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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이야기 1950년대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김정형
답다 2013.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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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1950년]
6·25전쟁 발발
-남침설·북침설
-한강 인도교 폭파
유엔군 참전
-대전협정
-윌리엄 딘
워커 라인 설정과 다부동 전투
-백선엽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탈환
국군·유엔군의 38선 돌파와 중공군 참전
장진호 전투와 흥남철수작전
농지개혁 실시
-북한 토지개혁
한국은행 창립과 첫 한국은행권 발행
우장춘 영구 귀국
현제명 한국 최초 창작 오페라 '춘향전' 작곡·공연
매카시 광풍
마더 테레사와 '사랑의 선교회'
잉그리드 버그만, 로베르토 로셀리니와 재혼

[1951년]
1·4후퇴와 휴전협상 시작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 해임
국민방위군 사건
거창·산청·함양 양민학살
빨치산 대토벌
전시연합대학 설치와 지방 국립종합대 설립
원내·원외 자유당 창당
장기려 무료진료소 ‘복음병원’ 개원
천경자 뱀 그림 '생태' 제작과 ‘미인도’ 위작 논란
이해랑 연극 '햄릿' 국내 최초 연출
샌프란시스코조약·미일안보조약 조인
아르놀트 하우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출간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출간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출간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 '라쇼몽' 베니스 영화제 대상
데이비드 오길비 광고 '해서웨이 셔츠맨' 대성공

[1952년]
이승만 대통령 ‘평화선’ 선포
일본의 독도영유권 트집
-안용복
부산정치파동과 발췌개헌
-서민호
거제도 포로수용소와 프랜시스 도드 소장 피랍
김용환 만화 '코주부 삼국지' 연재
마릴린 먼로 나체 사진 라이프지 게재
조너스 소크 소아마비 백신 개발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즉위
존 케이지 작곡 '4분 33초' 초연
르코르뷔지에 설계 '위니테 다비타시옹' 완공
에밀 자토페크 올림픽 사상 첫 장거리 육상 3관왕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결정적 순간’ 사진집 출판
루퍼트 머독 신문 경영 시작
미 국가안보국(NSA) 설립과 ‘에셜론’
가말 압델 나세르 쿠데타 성공
성전환자 조지 조겐슨 첫 공식 '커밍아웃'

[1953년]
포로교환협정 체결과 반공포로 석방
-포로 76명 인도행
6·25 전쟁 휴전협정 조인
-제네바 회담
한미상호방위조약 조인
제1차 통화개혁
박수근 국전 특선
이매방 첫 개인춤 발표회
왓슨·크릭 DNA 이중나선 구조 제시
에드먼드 힐러리 세계 최초 에베레스트 등정
-조지 말로리
-K2
베리야 실각과 흐루시초프 시대 개막
로젠버그 부부 간첩 혐의로 사형
-베노나 프로젝트
모하마드 모사데크 이란 석유 국유화
사뮈엘 베케트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초연
휴 헤프너 ‘플레이보이’ 창간
다그 함마르셸드 유엔 사무총장 선출

[1954년]
사사오입 개헌 파동
이승만 비구승·대처승 불교 분규 담화
이승만 한글 간소화 담화와 논쟁
정비석 소설 ‘자유부인’ 논쟁
역도산 일본 프로레슬링계 석권
문선명 ‘통일교’ 창교
남인수 '이별의 부산 정거장' 발표
한국 월드컵 첫 출전과 스위스 월드컵
-북한의 월드컵 8강 신화
김용기 가나안농장 설립
미 연방대법원 공립학교의 흑인 차별 위헌 판결과 '리틀록 사태'
-미 흑인 노예 변천사
디엔비엔푸 함락과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종결
-보응우옌잡
세계 최초 신장이식 성공
로버트 카파 지뢰 밟고 폭사
피터 드러커 ‘경영의 실제’ 출간
카를로스 클라이버 지휘자 데뷔

