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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혼은 죽지 않으리
전라우의병군 최경회, 구희, 문홍헌 이야기
정찬주
여백출판사 2022.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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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아버지와 아들
박산 가는 길
스승의 스승
이름 석자 속이지 말라
난사람과 된 사람
매화는 향기를 팔지 않는다
아버지의 죽음
마상습사(馬上習射)
을묘왜변·1
을묘왜변·2
스승의 남북방비대책
두 번째 스승
《주자문록》을 간파하다
휴직과 편지
식년문과 1등급제
송죽국매(松竹菊梅)
아! 슬픕니다
동인과 서인
전염병 창궐
잦은 송사
논개 모녀
논개 모녀 재판
내아 구실아치 논개
고단한 벼슬살이
논개 부실이 되다
넘치는 경사
임진왜란
암군의 파천길
출병
무주전투와 재회
경상도 지원 작전
진주성 전투
우리 혼은 죽지 않으리

작가 후기_진주성을 지킨 화순의병 지도자들

저자 소개 1

무염(無染), 벽록檗綠

자기만의 꽃을 피워낸 역사적 인물과 수행자들의 정신세계를 탐구해온 작가 정찬주는 1983년 《한국문학》 신인상으로 작가가 된 이래, 자신의 고유한 작품세계를 변함없이 천착하고 있다. 호는 벽록檗綠. 1953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동국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고, 국어교사로 잠시 교단에 섰다가 십수 년간 샘터사 편집자로 법정스님 책들을 만들면서 스님의 각별한 재가제자가 되었다. 법정스님에게서 ‘세속에 있되 물들지 말라’는 무염無染이란 법명을 받았다. 전남 화순 계당산 산자락에 산방 이불재耳佛齋를 지어 2002년부터 텃밭을 일구며 집필에만 전념 중이다. 대표작으로 대하소설 인간
자기만의 꽃을 피워낸 역사적 인물과 수행자들의 정신세계를 탐구해온 작가 정찬주는 1983년 《한국문학》 신인상으로 작가가 된 이래, 자신의 고유한 작품세계를 변함없이 천착하고 있다. 호는 벽록檗綠.

1953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동국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고, 국어교사로 잠시 교단에 섰다가 십수 년간 샘터사 편집자로 법정스님 책들을 만들면서 스님의 각별한 재가제자가 되었다. 법정스님에게서 ‘세속에 있되 물들지 말라’는 무염無染이란 법명을 받았다. 전남 화순 계당산 산자락에 산방 이불재耳佛齋를 지어 2002년부터 텃밭을 일구며 집필에만 전념 중이다. 대표작으로 대하소설 인간 이순신을 그린 《이순신의 7년》(전7권) 법정스님 일대기 장편소설《소설 무소유》 성철스님 일대기 장편소설 《산은 산 물은 물》(전2권), 4백여 곳의 암자를 직접 답사하며 쓴 산문집 《암자로 가는 길》(전3권)을 발간했다.

장편소설로 《광주아리랑》(전2권) 《다산의 사랑》 《천강에 비친 달》 《칼과 술》 《못다 부른 명량의 노래》 《천년 후 돌아가리-茶佛》 《가야산 정진불》(전2권) 《나는 조선의 선비다》(전3권)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행복한 무소유》 《법정스님 인생응원가》 《법정스님의 뒷모습》 《불국기행》 《그대만의 꽃을 피워라》 《자기를 속이지 말라》 《선방 가는 길》 《정찬주의 茶人기행》 등이 있다. 동화 《마음을 담는 그릇》 《바보 동자》를 발간했다. 행원문학상, 동국문학상, 화쟁문화대상, 류주현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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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2월 22일
쪽수, 무게, 크기
408쪽 | 528g | 148*210*26mm
ISBN13
9791190946186

책 속으로

작년(1546) 명종 1년 5월이었다. 51세의 임억령은 동생 임백령의 추천으로 내려진 원종공신(原從功臣)의 녹권(錄券)을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오히려 임억령은 해남의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제문을 지은 뒤, 녹권을 불사르면서 시로써 자신의 마음을 드러냈다. 녹권을 불사른 것은 세상의 부귀영화를 하찮게 여기고, 벼슬살이의 진퇴와 공사(公私)의 구분을 분명히 하겠다는 결연한 의지였다. --- p.36

실제로 칼을 찬 왜구들이 남해안 여러 고을을 분탕질하고 있는 중이었다. 조현이 수성하고 있는 달량진을 잠시 포기한 채 사방으로 올라가고 내려가서 노략질을 해대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달량진은 점점 고립무원의 상태가 되었다. 지원군을 기다리는 조현은 한낱 허망한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몰랐다. 달량진 건너편에 있는 진도에서조차 지원군은 오지 않았다. 진도군수 최인은 왜구들이 쳐들어온다는 급보를 받고는 진도읍성을 도망쳐버렸고, 진도 관군을 지휘하는 군관들은 달량진으로 가 구원하기는커녕 겁을 먹고는 싸움을 피하려고 부하들에게 화살을 쏘지 못하게 지시했다. 왜구들이 군창에서 군량미를, 무기고에서 무기를 가져가도 진도 관군들은 숨어서 지켜보기만 했다 --- p.111

