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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는 이야기 ‘바다 건너 당신’으로 만나기 4
* 등단작 김미경 | 노인이 된다는 것 14 김홍기 | 열쇠가 지붕 위에 올라앉은 날 18 유금란 | 토씨를 바꾸면 행복해진다 23 정동순 | 헛간이 허물어졌을 때 28 홍진순 | 나치 소녀(Nazimaedchen) 32 * 음식 이야기 김미경 | 탕수육 두 접시 40 김홍기 | 짜장면을 먹을 때면 순금이가 따라온다 44 유금란 | 족발 권력 49 정동순 | 타말리 먹는 밤 54 홍진순 | 사랑 역시도 불고기를 통해서 온다 58 * 신발 이야기 김미경 | 집에 돌아가고 싶습니다 63 김홍기 | 황토색 맹꽁이 68 유금란 | 굽을 내리다 74 정동순 | 하얀 운동화가 있는 정물화 79 * 모국어로 수필가가 되기까지 83 * 홍진순 더블린에서의 일탈 분재 98 분재 104 사랑하는 사람을 이렇게 불러보세요 112 우리 정원의 작은 기적들 116 첫사랑의 수수께끼 121 행복을 느끼는 순간 127 * 정동순 굴뚝 수리 132 눈산 137 호미와 연필 141 호박이 넝쿨째 굴러갔다 146 A4와 레터 사이즈 151 * 유금란 뜨거웠던 날은 가고 156 바다의 기척 161 원더미어 호수의 시 165 리카의 주근깨 169 모고에서 가져온 바람 소리를 듣다 174 * 김홍기 누룽지 이야기 182 엄마의 성경책 187 우리 동네 풍경 하나 191 질긴 것 196 하프타임 200 * 김미경 구걸 206 내 귓속에 매미 한 마리 210 빈터 214 손 이야기 218 조선배추 222 * 함께 읽고 서로 나누는 이야기 227 * 수필U시간을 함께하면서 2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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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 앞에서 발이 멎었다. 볼수록 탐스럽게 잘 생겼다. 시드니 7월, 이맘때쯤의 배추는 그 튼실한 자태와 초록빛이 특히 아름답다. 다른 볼일로 나왔고, 집에는 아직 김치가 많이 남아 있음에도 마트 앞에서 싱싱한 배추를 보고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있다. 얼마나 실한지 내 머릿속 에서는 벌써 배추에 칼집을 넣고 있다. 칼끝에 힘을 주면 쩍 벌어지면서 드러날 노란 속살은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치마폭처럼 겹겹이 쌓인 초록잎 속의 노랑은 여인네 속곳처럼 은밀하기까지 하다. 어느새 입에 침이 고인다. 노랑 속잎에서 나온 달큰하고 고소한 맛이 입안에 퍼지고 있다. 머리채를 잡고 슬쩍 칼집을 한 번 더 넣고는 풀어 놓은 소금물에 담근다. 소금에 절인 배추는 얼마나 탄력 있고 야들야들한가.