[1955년]
조립승용차 ‘시-바ㄹ’ 생산과 새나라자동차의 부침
이중섭 첫 개인전
조남철 바둑교재 ‘위기개론’ 출간
최홍희 ‘태권도’ 명칭 제정
김성환 만화 ‘고바우 영감’ 동아일보에 연재
-가짜 이강석 사건
‘한국판 카사노바’ 박인수 무죄 판결
통합 야당 민주당 창당
미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과 공공버스 인종차별 위헌 판결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슬픈 열대’ 출간
-구조주의
제임스 딘의 화려한 등장과 허무한 죽음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베를린 필 종신 지휘자 취임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롤리타' 출간
레몽 아롱 '지식인의 아편' 출간
글렌 굴드 '골드베르크 변주곡' 녹음
레이 크록 맥도널드 1호점 개점

[1956년]
박춘석 작곡 '비 내리는 호남선' 발표
이태영 '여성법률상담소' 개소
김일성의 대숙청 ‘8월 종파 사건’
박헌영 처형
엘비스 프레슬리 ‘로큰롤의 황제’로 부상
-로큰롤
-에드 설리번 쇼
유진 오닐 희곡 ‘밤으로의 긴 여로’ 초연
미나마타병 발병 첫 공식 보고
-이타이이타이병과 요카이치 천식
니키타 흐루시초프, 스탈린 비판
헝가리 반소 봉기
수에즈운하 국유화 선언과 제2차 중동전쟁

[1957년]
‘조선말 큰사전’ 전 6권 완간
-북한 ‘조선말 대사전’
김승호 출연 영화 ‘시집가는 날’ 아시아영화제 특별희극상 수상
김지미 영화배우 데뷔
한국일보 제1회 미스코리아 대회 개최
-미스 유니버스와 세계 미인대회
국내 첫 저작권법 제정
스푸트니크 1호 발사
-익스플로러 1호
-인공위성
놈 촘스키 ‘통사구조론’ 출간
콰메 은크루마와 가나의 독립

[1958년]
신국가보안법 파동
-국가보안법 변천사
-KNA 여객기 피랍
김동진 교성곡 '승리의 길' 발표
해방 후 최초 아파트 '종암아파트' 준공
샤를 드골과 프랑스 5공화국 출범
펠레의 화려한 등장과 스웨덴 월드컵
-레프 야신
모택동의 대약진운동 비극
중국의 금문도 포격과 최병우 기자 순직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노벨 문학상 수상 거부
일본 세계 최초 라면 시판과 한국의 라면

[1959년]
진보당 창당과 조봉암 사형
‘여적’ 파문과 경향신문 폐간
재일동포 첫 북송과 조총련
금성사 국내 첫 라디오 생산
김시스터즈 미국 진출
피델 카스트로 쿠바 혁명 성공
-관타나모 기지
루이스·메리 리키 부부 두개골 화석 ‘진잔 트로푸스’ 발견
중국 ‘명방(鳴放)운동’과 팽덕회 실각
달라이 라마 인도 망명
귄터 그라스 '양철북' 출간
이나모리 가즈오, 교세라 창업
트뤼포·고다르와 ‘누벨 바그’ 영화
소련 달 탐사선 ‘루나 2호’ 달에 명중
남극조약 조인

저자 소개

저자 : 김정형
‘역사 속의 오늘’ 제목으로 조선일보(2002.12~2003.11)에 1년, 주간조선(2004.9~2006.8)에 2년 연재하고, CBS 라디오에서 같은 제목으로 방송(2006.6~7)했다. 저서 ‘역사 속의 오늘’(생각의나무, 전2권, 2005년)은 그 산물이다. 월간지 뉴스메이커에 2010년 1월부터 지금까지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을 연재하고 있다. 서울에서 태어나 대광고와 성균관대 도서관학과를 졸업했다. 조선일보 편집국 조사부로 입사해 독자센터에 근무하고 있다.

