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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4
낯선 땅으로 하느님의 창조는 공동체를 목표로 한다 12 하느님의 이름 21 그 땅은 어디에? 28 광야의 싸움 35 나오미와 룻 41 엘리야가 죽기를 간청하다 46 엘리야의 후계자 53 천상과 지상의 전례 61 신앙은 폭력을 낳는가 67 선택에 따른 짐과 행복 80 반항의 역사 88 믿음의 기쁨 예수님의 세례 96 죽음과 부활인 세례 104 나병 환자의 간청 111 자캐오의 기쁨 119 들음과 행함 127 신랑을 기다림 134 따름의 무거움과 가벼움 140 변모의 산에서 148 믿음의 힘 156 믿음의 두 차원 163 어떻게 믿음을 되찾을 수 있는가 172 근심 걱정을 벗어난 삶의 토대 179 물 위를 걷다 189 거리를 두고 흔들림 없이? 197 모든 이성을 뛰어넘어 204 하느님 나라 하느님 나라는 어떻게 오는가 214 하느님 나라의 생물학 222 우리가 받은 선물 231 성경적 윤리의 기초 240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이중 계명 248 하느님 나라의 식탁 질서 255 가난한 과부의 풍요 263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 271 기억은 구원이 될 수 있을까? 280 흘러넘치는 구원 287 성찬례의 감사 기도와 삼위일체 하느님 293 교회는 어떻게 성장하는가 300 축제의 시간 사람의 아들이 오실 때 308 대림 시기의 임박한 기다림 315 구유도 목자도 없는 성탄 323 성탄의 평화는 다르다 331 경배의 기적 339 재의 수요일의 결심 348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의 탄원 356 부활의 알렐루야 362 부활 팔부 축제 월요일에 370 가장 긴 부활 이야기 377 부활은 오늘 일어난다 384 그리스도 승천 축제 391 우주에서 아무 의미 없이? 399 성령은 보이는 분이신가 406 성령은 누구이신가 414 모든 성인 대축일 420 그리스도 왕 대축일의 현실성 428 성경 찾아보기 435 옮긴이의 말 446 |
Gerhart Lohf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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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창세기 2장의 이야기가 다 지난 과거가 결코 아니라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여전히 갈빗대를 붙들고, 남자와 여자 사이의 함께함을 위해 힘을 쏟고 계십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나온 교회라는 새 가족을 붙들고 여전히 일을 하십니다. 교회는 여전히 길 위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교회를 통해 아직도 끊임없이 쉬지 않고 세상을 향해 창조의 일을 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당신의 협력자가 되라고!
--- p,20 마르코 복음서 10장 29-30절의 의미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곧 예수님의 제자들이 버린 집과 토지는 거룩한 땅에서 차지할 자신의 몫이었던 것입니다. 그 몫이 이제 그들에게는 없습니 다. 하지만 그렇다고 약속의 땅에서 차지할 그들의 몫이 소멸한 것은 아닙니다. 바르나바와 마찬가지로, 예수님 주위에 모인 새 가족이 제 자들의 ‘땅’입니다. --- p.30 룻이 나오미에게 말했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께 이렇게 속삭여 본 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예수님, 저는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당신이 가시는 곳으로 저도 가고, 당신이 머무시는 곳에 저도 머물렵니다. 당 신 백성이 저의 겨레요, 당신의 하느님이 제 하느님이십니다. 영원히, 아무것도 당신과 저 사이를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 p.45 ‘나’라는 집이 이미 다 들어차 있기 때문에, 하느님을 위한 자리는 더 이상 없습니다. 그분이 오시어 문을 두드리실 때, 우리는 모두 무언가에 정신없이 열중하고 있지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또 전혀 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렇기 때문에 정말로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그런 기적들 때문에 교회는 살고, 세상도 삽니다. --- p.54 선택받는다는 것은 하나의 짐이자 끊임없는 책임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커다란 행복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 삶에서 가장 큰 행복인지도 모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종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에게 더 큰 것을 보여 주심으로써 그에게 응답하십니다. --- p.86 옛것에서 탈출exodus을 감행하는 사람만이, 적어도 일정 시간만큼은 그렇게 하는 사람만이 새롭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자신이 머무르는 요르단 광야로 사람들을 오게 합니다. 