--- 김미경, 「조선배추」 중에서 초등학교 4학년쯤의 일이다. 그해 초여름, 우리 집 검은 염소가 새끼 두 마리를 낳았다. 추석이 다가올 무렵, 엄마는 그중 한 마리를 팔려고 오일장이 서는 점등으로 끌고 갔다. 내가 다니던 학교가 점등에 있어 등굣길에 모자가 동행을 했다. 학교를 파한 후 장에 가보니 그때까지 엄마는 참기름 집 담장 밑에 염소와 같이 서 있었다. 새끼 염소는 앞발을 들고 폴짝 뛰어 머리로 들이받는 자세를 하며 나를 맞이했다. 파장이 되어 간 듯 상점들 앞 차일이 걷히고 상인들도 저마다 짐 꾸리기에 바빴다. 그때 나이 지긋한 아저씨와 엄마의 흥정이 시작되었다. 만원은 받아야 한다는 엄마와 8천원이면 사겠다는 아저씨의 실랑이가 이어졌다. 결국 8천원에 받고 새끼 염소를 묶은 줄을 아저씨에게 건넸다. 그런데 새끼염소는 제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엄마 발 앞에 붙박고 서서 엄마 얼굴만 쳐다보았다. 아저씨가 줄을 당기니 따라가지 않겠다는 듯 앞발로 제 몸을 버텨냈다. 목에 걸린 줄이 가을 운동회 줄다리기처럼 팽팽하도록 아저씨와 어린 염소의 실랑이가 계속됐다. --- 김홍기, 「질긴 것」 중에서 드디어 시드니에서 고향 맛이 듬뿍 밴 족발이 탄생했다. 명문 족발집에서나 전승한다는 씨앗 양념간장을 남겨 냉동고에 보관했다. 그 후로 나는 ‘족발 삶는 여자’가 되었다. 뼈를 발라내고 랩에 싸서 예쁘게 모양 잡은 족발은 선물용으로도 요긴하게 쓰였다. 가족처럼 지내던 지인은 뒤뜰에 야외 가스통을 설치해주고 커다란 들통까지 사주면서 나의 족발을 요구했다. 그즈음 나는 열심히 족발을 삶으면서 지인들과의 관계도 쫄깃하게 다져 나갔다. ‘겉보기와 다르다’느니, ‘어쩜 이런 것까지 잘하느냐’는 등의 말에 으쓱해져서 더 열심히 춤을 추었던 것 같다. 그러나 춤추는 고래도 한때라고 몇 년 지나자 점차 시들해지더니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 유금란, 「족발 권력」 중에서 지난봄, 텃밭 흙을 고르고 있는데 옆집 리오 아저씨가 자기 집 퇴비 더미를 자랑했다. 흙을 좀 보여주는데 새까맣다. 지렁이가 꿈틀댄다. 농사도 안 짓는 사람이 퇴비 자랑으로 한참 침을 튀겼다. 그날 후로 맛난 음식을 앞에 둔 것처럼 옆집 퇴비 통에 눈이 갔다. 참다못해 그 퇴비를 좀 나누어 줄 수 있는지 물었더니 좋다고 했다. 가끔 우리 텃밭의 수확물을 얻어먹으니 거절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의 마음이 바뀔세라 즉시 삽과 가장 큰 고무통을 들고 옆집으로 갔다. --- 정동순, 「호박이 넝쿨째 굴러갔다」 중에서 코로나 중증으로 3주간 격리병실에 입원했다가 퇴원을 했다. 떨리는 다리로 부축을 받으며 계단을 올라 나의 방으로 들어갔다. 누군가 보내 온 분재 하나가 선물로 내 방에 놓여 있었다. 뿌리는 인삼처럼 꼬여 있고 잎도 그랬다. 내 짐작이 맞았다. 카드엔 ‘인삼식물’이라고 쓰여 있다. 내게 기쁨을 주려고 한국인을 표상하는 인삼을 고른 것 같은데, 나무 의 회색 표피는 거칠고 오래되어 보였다. 다 자라지도 못하고 늙어버린 난쟁이 같은 모습이 왠지 나와 닮은 것 같았다. 인간이 자기의 취향대로 자르고 비틀어 만들어 놓은 생명을 예술이라며 즐긴다는 것에 어쩐지 공감이 가지 않는다. 코로나의 후유증일까. --- 홍진순, 「분재」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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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코로나 시대,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게 되었지만 우리는 오히려 먼 곳에 있는 사람들과 소통하게 되었다. 2020년 5월 16일 토요일 오후 2시(한국 기준), 몇 대륙에 흩어져 사는 수필가들이 처음으로 원격 모임을 가졌다. 