한편, 선조는 왜군이 해전에 능하니 육전에 힘쓰라고 지시했다. 어명을 받은 경상좌수사 박홍은 멀쩡한 전선을 부산 바다에 자침시킨 뒤 휘하의 수군들을 육지로 불러들여 싸우게 했다. 그런데 이 같은 전략은 왜군의 상륙을 용이하게 해준 패착이 되고 말았다. 별다른 저항 없이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은 부산진성부터 공격했다. 그러나 조선 관군의 수성전은 왜장이 생각하는 것과 달랐다. 왜군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부산진성 정발 첨사는 군사 숫자의 압도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아군의 화살이 다 떨어졌을 때까지 분투했다. 하룻밤을 넘기며 공방전을 벌였다. --- p.319

전라우의병군은 다시 행군을 시작했다. 늦여름 무더위가 의병들의 발걸음을 곧 무겁게 했다. 강물에 젖었던 의병들의 바지저고리는 금세 꼬들꼬들 말랐다. 그러나 그런 감촉도 오래가지 못했다. 의병들은 구례 논길을 지나면서 장대비를 맞은 듯 다시 땀범벅이 되었다. 섬진강으로 넘어가는 산길은 바람 한 점 없었다. 지난 장마 때 패인 자드락길의 돌멩이들은 달구어진 쇠붙이 같았다.
섬진강을 따라 이어지는 남원 가는 둑길에서야 강바람이 조금 일었다. 목덜미까지 시원해지면서 숨통이 트였다. 불볕더위에 숨죽이고 있던 버드나무 가지와 이파리들이 강바람에 휘휘 깨어났다. 최경회는 남원 입성을 앞두고 의병들에게 다시 한번 더 휴식을 주었다. --- p.340

적장의 손에 죽지 않기 위해 비록 남강에 뛰어들지만 충성을 다한 신하로 영원히 살기를 바라는 비장한 모습이었다. 서풍이 거칠게 불었다. 피비린내와 흙먼지가 촉석루 쪽으로 몰려왔다. 관군과 의병군, 성민 수만 명은 촉석루 앞 둔덕과 숲을 이용해 겹겹이 포진했다. 촉석루 바로 뒤쪽 남강에는 시신들이 드문드문 거적때기처럼 떠올라 흘렀다. 김천일과 최경회는 배수의 진을 쳤다. 비록 서문과 북문, 동문의 군사들이 밀려났지만 촉석루에서는 더 이상 물러설 데가 없었다. 왜군도 백병전에서 사상자를 크게 냈기 때문에 파죽지세로 달려들지는 못했다. 김천일이 복수의병장 고종후를 불렀다. 고종후는 자신을 따라온 절노비들이 있는 곳으로 가려다가 돌아섰다. --- p.388

임진년 11월 중순 이후부터는 전라좌의병군과 전라우의병군이 서로 떨어져서 작전을 폈다. 이때 최경회는 부하들이 남원을 지키지 않고 경상도로 이동하는 것을 못마땅해 하자 “호남도 우리 땅이요, 영남도 우리 땅이다!”고 부하들을 달랬다. 결국 최경회의 전라우의병군은 개령을 공격하여 왜장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 휘하의 왜군 이백 명을 죽이고 포로 사백여 명을 구했다.

--- p.402

출판사 리뷰

호남도 우리 땅이요, 영남도 우리 땅이다

화순에서 창의하고 출병한 전라우의병군은 경상도 진주성을 향해서 진군한다. 화순의병 지도자들은 고경명 맹주와 먼저 의기투합했다. 능주의 구희, 문홍헌 등이 고경명의 금산전투에 참전, 지원하기 위해 화순의 의병들을 데리고 금산으로 떠났던 것이다. 최경회는 모친상 중이었으므로 즉시 나서지는 못했지만 삼년상이 끝나갈 무렵 전라우의병군을 창의해서 출병했다. 최경회가 어떤 스승과 선비를 만나서 그의 충의가 어떤 방식으로 심화, 실천되었는가를 살펴보는 것 또한 매우 흥미롭다.
관군과 의병군은 중과부적으로 진주성을 내주지만 왜군도 큰 피해를 입고 퇴각하고 만다. 호남의 의병군들은 호남을 지켜냈고 진주성도 되찾게 되는데, 이를 계기로 호남이 지켜지고 왜왕은 조선 땅을 다시는 넘보지 못한다. 마침내 목숨을 아끼지 않은 화순의병들은 임진왜란을 종식시키는 데 충절의 디딤돌이 된다.
특히 화순에서 창의한 전라우의병군과 김천일의 나주의병군, 보성의 전라좌의병군의 사투(死鬪)는 값지고 눈부신 것이었다. 비록 다수의 의병장과 의병들이 남강에 투신해 순절했지만 그들의 혼만은 왜군에게 꺾이지 않고 조선의 의병정신을 유감없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순절한 의병이 가장 많은 화순의 전라우의병군 의병장 최경회, 종사관 문홍헌, 별장 겸 종사관 구희의 “호남도 우리 땅이요, 영남도 우리 땅이다”라는 대승적인 기개는 한때 지역감정에 사로잡혔던 오늘날의 우리들을 부끄럽게 하고 진정한 우국충정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주고 있다.