품목정보

발행일
2013년 10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620쪽 | 890g | 153*225*35mm
ISBN13
9788998451059

책 속으로

…농지개혁에 관한 두 진보 지도자의 언급은 남한의 농지개혁이 왜 성공작인지를 잘 보여준다. 룰라 다 시우바 전 브라질 대통령은 재임 시절인 2004년 8월 우리나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은 과거 50년대에 농지개혁을 했지만 브라질은 그러지 못했고, 아직도 브라질로서는 그것이 풀어야 할 숙제”라고 말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4년 11월 남미 순방 중 마련한 동포와의 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자유당 시대를 완전히 독재시대, 암흑시대, 어두컴컴한 시대로 생각했다. 그런데 토지개혁, 농지 분배를 했다. 지나고 보면 정말 획기적인 정책이고 역사를 바꾼 사건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농지개혁 실시 (1950년)」중에서

…약속이라도 한 듯 각종 유령 단체들이 국회 해산과 야당 의원 소환을 요구하는 구호를 외치며 연일 부산 거리를 누비고 다녔다. 야당 의원들을 겨냥해 ‘민의를 거역하는 매국노들은 민중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내용의 공갈 협박성 벽보가 시내 곳곳에 나붙었고 삐라가 뿌려졌다. 데모대는 ‘땃벌떼’, ‘백골단’이라고 붉은 글씨로 쓴 수건을 이마에 동여매고 어깨에는 구호가 적힌 띠를 걸친 모습으로 임시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던 경남도청 구내 무덕관 앞뜰까지 들어가 의사당을 포위하고 연좌데모를 벌였다.…
---「부산정치파동과 발췌개헌 (1952년)」중에서

…당시 자국의 바다를 획정해 영해에 대한 권리를 주장한 나라는 미국과 중남미 등 몇 개국이 전부였을 뿐 아시아에서는 어느 나라도 그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배타적 경제 수역과 비슷한 개념의 해양 주권선언은 국제법상으로도 혜안이 돋보이는 선언이었다. 반면 일본 어민들에게는 맥아더 라인이 폐기되어도 한국의 새로운 해양 주권선언에 의해 또다시 한국 연안 진출이 막혀버린다는 점에서 청천벽력 같은 선언이었다. 다급해진 일본은 1월 24일 반박 성명을 냈다. 1월 28일에는 “한국의 일방적인 영토 침략”이라며 우리 측에 공식적으로 항의서한을 전달했다.…
---「이승만 대통령 ‘평화선’ 선포 (1952년)」중에서

…휴전조약은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체결되었다. 1951년 7월 10일 휴전회담이 처음 시작된 이래 765차례의 산고 끝에 이뤄진 결실이었다. 휴전협정 조인은 유엔 측 대표 윌리엄 해리슨 중장과 북한 대표 남일 대장이 한국어, 영어, 중국어로 쓰인 전문 5조 36항의 협정문서 정본 9통, 부본 9통에 각각 서명한 뒤 자신의 문서를 상대방에 전달하고 다시 상대방의 서명 밑에 자신의 이름을 서명함으로써 이뤄졌다. 두 서명 당사자는 12분 만에 모든 서명 절차를 마치고 관례적인 합동 기념촬영도 없이 곧바로 퇴장했다.…
---「6·25전쟁 휴전협정 조인 (1953년)」중에서

…한국은 2조에 소속되어 6월 17일 스위스 취리히의 그라스 호퍼 운동장에서 헝가리와 첫 경기를 펼쳤다. 헝가리는 2년 전 헬싱키 올림픽에서 우승하고 국제대회 30전 전승 무패를 자랑하는 세계 최강팀이었다. 한국은 전반 0-4, 후반 0-5 도합 0-9로 대패했다.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월드컵 사상 최다 점수 차 패배였다. 한국은 6월 20일의 터키전에서도 0-7로 대패하는 수모를 당했다. 마지막으로 같은 2조에 속한 서독과의 경기가 남았으나 서독의 8강 토너먼트 진출과 한국의 탈락이 이미 확정된 상태여서 경기는 치러지지 않았다.…
---「한국 월드컵 첫 출전과 스위스 월드컵 (1954년)」중에서

