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놀라운 발견
들어가는 말 야상곡 Ⅰ: 베를린과 노르트하우젠 1937-1943년 죄와 놀이: 쾨니히스베르크 1867-1885년 출발: 베를린과 쾨니히스베르크 1886-1888년 자유분방한 삶을 즐기다: 뮌헨과 파리 1888-1904년 아이-예술-남편: 베를린 1891-1897년 예술가들이 들고일어남: 베를린 1898-1913년 결혼 혹은 자유연애?: 베를린과 피렌체 1898-1913년 열광, 영웅적 죽음: 베를린과 플랑드르 1914-1916년 야상곡 Ⅱ: 노르트하우젠 1943-1944년 비통과 저항: 베를린과 모스크바 1916-1927년 명성: 베를린 1919-1933년 암흑: 베를린 1933-1940년 야상곡 Ⅲ: 모리츠부르크 1944-1945년 감사의 말 옮긴이의 말 - 케테 콜비츠는 누구인가? 원전 출처 인명 색인 도판 출처 |
Yury Winterberg
Sonya Winterberg
조이한의 다른 상품
김정근의 다른 상품
|
이 초상화는 현존하는 자화상 중에서 가장 초기의 것일 수 있다. 선은 이미 확고하고, 구성은 아직 모색 단계에 있다. 그녀의 눈빛은 신중하고, 비판적이면서 초롱초롱하다. 거의 십 대 후반 소녀의 눈빛이다. 하지만 시선을 피하지 않고 관찰자를 똑바로 바라본다. 이것보다 몇 주 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쾰른의 콜비츠 미술관이 소장한 이와 유사한 유명한 작품에는 자의식으로 충만한 손의 자세가 추가되어 그려져 있다. 이제 처음으로 가능해진 초창기의 두 작품을 비교하면 이 젊은 여성 화가의 자신감과 능력이 성장하는 것을 마치 저속 촬영한 것처럼 볼 수 있다. 스물두 살짜리가 이제 막 세상을 정복하려고 한다.
---「놀라운 발견」중에서 콜비츠의 관점에서 보자면 결국 재능이 좀 더 많다는 것이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나는 아주 야심이 많았지만 리제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얻고자 하는 편이었고, 리제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의 아들 한스는 나중에 어머니와 대화를 나눈 뒤에 다음과 같이 적는다. “어머니는 예술적으로 리제 이모처럼 쉽게 성과를 내지 못했다. 리제 이모는 스케치를 훨씬 쉽게 습득했는데, 아마도 모든 것이 아주 쉽게 이루어졌고 어디서나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손해를 보았을 것이다.” ---「죄와 놀이」중에서 전통적인 콜비츠 전기는 의사의 아내로서 케테가 경험한 것이 사회 참여적인 미술을 향해 나가도록 만든 최초의 자극이라고 본다. 우리는 그 반대의 경우가 맞는다고 생각한다. 하웁트만 공연에서 받은 충격으로 비로소 그녀는 집안 복도에서 진찰을 받기 위해 기다리던 사람들의 모습을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되었다. 그제야 그녀는 겉모습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의 내면 삶에서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을 식별할 수 있게 되었다. ---「아이-예술-남편」중에서 콜비츠는 다음과 같이 일기장에 적는다. “이야기를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그리고 말없이 듣기만 하는 아이가 온 힘을 다해 내면에 있는 것을 이겨내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했기 때문에, 어떤 말도 찾을 수가 없다. 우리는 문가에 서서 껴안고, 키스를 하고, 페터를 위해서 카를에게 부탁한다. 이 유일무이한 시간. 그가 내 마음을 움직여 끌고 갔고, 그리고 우리가 카를의 마음을 움직여서 받아들이도록 만든 이 희생.” 그것이 희생이라는 사실이 어머니에게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나는 전쟁을 저주했다. 나는 전쟁이 가장 힘든 것을 요구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저항하지 못한 것은 아마도 이 마지막 순간에 그 아이와 온전히 하나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 싫다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오직 그렇게만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열광, 영웅적 죽음」중에서 케테 콜비츠에게 둘째 아들의 죽음은 그녀가 1944년 초에 한스에게 쓴 것처럼 “내 인생에서 가장 큰 타격”으로 여전히 내면에서 완전히 치유되지 않은 상처였다. 