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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어
서문 1장 강제로 열린 새시대 2장 걸음마: 1950년대 ~ 1960년대 3장 성장: 후쿠시마와 1970년대 4장 일탈: 원자력 마을과 안전사고, 그리고 1980년대 5장 잃어버린 10년: 1990년대 6장 전조: 2000년대 7장 복합재난 8장 여파 후기 마지막 단상 |
ANDREW LEATHERBARR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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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 일으킨 동일본 대지진이 도화선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후쿠시마 제1 발전소의 몰락은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인재人災였고 일본이 반드시 제대로 대비해야 했던 사고였다. 어쨌든 일본은 매일 미미한 지진을 겪고 몇 년에 한 번씩은 쓰나미를 동반한 강력한 지진을 맞이하는 나라다.
---「서문」중에서 6주간 75만 명이 관람해 “사람이 넘쳐났던” 이 전시회는 완벽한 성공을 거두고 도쿄에서 막을 내렸다. 이 단합된 노력은 “핵nuclear”과 “원자atomic”라는 두 단어를 떼어내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 전자가 핵무기를 떠올리게 한다면, 후자는 인류의 발전을 위한 것이며 기본적으로 평화로운 것으로 묘사되었다. 심지어 핵무기를 반대하는 조직 중 일부도 평화로운 원자력은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장 걸음마」중에서 이시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경로를 밟은 인물들은 정부와의 협상에서 더 유리한 조건을 얻어내는 수단으로 옛 동료들과의 관계를 이용했다. 1959년부터 2010년까지 도쿄전력의 부사장을 지낸 인물 중 4명은 원자력을 규제하는 기관에서 최고위 관료를 지냈던 이들이었고 부사장 자리 자체가 통상산업성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맡다가 물러난 이들을 위해 준비된 것처럼 여겨졌다. 당연히 정부에서 일하는 동안 도쿄전력에 우호적이었던 인물들이었다. 이런 퇴직 관료들은 우연히 돈을 두둑이 챙겨주는 산업에서 아주 높은 자리를 얻은 것이 아니었다. 미래의 후원자들에게 관대함을 보였을 때 주어지는 보상이었다. ---「4장 일탈」중에서 마에카와는 두 사람이 도쿄대학교 병원에 있을 때 살아남을 가능성이 가장 커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이 병원의 응급의학 전문의였다. 그는 사고가 발생하기 전 정보를 교류하는 회의에 참석했었고 “원자력 시설 근처에서 일하는 병원 의료진과 직원들이 방사선 응급의학에 관해 얼마나 부적절한 교육을 받는지 알고 경악했다”고 인정했다. ---「5장 잃어버린 10년」중에서 규모가 7.3인 이 지진은 1995년 고베를 파괴했던 규모 6.9의 지진보다 2.5배 넓은 영역에 영향을 미쳤고 4배로 강력했지만 오나가와, 히가시도리, 후쿠시마 제1, 제2 발전소에서는 60센티미터의 쓰나미 파도를 거의 알아채지 못했다. 이 지진은 더 큰 지진에 선행한 전진前震이었고 앞으로 불어닥칠 참사를 예고했다. 동부 해안을 습격했던 마지막 대형 지진이자 869년의 거대한 쓰나미를 초래했던 지진이 찾아온 뒤 정확히 1,142년이 흘렀다. 오랫동안 뒤늦게 찾아올 “빅원”을 경고받아온 일본의 시간이 끝났다. ---「6장 전조」중에서 |
#1 원자폭탄 피폭국인 일본은 왜 원자력 발전의 열렬한 지지자가 됐을까?