격주 진행으로 1년 반 넘어, 2022년 1월 현재 총 30회를 넘긴 상태다. 처음에는 넷이었는데 곧 다섯이 되었고, 시간도 일요일 오후 2시로 옮겼다. 다섯 동인은, 한국을 중심으로 하면 동쪽이 둘(미국 서부의 김홍기, 정동순), 서쪽이 하나(오스트리아 빈의 홍진순), 남쪽이 둘(호주 시드니의 김미경, 유금란)로, 그 시차가 각각 -16, -8, +1 시간이다. 기성 수필을 함께 읽는 순서와 자작품 발표 합평이 주 내용이고, 테마 (음식, 바다, 신발 등)를 정해서 과제하듯 창작하고 이를 품평하는 일도 여러 번이었다. 바쁜 일정 때문에 도중에 한 주씩 미루는 일도 있었다. 한 분은 코로나19에 감염돼 격리된 곳에서 투병했고 완치 판정을 받고 도 후유증에 시달리는 과정을 겪기도 했다. 그런 동안에도 대개는 어김없이 빡빡하게 진행했다. 수필은 분량의 부담이 덜한 장르라 해도 2주에 1편을 써서 내는 거면 여간 힘겨운 게 아니다. 그런데도 그걸 거의 해냈다. 서로 다른 생장, 서로 다른 이주 환경, 각각 아주 다른 글 내용, 그러나 모국어와 모국문학 을 향한 매우 유사한 열정, 원격시대가 아니면 맺어지지 않았을 인연이 안겨준 이상한 신뢰 등등으로 동병상련을 지나 동지의식이라는 것까지 커졌다. 당연한 일인 듯 누군가 동인 결성과 동인지 발간이라는 묵직한 제안을 했고, 모두 동의해 동인의 공식 출범을 이렇게 동인지 창간으로 드러내게 되었다. 동인지 형식도 작품만 나열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동인 각각의 문학적 체험이나 나아가 다른 동인에 대한 기대 같은 것도 담아 보기로 했다. 수필은 수필대로 뒷얘기는 뒷얘기대로 재미있고 유익한 읽을거리가 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 전 같으면 생각할 수도 없는 동인지다. 서로 만난 적 없고(5인 중 2인끼리만 같은 지역에서 문단활동을 한 사이일 뿐 다른 동인들 모두 전혀 교류가 없었다), 아마도 서로 만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모국어로 글을 쓰는 재외동포라는 점, 모국을 향한 향일성의 문학이자 이민공간에서의 노마드적 문학을 각각으로 진행해 왔다는 점, 함께할 수 없게 된 세계에 대한 불신으로 소통 욕구가 더욱 간절해져 있었다는 점 등이 이들의 결집을 낳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무형과 비정형이 문학으로 모이니 그 장르가 더욱 수필일 수밖에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모르긴 해도 이런 유의 동인은 한국문학 최초가 아닐까 한다. 동인명 ‘수필U시간’은 수필을 공부하고 쓰고 나누는 시간을 함께한다는 의미겠다. U는 수학에서의 합집합 기호이기도 하고(이들 동인 중 1인은 이민지에서 현지 학생을 교육하는 공교육기관의 수학교사이기도 하다), universe의 ‘우주’, universal의 ‘일반적인’, university의 ‘대학’ 등에서 공통으로 의미되는 ‘두루 함께 한다’는 의미를 상징하는 문자이기도 하다. 이들은 모국에서 멀리 떠나 사니, 모국으로 향해 서로를 향해 그리움을 품고 있는 상태, 따라서 서로서로에게 ‘바다 건너 당신’으로 존재하는 사이로 책 제목을 정한 게 아닌가. 해외에서 수필에 매진하면서 처음 쓴 등단작들도 만날 수 있고, 테마를 정해 습작해서 서로 품평한 테마(음식, 신발) 에세이도 실었다. 그동안 발표한 수필 중에서 인상적인 개별 작품들까지 해서 각 8편씩 총 40편이다. 원격 미팅에서 좌담까지 진행해 서로의 작품에 대해 품평한 내용, 등단할 때까지의 이야기 등까지도 실을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