사람들은 거기서 공개적으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삶을 새롭게 바라볼 힘을 얻습니다. 집에서는 그런 일이 수천 배는 더 어렵지요. --- p.97-98 자캐오는 기쁨에 충만하여 예수님을 자기 집에 맞아들입니다(루카 19,6 참조). 이제 자신의 삶을 바꾸고, 자신의 온 삶을 뒤집어서 새로 세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에게는 이 모든 것이 어려운 일도 무거운 짐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난 새로운 체험이 그에게 기쁨을 샘솟게 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이 기쁨이야말로 그가 회심할 수 있는 힘입니다. --- p.126 믿음은 자기 자신에게서 하느님의 것으로 온전히 돌아서는 방향 전환입니다. 이 전환이 깊을수록, 믿는 이는 스스로에 대한 자신의 욕구를 벗어나 다른 이가 자신을 규정하도록 모든 것을 내려놓습니다. 마치 종처럼 다른 이의 뜻에 자신을 내맡깁니다. 자립성과 자기 실현을 목표로 하는 우리 시대의 인간 중심주의와는 정반대로 가는 것이지요. --- p.169 하느님은 바로 비천한 가운데 당신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겉보기에 무수한 실패 속에서, 위기 한가운데서, 심지어는 이름 없는 고통들 속에서 자주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가 우리 자신의 노력과 영광 때문이라고 내세우고 싶은 유혹에 우리가 결코 빠지지 않도록! --- p.221 하느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사는 삶이 시작된 곳에서는 우리의 약점들을 숨길 필요가 더 이상 없습니다. 누구나 다 약하다는 사실이 거기서는 명명백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이 모두 복음서가 말하는 가난한 이, 장애인, 다리 저는 이, 눈먼 이들이기 때문입니다(루카 14,13 참조). 거기서는 이제 모든 상처가 치유될 수 있기에, 누구나 기꺼이 자신의 상처들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 p.260 하느님 나라가 아직도 아무 제약 없이 온전히 현존하지 않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여전히 머뭇거리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여전히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불신앙이 곳곳에 널려 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는 여전히 온전한 현실이 될 수 없습니다. --- p.319 회심은 말하자면 좋은 결심으로 가득 들어찬 서랍이 아닙니다. 회심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과 함께하시는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는 데서 일어나는 속 깊은 사건이고, 결국 이 역사와의 만남을 통해 비로소 가능하게 되는 일입니다. 회심은 하느님께서 세상에서 새롭게 마련하시는 새것을 조금이라도 맛보는 데서 출발합니다. 보고 만지는 일도 맛보는 일도 없이 삶 전체의 방향을 어떻게 온전히 바꿀 수 있겠습니까? 전에는 모르던 기쁨을 맛보게 될 때, 비로소 회심이 가능합니다. --- p.353 성령께서는 신앙인들을 서로 이어 주는 그 ‘사이’이십니다. 성령께서는 그 어떤 간격도 다 이어 주십니다. 한국에 있는 그리스도인이든 독일에 있는 그리스도인이든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게 해 주십니다. 우리가 서로 가까이 존재하게 해 주십니다. 우리가 서로 하나의 뜻을 지닐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 p.4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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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풍요로움
새로운 발견의 가능성 이 세상에는 수많은 길이 있다. 그 중에서도 믿음의 길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놀랍고도 은혜로운 길이다. 그러나 그 놀라움과 은혜로움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믿음이 작고 약하다고 여기며 믿음을 더해 달라고 청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청원은, 어느 정도의 믿음은 이미 갖고 있다는 생각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니까 믿음을 더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일 게다. 저자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는 루카 복음서의 표상을 빌어 믿음의 본질적인 단면에 대해 말한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6). 