…주로 팝 싱어들과 호흡을 맞추던 박춘석의 음악세계에 큰 변화가 생긴 것은 1965년 이미자를 만난 후였다. 스스로 '음악인생 2기'라고 말하는 트로트 황금시대의 개막이었다. 1964년 '동백 아가씨'로 유명해진 이미자는 박춘석에게 기대주였다. 박춘석은 순전히 이미자의 노래를 작곡하겠다는 생각으로 1965년 이미자의 소속 회사인 지구레코드로 전속을 옮겼다. 이미자를 만난 후 그의 음악세계는 트로트로 급선회했다. 스윙, 탱고 등 경쾌한 노래들도 부르던 이미자의 노래 역시 애가(哀歌) 전문 트로트로 바뀌었다.…
---「박춘석 작곡 '비 내리는 호남선' 발표 (1955년)」중에서

…응모가 확정된 여성은 얼굴 사진과 함께 “‘화장은 짙어야 하나요’하는 수줍음”, “‘춘희(椿姬)’ 애독한 문학소녀”, “가냘프면서도 만만한 건강체” 등의 제목을 단 기사로 소개되었다. 고희동(화가), 모윤숙(시인), 박화성(소설가), 이해랑(연극인), 장발(화가) 등 쟁쟁한 심사위원이 발표되면서 점차 응모자가 늘어나긴 했으나 대회를 치르기에는 여전히 응모자가 부족해 대회는 또다시 연기되었다.…
---「제1회 미스코리아 대회 개최 (1957년)」중에서

…맥아더와 트루먼의 전쟁 2라운드는 미국에서 펼쳐졌다. 4월 19일 미 상하양원합동회의에서 행한 고별연설로 맥아더는 다시 한번 전 미국인을 사로잡았다. 34분에 걸친 연설에 의원들은 30회의 박수로 화답했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그 노래의 노병처럼, 저는 이제 군인의 삶을 마감하고 다만 사라져갈 뿐입니다.”라는 내용의 연설을 마치고 통로를 지날 때 한 하원의원은 “우리가 오늘 여기에서 들은 것은 직접 현신하신 하나님의 육성”이라고 외쳤다. 뉴욕의 환영 퍼레이드에는 750만 명의 인파가 몰려들어 떠나는 영웅에게 아낌없는 갈채를 보냈다.…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 해임 (1951년)」중에서

…‘플레이보이’지는 전후 미국 사회에 나타난 두 가지의 강력한 흐름을 완벽하게 포착했다. 그것은 성적 해방과 소비의 풍요였다. ‘플레이보이’는 갈수록 속박을 싫어하는 사회를 향해 육체적·물질적 쾌락이 넘치는 매혹적인 꿈의 세계를 펼쳐 보였다. 매력적이면서도 도발적인 여자들을 등장시키고 성적 쾌락을 거침없이 부각해 물질적 풍요 속에 사는 젊은 독신 남성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중년 남자들에게는 성적 모험의 환상을 제공했다. 여성을 상품화한다는 비난이 적지 않았으나 섹스 자체가 아니라 섹스 심벌을 팔겠다는 발상은 획기적이었다.…
---「휴 헤프너 ‘플레이보이’ 창간 (1953년)」중에서

…그는 원시부족 문화에도 나름대로 고도의 질서와 조화가 있고, 서구에서 야만이라고 매도하는 원시사회 의식인 풍습에는 영혼과 육신의 일체화라는 종교적 의미가 담겨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문명과 문명 사이엔 ‘좋고 나쁨’이나 ‘우월과 열등’이 아니라 ‘다름’만이 있을 뿐이다. 그가 보기에 서구인들은 자신들의 문화를 문명의 유일한 기준으로 내세워 그것을 척도화한다. 오랫동안 ‘문명=서구적인 것’이라는 공식은 서로 다른 문화 사이에 ‘문명과 야만(미개)’이라는 우열관계를 형성시켜왔으며 문명화라는 이름으로 비서구적인 것을 서구화해 원주민들의 삶의 균형을 깨뜨렸다. 그가 말하는 '열대'가 '슬픈' 건 바로 이 때문이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슬픈 열대’ 출간 (1954년)」중에서

