이 점을 명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세상과는 동떨어진 저승 중심주의의 모든 의식과 문화는 당연히 의혹의 대상이 되었다. 물론 이 세상에 대한 그러한 확신은, 하느님 백성이 자신의 하느님이 끝까지 충실하시다는 사실을 신뢰하는 한에서 유지될 수 있었다. (제2부 4장 하느님 품 안에, 124-125쪽)

아울러 특히 시편 등에 담긴 감동적인 부활 신앙도 찾아내어 독자에게 들려준다. 그래서 그의 인사이트 가득한 성경 해석에 독자는 매료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시편의 감사와 간청들을 살펴보면, 특이한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곧 후대에 나타나는 부활에 대한 믿음을 앞당겨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부활에 대한 믿음’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말은 찾을 수 없다. 다만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표현들로 그 믿음을 드러낸다. 모든 것이 아직은 유동적이다. 하지만 수많은 시편 구절을 보면, 하느님 품 안에 있다는 확신이 나타난다. 그리고 하느님 품 안에 있는 것에는 한계가 없어서 굳이 ‘죽은 이들의 부활’이라는 말을 쓸 필요조차 없다는 인식이 드러난다. (제2부 4장 하느님 품 안에, 118-119쪽)

올바른 그리스도교 종말론이 절실한 때
신학적으로 깊이 있고 설득력 있는 종말론


큰 물의를 일으키는 종교들의 배경에는 문제 있는 종말론이 자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가톨릭 신자들은 자신이 믿는 바에 대한 지식이나 확신이 부족하여 그런 종교들의 ‘밥’이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세계적인 성경학자 로핑크 신부가 해박한 성경 지식에 인문학적, 과학적 지식까지 더하여 가장 현대적인 종말론을 펼치는 『죽음 부활 영원한 생명 바로 알기』에 대해 책을 옮긴 광주가톨릭대학교 총장 김혁태 신부는 옮긴이의 말에서 이렇게 평한다.

그리스도교 신학은 인간 존재의 근본적 갈망과 체험, 그리고 하느님의 계시에 따른 신앙 진리를 바탕으로 ‘마지막 것’, ‘마지막 때’, 곧 ‘종말’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스도교 ‘종말론’은 기본적으로 죽음과 죽음 이후에 대한 신학적 담론이다. 하지만 이 종말론은 각양각색의 이설과 이단이 생겨나는 온상이기도 하다. 명확한 답변이 불가능한 차원을 인간 언어로 번역하고 설명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게르하르트 로핑크의 『죽음 부활 영원한 생명 바로 알기』는 신학적으로 깊이 있고 설득력 있는 시각을 보여 주는 종말론 참고서라 할 만하다. 종말과 관련된 온갖 물음에 대해 종교학적, 성서적, 교의적, 실천신학적 측면에서 흥미롭고도 뛰어난 통찰을 제공한다. (옮긴이의 말, 414쪽)

정통 교의신학자인 김혁태 신부는 쟁점이 되는 부분에서는 세심한 이해가 필요하다며, “특히 ‘죽음에서의 부활’, ‘중간 상태’, ‘시간의 상대성’, ‘영혼 불멸’, ‘참여’에 대한 개념과 서술 등에서 여러 신학적 숙고 사이의 긴장이 엿보인다.”라는 말을 덧붙이며, 사실 모든 종말론이 이러한 긴장을 비껴갈 수 없다고 말한다. 역자의 종말에 대한 희망의 글이 아름다워 여기 옮긴다.

어쨌거나 만물에는 끝(죽음)이 있고, 전체적으로 보아 여기서 가장 기본적이고 중대한 물음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든 우주적인 차원에서든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오는가?’라는 것이다. 답변은 크게 둘로 갈릴 수 있다. 곧 단순히 소멸로 끝난다는 것과 부활과 영원한 삶이 온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 양자를 두고 파스칼의 말처럼 내기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다(아가 8,6-7 참조)는 것만큼은 믿을 수 있지 않을까. 사랑은 사랑하는 ‘너’가 죽지 않기를 바란다. 사랑은 불멸을 갈망한다. 더군다나 그 사랑이 하느님의 사랑이라면 어떻겠는가. 온 피조물을 존재로 불러내시고 그 존재를 한없이 긍정하시는 하느님께서는 당신 사랑을 어떤 경우에도 결코 철회하지 않으실 것이다. 누군가가 그 사랑을 자기 고집으로 영원히 거부한다(지옥) 해도 말이다.

그러니 우리에게 예수님이 계신 게 얼마나 다행이고 좋은 일인가! 그분이 우리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이 결정적으로 드러났다. 죽음 너머로도 우리를 놓지 않으시고 끝까지 책임지시는 하느님의 그 사랑이!

결국 죽음과 죽음 이후, 곧 종말에 관한 모든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라는 문제와 직결된다.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과 그 사랑의 충실성을 믿는 이는 영원을 희망할 수 있다. 나아가, 믿고 희망하는 이는 사랑을 향유할 수 있다. 살아생전에도, 죽음 이후에 영원한 삶에서도! (옮긴이의 말, 414-415쪽)

도대체 죽음이란 무엇일까?
죽음의 내적 본질


죽음을 ‘살아 계신 하느님과의 본격적인 만남’이라 정의하는 로핑크 신부는 사실은 죽음 이전에도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새에 이미 하느님을 만나고 있다고 귀띔한다. 우리는 무언가를 열망하면서, 행복을 맛보면서, 애원과 슬픔과 좌절을 맛보면서, 그리고 기도하거나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봉사하면서 하느님을 만난다고 한다. 그러나 죽음에서의 하느님과의 만남은 ‘결정적이고 영원한’ 것이라고 한다.

죽음 이전의 모든 만남에서 하느님은 알 수 없는 분으로 머무르신다. 그분은 마치 침묵하시는 듯하다. 그분은 끊임없이 뒤로 물러서시는 것처럼 보인다. 그분을 따르겠다는 모든 맹세도, 그분에 대한 이해를 시도하는 모든 말도 공허 속으로 사라지는 듯하다. 그분은 숨어 계신 하느님으로 머무르신다. 그리고 이제 죽음에서 그분은 당신 얼굴을 드러내신다. (제4부 1장 하느님과의 최종적 만남, 195쪽)

『죽음 부활 영원한 생명 바로 알기』에서 로핑크 신부는 죽음의 내적 본질은 하느님과의 만남인데, 예수님의 경우에는 아들과 하느님 아버지와의 놀라운 만남이고, 우리 죄인의 경우에는 절대적으로 거룩하신 분과의 만남으로, ‘복된 놀라움이면서 동시에 모든 것을 뒤흔드는 만남’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만남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만남의 총화이고 목표점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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