“원자력은 한때 폭력적인 맹수였지만, 이제 가축이 되어가고 있다.” “일본은 국제 사회에서 제자리를 찾기 위한 노력의 하나로 원자력을 옹호하며 국력을 키워야 한다” -정치인 나카소네 야스히로 역사는 참 알 수 없는 것이다. 1955년 12월 정치인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원자력 법안을 제안하며 원자력 발전을 통해 일본이 발전해야 한다고 말했다. 불과 10여년 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맞은 일본이 어느새 ‘평화를 위한 원자력’을 외치게 된 것이다. 일본의 상류층들은 자신들이 미국과 전쟁을 불사하면서 이루고자 했던 에너지 자립의 꿈을 이뤄줄 방법이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에게 큰 피해를 입힌 원자력 발전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미국 역시 원자력 기술을 수출하고자 하는 의지로 일본에 접근한다. 요미우리신문을 필두로 ‘평화를 위한 원자력’의 대대적 홍보가 시작된다. 핵폭탄은 위험하지만, 원자력은 좋은 것이라는 인식을 심기위해 수많은 선전전을 펼친 것이다. 결국 일본은 1960년대 도카이 원자력 발전소를 시작으로 원자력 발전의 역사를 열게 된다. #2 ‘아마쿠다리(낙하산)’,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안전에 중점을 둔 민주적 개방’의 원자력 정책을 갉아먹다. “같은 사람들이 규정을 만들고 점검을 하며 검사 결과를 승인한다. 규제 기관은 전력회사들이 올린 보고서에 도장을 찍을 뿐이다” -지진학자 나카타 다카시 아마쿠다리, 가쿠바쓰는 우리말로 ‘낙하산 인사’와 ‘학벌’을 가리킨다. 일본 문화에 깊숙이 자리잡은 관행인 두 가지는 어느덧 안전을 중심으로 둬야하는 원자력 발전소 관리에 점점 구멍을 만들게 된다.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일어난 이후, 1960년대부터 원자력 산업 규제를 담당했던 고위 관료들이 전력회사의 경영진이나 고문을 맡아 많은 돈을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들이 단순히 오랜 기간 원자력 분야에서 근무했기에 취직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미래의 후원자인 전력회사에 관대했거나, 정부와의 협상에서 유리한 조건을 얻어내는 수단으로 옛 동료들과의 관계를 이용할 목적으로 채용됐다. 결국 철저히 감시받고, 관리해야 할 규제는 어느덧 전력회사들의 입맛에 맞춰 느슨해지고 있었다. #3 경제, 정치의 논리가 안전의 논리를 뒤집다. “그가 내게 무엇을 말하려는지 이해할 수 없어 ‘당신이 원자력 전문가요?’라고 물었다. 그는 해맑게 ‘저는 도쿄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당시 총리 간 나오토 원자력 발전소 사고는 방사능 사고를 비롯해 인명 피해가 크게 일어나기 때문에, 그 어떤 분야보다 안전의 논리가 중요했다. 물론 초기의 원자력 규제에서는 이 점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점점 기술자가 아닌 경영인의 논리가 원자력 발전소를 지배하기 시작한다. 후쿠시마 대참사 당시 간 총리를 보좌하던 원자력안전보안원장 데라사카 노부아키는 원자력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다. 이로 인해 간 총리의 내각에 적절한 조언이나 메시지 전달을 하지 못했다. 또한 2008년에 쓰나미의 높이를 15.7미터로 예상하고, 방파제의 높이를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예산상의 이유와 재설계가 어렵다는 이유로 고작 6미터 남짓의 방파제로 방치했고, 2011년 3월 11일 15미터의 쓰나미는 후쿠시마 제1 발전소를 침수시켰다. 원자력 전문가로 손꼽히는 앤드류 레더바로우의 두 번째 책 『후쿠시마』! 일본 원자력 발전의 수상한 역사속에 우리가 보인다. 앤드류 레더바로우는 원자력 발전소 사고에 있어서 전문가로 손꼽힌다. 전작 『체르노빌』을 집필하고, 많은 사람들이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를 제대로 알게 해준 HBO의 [체르노빌]드라마에 감수도 맡았다. 그런 그가 또 하나의 7등급 방사능 사고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를 추적했다. 이번에 그는 일본 원자력 발전의 역사를 추적하며, 왜 후쿠시마 대재앙이 단순히 지진과 쓰나미로 인해 비롯된 게 아닌, 일본이 만든 인재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가 추적한 일본 원자력 발전의 역사는 낯익은 모습이다. 학벌과 낙하산, 고위관료가 기업의 고문으로 들어가 각종 규제를 눈감아주는 모습, 안전 불감증과 시스템을 맹신하는 문화, 그리고 과학과 안전이 아닌 정치, 경제적인 논리로의 계산 등은 불편하게도 우리 사회에도 깊숙이 침투해 있는 관성이다. 한국은 현재 탈원전과 원자력 발전이라는 갈림길에 서있다. 작가 레더바로우는 원자력 발전에 대해 옹호하지도, 반대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의 이런 조사를 통해 우리가 만약 원자력 발전의 길을 선택한다면, 일본이 직접 보여준 이런 실수들을 반복하면 안될 것이다. 반대로 탈원전을 한다면, 원자력 발전의 위험성과 원자력 발전소 관리의 어려움과 사고에 따른 피해를 알게 해줄 것이며, 재생에너지 및 다른 에너지 개발을 해야 한다는 근거가 될 것이다. 원자력 발전은 매우 효율 좋은 에너지 발전기술이다. 한편으로는 관리하기 까다로운 기술이기도 하고, 사고 발생시 치명적인 인명피해가 발생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전문적인 관리와 끊임없는 감시가 필요하다. 일본은 차근차근 안전에 구멍을 만들었고, 결국 치명적인 사고로 이어졌다. 과연 우리는 어떨까? 우리에게 원자력 발전은 효율 좋은 미래 에너지인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