…왼발 오른발 구분 없는 자유자재의 킥, 바나나를 연상케 하는 환상적인 스핀킥, 자로 잰 듯한 절묘한 패스, 신기에 가까운 드리블. 이 축구 천재의 이름은 에드손 아란테스 두 나시멘투다. 하지만 그는 어려서부터 타고난 발재간 때문에 본명 대신 ‘펠레’로 불렸다. 사람들은 ‘펠레’가 포르투갈어로 흑진주, 또는 발을 뜻하거나 브라질 인디오들이 가지고 놀던 고무공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그러나 펠레는 훗날 자서전에서 “펠레라는 애칭은 초등학교 시절 동급생 중 누군가가 붙여준 것”이라면서 의미는 자신도 모른다고 했다. 한 인터뷰에서는 자신을 펠레라고 부른 학교 친구를 때려주었을 정도로 펠레란 이름을 싫어했다며 본명으로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펠레의 화려한 등장과 스웨덴 월드컵 (1958년)」중에서

…평범한 소시민이 나치즘에 물들어 가는 과정을 세밀하게 묘사했다. 일상적으로는 선량하면서도 가끔은 바람을 피우고 식탐에 매달리던 군중은 나치가 집권하자 군중집회에 나가 환호성을 지르는 것은 물론 잔혹하고 난잡한 군중으로 변해간다. 이들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 속물근성과 편협함을 지닌 채 살아가며 과거의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그라스가 볼 때, 이들 소시민은 더 이상 피해자도 아니고 수동적 가담자도 아닌, 자발적인 동참자요 파시즘의 지지층이었다. 그런 점에서 양철북은 나치즘의 온상이 된 소시민 계급의 기회주의적 태도와, 과거를 극복하지 못하고 역사를 망각 속에 묻어 버리려는 전후 독일 사회의 복고적 태도에 대한 비탄의 노래였다.…

---「귄터 그라스 '양철북' 출간 (1959년)」중에서

출판사 리뷰

대한민국의 1950년대

1950년대를 거론하면서 6?25전쟁을 비껴갈 수는 없다. 6?25는 1950년대를 관통하고 압도하고 규정한다. 지금도 치유되지 않는 아픈 상처다. 사망자 총수를 기준으로 하면 1500년대 근대 국가 체제가 형성된 이래 발발한 세계의 모든 전쟁 중에서 7번째, 연평균 사상자 수를 비교하면 1차, 2차대전에 이어 3번째로 피해 규모가 크다. 그런데도 북한이 남침하고 많은 사람이 죽고 국토가 폐허가 되었다는 정도만 알고 있을 뿐 전쟁의 원인, 과정, 결과를 구체적으로 아는 사람이 드물다. 6?25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남북간 대치와 냉전으로 이어져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의 삶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6?25는 한반도라는 지역적 한계에도 갇혀있지 않다. 세계는 6·25를 통해 내편과 네편, 선과 악으로 확연히 구분되는 새로운 기준을 강요받았다. 결국 6?25는 소련이 붕괴될 때까지 40년 동안 전 세계를 갈라놓은 냉전의 출발점이었다.

전쟁은 3년 동안 계속되었고 백성들은 생존의 몸부림을 쳤다. 그런 와중에도 남북의 지도자들은 정권 연장에 혈안이었다. 남쪽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이 1952년 부산정치파동과 발췌개헌으로 수명을 이어갔다. 전쟁 후에도 사사오입 개헌(1954년)으로 헌정 사상 큰 오점을 남기고 신국가보안법을 제정(1958년)해 개악법으로 비난을 받았으며 경향신문을 폐간(1959년)하고 진보당 당수 조봉암을 전격 처형(1959년)했다. 다행히 평화선을 선포(1952년)하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1953년)해 군사 외교적으로 큰 성과를 거둔 것은 이 대통령의 혜안이 돋보인 업적이었다. 북쪽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중공군의 참전과 미군의 융단폭격으로 국토가 성한 곳이 없고 백성들은 생사를 넘나드는 고통을 받는데도 김일성은 자신이 일으킨 전쟁 실패의 책임을 전가해 잠재적인 경쟁자들을 하나 둘 제거했다. 전쟁 후에는 ‘8월 종파 사건’(1956년)으로 박헌영 등 나머지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까지 모조리 숙청해 독재 체제를 구축하고 20세기사에 유례가 없는 3대 세습의 발판을 마련했다.