유타 본케 콜비츠는 “그 이후로 할머니에게 그보다 더 큰 충격은 없었다”고 말한다. “남편의 죽음이나 집을 잃은 것이 당연히 고통스러웠겠죠. 하지만 오빠가 죽었을 때, 할머니의 가장 커다란 걱정은 아들 내외가 그것으로 무너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어요.” 그 차이는 아마도 환상이 끝났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녀는 오랫동안 아들 페터가 희생적인 죽음을 맞았고, 그의 죽음은 의미가 있었다는 생각에 매달려 있었다. 손자가 전사했을 때 그녀는 더 이상 그런 것을 믿지 않았다. ---「야상곡 Ⅱ」중에서 그녀의 지명도가 점점 높아지면서, 사람들은 미술이라는 수단을 이용해 세상의 불의에 맞서도록 그녀 주변으로 모여든다. “나도 기꺼이 내 작업으로 도움을 주려고 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느끼는 것처럼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다음처럼 다그치는 소리를 듣는다. 빨리, 빨리! 벽보를 제작하시오! 노인들을 돕기 위해! 아이들을 돕기 위해! 빨리, 빨리, 빨리, 마치 자명종이 뒤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비통과 저항」중에서 대체로 그는 토요일 늦게 온다. 유타는 아직 깨어 있지만, “어머니 방은 이미 오래전에 불이 꺼져 있었다. 조용히 어머니에게로 다가가서는 어머니를 쓰다듬는다.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한스냐? 아, 네가 와서 좋구나. (……)’ 그리고 아침에 깨어나실 때면 유타에게 ‘내가 꿈을 꾼 것이니 아니면 어제 한스가 왔었니?’ 하고 물으셨다.” 나중에 케테는 아르네의 달력에 한스가 그녀를 데리고 집으로 가는 꿈에 대해 적어놓는다. 그녀는 글을 쓰는 동안은 정신이 든 것처럼 보인다. “벌써 1월 12일이다. 엄청난 통증.” 그것이 그녀가 마지막으로 쓴 글이다. ---「야상곡 Ⅲ」중에서 이 책은 케테 콜비츠의 모순되고 흔들리는 인간적인 면모를 그대로 드러낸다. 그녀는 자신이 전쟁과 같은 정치 영역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인지 의심하고 주저했다. 그런 그녀가 일기를 통해 끊임없이 자문하고 회의하면서 생각을 다져나가고 드디어 전쟁을 계속하려는 사람들에게 반대해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까지의 과정을, 그 의식의 변화를, 관념적으로 일어난 변화가 아니라 자신의 심장을 내어주고 얻은 결론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준다. ---「옮긴이의 말」중에서 |
|
단순한 동정을 진정한 예술로 바꾸는 데 성공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케테 콜비츠의 일대기 “말 없는 선들이 고통의 비명처럼 골수까지 파고든다.” -게르하르트 하웁트만(노벨 문학상 수상자) 케테 콜비츠는 양차 세계 대전에서 아들과 손자를 잃고 매일이 칼날 위에 서 있는 아픔이었을 형벌의 시간을 위대한 예술로 승화한 모성의 예술가로 알려져 있다. 콜비츠는 노동자의 삶을 진솔하게 표현한 판화가였으며 사회적 약자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사회의 비리를 고발한 뛰어난 통찰력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빈민촌에서 의사인 남편과 함께 헐벗고 굶주린 환자들을 보살피면서 가난의 비참함을 유심히 스케치하는 한편 굳은살 박인 노동자의 손에서 창조의 힘을 발견해 낼 줄 알았다. 시선은 언제나 고통 받는 사람을 향했고 단순한 동정을 진정한 예술로 바꾸는 데 성공한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이 책은 콜비츠라는 평범하다 못해 유약하기까지 했던 한 여성이 선전선동의 교두보가 되어 펄럭이는 깃발에 새길 판화를 제작하고 저항의 아이콘이 되기까지, 그리고 “다시 전쟁은 안 돼!”라고 외치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한 편의 드라마처럼 엮었다. 그런가 하면 한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콜비츠가 겪어야 했던 심정적 고뇌와 흔들림,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자신의 능력에 대한 회의,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의무감과 책임감, 기존의 틀과 몸에 밴 관성을 깨부수기 위해 겪어야만 했던 초조, 불안, 회의, 절망 등에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콜비츠를 만날 수 있다. 