로핑크 신부에 의하면, 바다에 심겨지는 이 돌무화과나무처럼 믿음은 근본적으로 삶의 방향을 새롭게 정하는 것이어서, 그런 믿음에는 적고 많고 하는 문제란 있을 수 없다. 오직 ‘믿느냐’ ‘믿지 않느냐’ 둘 중에 하나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믿음은 자신을 온전히 새롭게 세우는 것이지요. 곧 믿음은 양자택일의 결단을 요구합니다. 믿든지 아니면 믿지 않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하느님의 다스림에 전적으로 자신을 내맡기든지, 아니면 옛 세계에 그대로 붙박인 채 남아 있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자신이 머무는 곳에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 새것을 향해 그저 고개만 까닥하고 만다면, 결코 믿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의 힘, 159쪽) [믿음의 재발견]은 이렇듯 그 풍요로움을 다 길어 올릴 수 없는 성경에서 새로운 발견을 하도록 이끌어 준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으며 믿음에 대해서도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다. 나무를 옮겨 심는 믿음에 대한 말씀이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 분명하기 때문이다. 로핑크 신부는 이를 하늘과 땅 사이에 뻗어 있는 여정으로 비유하며 들음과 행함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말하자면, 하느님 나라는 생각이나 마음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화해 위에 건설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새 사회, 예수님은 바로 그 사회를 위해 당신 제자들에게 끊임없는 화해를 요구하신다. 믿음의 두 차원 내용과 실천 오늘날 ‘믿음’이라고 말할 때, 우리 그리스도인은 ‘믿어야 하는 내용’을 먼저 떠올린다. 이를테면 신경에 나오는 고백들이다. 또는 교회가 정식으로 가르치는 교리를 들며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믿음의 내용은 구체적이다. 우리가 ‘전달된’ 진리를 믿기 때문이다. ‘전달된’ 진리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보다 세상과 ‘역사’ 한가운데서 일어난 사건들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냥 단순히 사실을 믿는 게 아니라 신앙으로 해석되고 그래서 그 의미가 밝히 드러나게 된 사실들을 믿는다. 한편, 그리스도교 믿음에는 또 다른 차원이 있다. 믿음은 정해진 내용을 ‘굳게 지키는 것’, 또는 ‘해석된’ 사실이긴 하지만 아무튼 사실을 믿고 ‘지키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올바른 믿음에는 반드시 또 하나의 차원이 있어야 한다. 로핑크 신부는 이를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하바 2,4)라는 말씀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바오로 사도가 이 말씀을 아주 중요하게 여겨 ‘성실함’을 ‘믿음’이라는 말로 옮기듯이(참조: 로마 1,17; 갈라 3,11), 믿음과 성실함은 같은 히브리어 ‘에무나’를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하느님께 자신을 고정하다.’, ‘하느님을 붙들고 놓지 않다.’라는 의미로서, 곧 하느님께 성실함을 뜻한다. 하지만 믿음은 정해진 내용을 믿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하느님께 성실함, 붙들고 놓지 않음, 항구함, 작은 일에서 날마다 충실함, 바로 이런 것들을 의미하기도 한다. 로핑크 신부는 믿음이란 하느님께 성실함으로써 하느님의 성실함에 자신을 고정하는 일이며, 바로 이 차원이야말로 유다 그리스도교적 믿음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강조한다. 믿음은 신경의 내용을 믿는 데서만 끝나지 않으며, 작은 일에서 날마다 성실함으로써 하느님의 성실함에 나를 굳게 고정하는 일이다. [믿음의 재발견]은 이처럼 오늘날 ‘믿음’이라고 말할 때 ‘믿어야 하는 내용’을 먼저 떠올리지만, 그것과 뗄 수 없는 것이 바로 ‘믿음의 실천’임을 각인시켜 준다. 믿음의 참 의미는 자기 자신에게서 하느님의 것으로 온전히 돌아서는 방향 전환에 있다. 이 전환이 깊을수록, 믿는 이는 스스로에 대한 자신의 욕구를 벗어나 다른 이가 자신을 규정하도록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 마치 종처럼 다른 이의 뜻에 자신을 내맡긴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믿음을 주시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 믿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다른 이들이 어떻게 믿는지 눈여겨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내 맘대로 믿음을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셔야만 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새롭게 그런 믿음을 선물로 주셨지요. (어떻게 믿음을 되찾을 수 있는가, 178쪽) 하늘과 땅 사이에 뻗어 있는 믿음의 여정 믿음의 내용과 실천, 들음과 행함, 하늘과 땅 등 서로 대비되는 것들 사이의 균형 또는 조화를 추구하는 일은 저자인 로핑크 신부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이 시대 최고의 성서학자로 꼽히는 그는 일찍이 자신의 학문을 구체적인 현실로 실천하는 삶을 선택하여 지금껏 살아오고 있기 때문이다. 