폐허 속에서 경제는 좀처럼 살아나지 못했으나 재건의 싹은 곳곳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농지개혁을 실시(1950년)하고 제1차 통화개혁(1953년)을 무난히 마무리했으며 시발자동차가 등장(1955년)하고 금성사가 국내 첫 라디오를 생산(1959년)했다. 농지개혁은 훗날 진보 또는 좌파 대통령으로 불린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도 인정할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금성사의 국내 첫 라디오 생산은 우리나라 전자산업의 태동으로 삼을 만큼 의미가 각별했다. 피폐한 삶 속에서도 ‘조선말 큰 사전’ 6권이 완간(1957년)되었다. 전시연합대학 설치(1951년)와 지방 국립대 설립은 당장은 고단해도 교육을 중시하는 우리 민족의 특질을 그대로 드러냈다. 문화예술도 활발했다. 미술에서는 박수근이 국전에 특선(1953년)하고 이중섭이 첫 개인전(1955년)을 열어 대한민국 현대 미술의 양대 기둥으로 자리를 잡았다. 천경자도 뱀 그림 ‘생태’(1951년)를 그려 대표적인 여류 화가로 자리매김했다.

음악에서는 현제명이 한국 최초 창작 오페라 ‘춘향전’을 작곡?공연(1950년)하고 김동진이 교성곡 ‘승리의 길’을 발표(1958년)했다. 대중음악에서는 박춘석이 ‘비 내리는 호남선’(1954년), 남인수가 ‘이별의 부산 정거장’(1956년)을 발표하고 한류스타의 원조격인 김시스터즈가 미국으로 진출(1959년)했다. 영화에서는 김승호가 아시아영화제에서 연거푸 3번이나 남우주연상을 수상해 아시아 최고 배우로 이름을 날렸으며 한국 영화계의 여장부 김지미가 영화배우로 데뷔(1957년)했다. 스포츠에서는 역도산이 일본 프로레슬링계를 석권(1954년)하고 우리나라가 처음 월드컵에 출전(1954년)했으며 태권도 명칭이 제정(1955년)되었다. 종교적으로는 문선명이 통일교를 창교(1954년)하고 이승만의 비구승·대처승 불교 분규 담화(1954년)로 태고종이 조계종에서 분종하는 사태로 발전했다.

* 지구촌의 1950년대

20세기를 뜨겁게 달군 지도자들이 명멸했다. 1953년 같은 해에 소련의 스탈린이 죽고 흐루시초프가 철의 장막 뒤에서 지배체제를 공고히 했으며 샤를 드골이 프랑스 제5공화국의 초대 대통령(1958년)으로 당선되었다. 피델 카스트로는 쿠바 혁명을 성공(1959년)시켜 20세기사에 유례가 없는 최장기 1인 집권을 이어가고 엘리자베스 2세는 영국 여왕으로 즉위(1952년)해 영국 역사상 최고령 군주 기록을 갈아치웠다.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는 쿠데타에 성공(1952년)한 후 서방 강대국에 당당히 맞서 제3세계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과학과 의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왓슨과 크릭은 DNA 이중 나선구조를 제시(1953년)해 “다윈의 진화론과 멘델의 유전법칙에 필적할 만한 생물학적 성과를 이뤘다”는 격찬을 받고 소련은 스푸트니크1호 발사(1957년)를 성공시켜 우주 탐사를 향한 대정정의 첫걸음을 떼고 20세기 들어 미국을 처음 열등감에 빠뜨렸다. 조너스 소크는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1952년)해 “150년 전 제너가 처음 천연두 접종법을 발견한 이래 최대 업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세계최초로 성공한 신장이식 수술(1954년)은 장기이식의 길고 긴 역사에서 선도자 역할을 했다.