이 책은 초지일관 신념을 밀고 나간 영웅적인 인간이기 전에 콜비츠라는 한 여성이 가진 다양한 욕망, 모든 예술의 본질인 질긴 생명력을 재발견하는 계기가 되어줄 것이다. 위대한 연약함의 고백, 한 여자가 삶의 진실을 말한다면 세계는 터져버릴 것이다 “여자가 이걸 제작했다고? 사람들이 물었다. 그리고 미술에서, 특히 지금까지 여성이 예술 창조자로 활동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간주되던 그래픽 분야에서 여성 예술가들의 지위를 성찰한 글이 나왔다.” 콜비츠의 작품에는 유독 여성이 많이 등장한다. 콜비츠의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그림에 관심이 많았던 그녀에게 아름답지 않아서 사랑 놀음 따위에 방해받지 않고 예술을 계속할 수 있을 거라고 평가한다. 당시는 많은 여성 화가들이 전시회에 출품하기 위해 이름을 중성적으로 줄여 기재해야 했다. 『직조공 봉기』 연작 기사를 내보낸 프랑스 잡지는 콜비츠가 아닌 그 스승의 이름을 기재했다. “여성에게 메달이라니, 너무 나가지 않았소. 고귀한 상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것과 다름없는 짓이오! 훈장과 명예 휘장은 공을 세운 남자들의 가슴에 달리는 것이오”라는 황제의 거부권으로 수상에서 제외되었던 콜비츠였기에 여성의 고통과 몸부림을 작품에 옮기는 일은 예술가로서 숙명에 가까웠을 것이다. 싱글맘이자 유대인이었던 뮤리얼 루카이저는 「케테 콜비츠」라는 시에서 “한 여자가 본다/그 폭력을, 수그러들지 않는/알몸의 움직임을/‘아니오’라는 고백을/위대한 연약함의 고백을, 전쟁을, …… 한 여자가 자기 삶의 진실을 말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세계는 터져버릴 것이다”라고 노래했다. 마지막 두 문장은 우리에게 미투 운동의 슬로건으로도 알려져 있다. 뮤리얼 루카이저와 동시대를 살았던 여성 시인 에이드리언 리치는 「갈망」이라는 시에서 “페이지마다 기록한다. 고생에 찌든 아이들을 고생에 찌든 품에 끌어안은/콜비츠의 여자들을, 젖이 마른 ‘엄마들’을”이라며 콜비츠의 판화에서 튀어나올 듯한 여성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예술을 통해 교감하고 연대했던 여성들은 죽이는 전쟁에서 먹여 살리기 위한 투쟁을 감행했고, 서로를 알아보고 손을 건넸던 것이고 맨 앞에 콜비츠가 있었다. 그들은 위로하고 응원하고 동행하는 것이 예술이 나아갈 길임을 알았던 것이다. 이 책에 실린 콜비츠의 ‘어머니’들은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1903년), 「굶주림」(1922년), 「빵」(1924년), 「가내 노동자」(1925년), 「자화상」(1924년) 등에서 말없이 고통을 끌어안고 절규하면서 마지막까지 커다란 두 손으로 아이들을 감싸고 있다. 콜비츠는 “보시오, 우리 모두가 겪은 참상을”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인간의 존엄성을 위한 혁명만이 길임을 몸소 실천한 반전 운동가 “희생을 강요받은 침묵하는 독일 민족의 목소리를 구체적으로 표현한 미술가.” -로맹 롤랑(노벨문학상 수상자) 유화를 전공하기 위해 들어간 학교에서 콜비츠는 판화를 접한다. 판화는 유화처럼 집 안을 장식하는 유한계급의 값비싼 소장품이 아니라 얼마든지 복제가 가능하고 대중적이며 선동적이기까지 한 홍보에 적합한 민중의 매체다. 평생 아틀리에에 갇힌 예술을 넘어 민중이 현장에서 대중 예술을 향유하기를 바랐던 콜비츠에게 판화는 맞춤한 작업 방식이었을 것이다. 콜비츠는 빠르고 천재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느리면서도 끈질기게 평생 판화와 조각으로써 젊은이들이 의미 없이 희생되는 전쟁에 반대했다. 히틀러와 나치의 집권을 막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서명을 하고 힘을 보탤 필요가 있는 곳에서는 작품만이 아니라 직접 거리로 나오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어떤 당에도 속하지 않았지만 끊임없이 반전 판화를 제작한다는 이유로 당국의 감시와 가택수색을 당해야 했던 콜비츠. 그녀는 2차 세계대전 종전을 보름 앞두고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쓸쓸히 죽음을 맞았다. 우리에게는 익숙하고도 낯선 이 책은 ‘추모’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한편으로 끝없는 분노, 슬픔 등 감정의 소용돌이에 갇혀버린 콜비츠의 작품 속 혼령들은 세상의 불의에 눈감지 말 것을 역설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