로핑크 신부님은 독일 튀빙엔대학교 가톨릭신학부 신약성서학 교수이셨습니다. 그러다가 1987년 자원하여 교수직을 사임하시고 ‘가톨릭 통합 공동체’에서 함께 사시기 위해 뮌헨 근처 시골로 이주하셨습니다. 이제껏 책과 글에서 만난 신부님의 지론이, ‘하느님 나라’는 유토피아가 결코 아니라 이 땅 어딘가에는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 구체적 현실이어야 한다는 것인데, 바로 그 지론을 말만이 아니라 삶으로 실천하기 위해 그러한 결단을 하셨던 게 아닌가 합니다. 신부님에 의하면, 하느님 나라는 다른 어느 곳이 아니라 바로 주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의 공동체 안에 지금 도래하고 있습니다. (옮긴이의 말, 446쪽) [믿음의 재발견]은 2016년부터 매달 『생활성서』에 연재했던 성경 본문 해설들을 모은 것이지만, 그런 저자의 관록이 녹아 있기 때문인지 책 속에 믿음의 여정이 탄탄하게 펼쳐져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야말로 하늘과 땅 사이에 뻗어 있는 믿음의 여정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참고로, 독일어로 출간된 이 책의 제목이 바로 ‘하늘과 땅 사이에 뻗어 있는Ausgespannt zwischen Himmel und Erde’이다. 위기를 겪으며 성장하는 교회 그러나 믿음을 구체적인 현실로 살아 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이 모인 곳에는 예나 지금이나 어려움이 생기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믿음의 재발견]은 루카의 사도행전을 통해 이 문제를 다룬다. “그 무렵 제자들이 점점 늘어나자,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히브리계 유다인들에게 불평을 터뜨리게 되었다.”(사도 6,1). 루카는 여기서 ‘불평’이란 말을 통해, 예루살렘의 제자 공동체에도 바로 구약 성경이 전하는 불평의 역사가 출현했음을 말하고자 한다. 구약의 이스라엘이 광야 길을 가면서 대들고 거역하고 반항했듯이 말이다. 루카는 그리스계 유다인 과부들이 매일 배급을 받을 때 홀대받았다고 말한다. 그리스계 유다인들은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다인들로서 디아스포라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주해 온 이들이었다. 이들 가운데 일부가 예루살렘 제자 공동체에 합류했고, 그럼으로써 서로 다른 출신과 문화와 언어가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점들은 공동체 안에서 긴장을 일으키는 요인들이 되었다. 각각의 언어는 필연적으로 다른 느낌, 다른 생각, 다른 문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처럼 다른 생각과 다른 이해는 신학에까지도 깊숙이 영향을 미치게 된다. 갓 출범한 교회는 분열의 위험이라는 심각한 위기를 어떻게 돌파해 나갔을까? 로핑크 신부는 성경 본문을 면밀히 살핌으로써 그들의 위기 극복 사례를 소개한다. 본문의 표현대로 하면, 열두 사도가 공동체를 불러 모은다(사도 6,2 참조). 그것은 일반적인 어떤 만남이 아니라 불러 모은 공동체, 곧 ‘교회?κκλησ?α(에클레시아)’를 의미한다. 하느님에 의해, 하느님의 얼굴 앞에 함께 모여 온 공동체를 가리킨다. 함께 모인 이 공동체 앞에 열두 사도는 분열을 없애고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하나의 제안을 내놓는다. 함께 모인 공동체 전체가 이 제안을 받아들이고 실행하기로 한다. 이로써 루카 복음사가는 신생 공동체에 닥친 커다란 위기와 이 위기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공동체를 성장하게 했다고 말한다. 그리스계 신자들과 히브리계 신자들 사이의 충돌은, 서로 달래고 충고하고 감정적인 위로를 나눔으로써 해결된 게 아니라 모두가 함께 새 발걸음을 감행함으로써 극복되었다는 것을. 로핑크 신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교회가 깊은 위기에 놓였다고 낙담할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그러한 위기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것은 늘 슬픈 일이고, 종종 끔찍한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위기들은 교회에 새로운 성장의 발판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그러한 위기가 교회에 말하려는 바가 무엇인지에 귀를 기울이고 모두가 한마음으로 답을 찾으려 할 때뿐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찾으려 할 때뿐입니다. (교회는 어떻게 성장하는가, 306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