음악에서는 존 케이지가 작곡한 ‘4분 33초’가 초연(1952년)되어 우연하게 빚어지는 소음도 얼마든지 음악일 수 있다는 인식의 전환을 요구하고 헤르베르트 폰 카아얀이 베를린필 종신 지휘자로 취임(1955년)해 클래식을 대중적 음악으로 변모시켰다. 영화에서는 마릴린 먼로의 나체사진이 라이프에 게재(1952년)된 후 수치스러웠던 과거가 동정심에 가려져 오히려 인기가 올라가는 대반전이 펼쳐지고 제임스 딘이 화려하게 등장(1955년)했다가 24살의 나이로 허무하게 사라졌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자신이 연출한 영화 ‘라쇼몽’이 베니스 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1951년)한 덕에 서양의 신예 감독으로부터 영화계의 전설로 추앙받았다. 트뤼포와 고다르는 기존 영화와 차별화된 새로운 영화 흐름 ‘누벨바그’의 기치를 내걸어 거친 비약과 생략이 돌출하는 편집 등을 통해 기존 영화에 대한 고정된 관념을 깨나갔다.

대중음악계에서는 젊은이들의 통속적인 언어가 된 로큰롤이 유행하고 엘리스 프레슬리가 로큰롤의 황제로 부상(1956년)했다. 연극에서는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1953년),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1956년)가 초연되어 20세기 연극계의 두 거성으로 추앙받았다. 스포츠에서는 축구를 스포츠예술로 승화시킨 펠레가 화려하게 등장(1958년)하고 에드먼드 힐러리가 인류 최초로 에베레스트에 등정(1953년)하는데 성공했다.
언론에서는 루퍼트 머독이 신문 경영(1952년)에 뛰어들고 휴 헤프너가 플레이보이를 창간(1953년)했다. 머독은 선정성과 권력 유착을 무기로 세계 언론매체를 끊임없이 먹어치워 '언론계의 조스'로 불렸으며 헤프너는 섹스 자체가 아니라 섹스 심벌을 팔겠다는 획기적으로 발상으로 20대 후반기 성 혁명의 파종자로 불렸다.

문학에서는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가 ‘호밀밭의 파수꾼’을 발표(1951년)한 후 일약 전후 미국 문학의 대표 작가로 부상하고 독일의 귄터 그라스는 양철북(1959년)에서 나치즘의 온상이 된 소시민들의 무기력, 비굴, 부패, 속물근성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인문학 분야에서는 아르놀트 하우저가 전 세계 문학가와 예술가들의 교과서 역할을 한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1951년)를 출간하고,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세계 지성사에 큰 충격을 던져준 ‘슬픈 열대’(1955년)를 통해 “문명에 우월이란 게 있는가”를 물었다.

전쟁은 국지적으로 일어났다. 프랑스는 2차대전 때 일본에 빼앗긴 베트남을 종전 후 다시 찾으려다 베트남 국민의 강력한 저항에 밀려 결국 디엔비엔푸 함락(1954년)과 함께 베트남에서 철수하고, 이집트의 나세르는 영국과 프랑스가 점유하고 있는 수에즈 운하 국유화를 선언(1956년)했다가 영국?프랑스?이스라엘과 제2차 중동전을 벌여야 했다. 중국은 대만의 금문도를 대대적으로 포격(1958년)하기 시작해 미국과 전쟁 일보 직전까지 몰고갔다. 미국에서는 매카시 광풍(1950년)이 집단 히스테리로 발전하고 로젠버그 부부가 간첩혐의로 사형(1953년)되는 과정에서 여론이 분열되었다.

미국은 흑백 차별 철폐를 위한 운동으로도 진통을 겪고 몸살을 앓았다. 미 연방 대법원이 "분리된 시설은 본질적으로 불평등하다"며 “공립학교의 흑백 분리는 불평등하다”고 판결(1954년)했는데도 백인 학교가 학생들의 등교를 가로막아 학생들이 공수부대의 도움을 받아 등교하는 리틀록 사태(1957년)가 벌어졌으며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1955년)으로 공공버스에서의 인종차별 위헌 판결(1956년)을 끌어내는 등 1950년대 내내 흑백 차별 철폐를 위한 움직임이 미 전역에서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다.중국에서는 모택동이 무리하게 대약진운동(1958년)을 벌여 3,000만∼4,000만 명을 굶어죽게 하고 팽덕회를 실각(1959)시켜 사회 전반에 무거운 침묵을 강요했다. 이란에서는 모하마드 모사데크가 석유를 국유화(1953년)하는 탈제국주의 몸부림을 치다가 그 자신이 쿠데타로 쫓겨나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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