■ 작가의 말
이번 장편소설 《조선의 혼은 죽지 않으리》는 전라우의병군이 거병한 화순 지역의 의병 지도자들을 다뤘다. 화순은 의향의 정체성이 선명한 지역이다. 그 배경에는 충절(忠節)을 다한 역사인물들이 즐비했기 때문이다.
화순의병 지도자들은 고경명 맹주와 먼저 의기투합했다. 능주의 구희, 문홍헌 등이 고경명의 금산전투에 참전, 지원하기 위해 화순의 의병들을 데리고 금산으로 떠났던 것이다. 최경회는 모친상 중이었으므로 즉시 나서지는 못했지만 삼년상이 끝나갈 무렵 전라우의병군을 창의해서 출병했다. 최경회부터 그의 행장과 충의를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그의 행장을 들여다보는 이유는 어떤 스승과 선비를 만나서 그의 충의가 어떤 방식으로 심화, 실천되었는가를 알 수 있기에 그렇다.
최경회(崔慶會 1532-1593)의 아버지는 영광향교 훈도를 지낸 최천부였고, 어머니는 순창 임씨였다. 그러니까 최경회는 아버지 최천부 훈도로부터 유년시절에 한문의 기초를 배웠음이 분명하다. 장남 최경운, 차남 최경장도 마찬가지였다. 최경회의 자는 선우(善遇). 호는 삼계(三溪), 일휴당(日休堂). 최경회는 16세에 교수 김원의 딸 나주 김씨와 결혼한 뒤 다음 해 첫 스승이 된 송천 양응정을 찾아갔다. 광산에 사는 양응정은 당대의 문장가이자 병학(兵學)에 조
예가 깊은 우국충정(憂國衷情)의 선비였다. 임란 수십 년 전부터 명종과 선조에게 “장차 있을 왜란에 대비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환기시켜준 선비였던 것이다. 양응정 문하에 의병 지도자들이 유독 많은 이유는 그의 수업이 문무를 강조한 방식에 기인한 것이기도 했다.
진주성전투 1차전과 2차전을 요약하면 이렇다. 선조 25년(1592) 10월 진주목사 김시민은 3천 8백여 명의 관군, 성민과 함께 호남을 정벌하기 위해 침략한 왜군 3만여 명을 수성전으로 맞서 진주성을 지킨다. 왜군이 패퇴함으로써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왜왕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선조 26년(1593) 6월에 다시 호남을 정벌하고 김시민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왜군 십여 만 명을 진주성으로 투입한다. 조선 관군과 의병군도 사즉사(死卽死)의 각오로 김천일 창의사, 최경회 전라우의병장 등 호남 의병장 주도하에 수성전을 벌였다. 그러나 군사의 열세는 어쩔 수 없었던바 진주성을 내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왜군은 며칠 만에 스스로 물러났다. 3만여 명이 살상당하는 큰 피해를 입고 부산, 울산 등으로 퇴각하고 말았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왜왕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욕은 또다시 수포로 돌아갔다, 호남의 의병군들은 호남을 지켜냈고 진주성도 되찾았다. 특히 화순에서 창의한 전라우의병군과 김천일의 나주의병군, 보성의 전라좌의병군의 사투(死鬪)는 값지고 눈부신 것이었다. 비록 다수의 의병장과 의병들이 남강에 투신해 순절했지만 그들의 혼만은 왜군에게 꺾이지 않고 조선의 의병정신을 유감없이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순절한 의병이 가장 많은 화순의 전라우의병군 의병장 최경회, 종사관 문홍헌, 별장 겸 종사관 구희의 “호남도 우리 땅이요, 영남도 우리 땅이다”라는 대승적인 기개는 한때 지역감정에 사로잡혔던 오늘날의 우리들을 부끄럽게 하고 진정한 우국충정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주고 있다.

_2022년 2월, 이불재에서 정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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