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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역사 다이제스트 100
개정판
가람기획 2023.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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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제스트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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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머리말

제1장. 고대 이집트 시대(BC3000년~BC341년)

1. 이집트 나일 문명의 태동
2. 고대 이집트인의 시간과 달력
3. 고대 이집트인의 죽음과 저승세계
4. 고대 이집트 문자, 히에로글리프
5. 메네스, 최초로 통일 이집트 왕국을 건설
6. 조세르, 계단식 피라미드를 세우다
7. 기자 피라미드 시대의 개막
8. 신비의 스핑크스
9. 헬리오폴리스의 신전과 태양신 라의 숭배
10. 고왕국 시대 농부들의 생활
11. 국가의 엘리트, 서기와 귀족들
12. 기울어지는 파라오의 권세
13. 고왕국 시대의 종말
14. 제1중간기의 거친 세상에서 움트는 자유와 평등사상
15. 혼란기에 태동한 염세적 세속문학
16. 중왕국 세누스레트 왕들의 시대
17. 힉소스족의 침입과 이집트 지배
18. 힉소스 지배에 대한 테베의 저항
19. 힉소스족을 물리친 아흐모세 1세의 위업
20. 투트모세 1세, 왕가의 계곡을 건설하다
21. 수염을 달고 이집트를 지배한 남장 여왕 하트셉수트
22. 17차례 원정을 한 위대한 정복자 투트모세 3세
23. 고대 이집트 시대의 군대와 병사
24. 아톤 신을 숭배한 종교개혁자, 이크나톤
25. 고대 이집트 외교문서의 표본, 아마르나 문서
26. 황금가면의 주인, 소년왕 투탕카멘
27. 람세스 2세와 히타이트의 대결전, 카데시 전투
28. 위대한 이집트 문명의 건설자 람세스 2세
29. 고대 이집트 여인들의 생활상·123
30. 모세가 이끈 유대인의 출애급
31. 해양민족들의 침입
32. 리비아인 군주, 소센크 1세
33. 파피루스 종이의 생산
34. 흑인 파라오 피예와 샤바코
35. 아시리아의 침입과 이집트 지배
36. 상인 왕조, 사이스 조
37. 페르시아의 캄비세스 2세, 이집트를 정복하다
38. 고대 이집트인들의 사랑과 남녀관계

제2장. 그리스·로마 시대(BC332년~AD641년)

39. 알렉산더, 이집트 정복 후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하다
40. 프톨레마이오스 조의 시작
41. 고대 문명의 불가사의, 파로스 등대
42. 사제 마네톤, 『이집트 사』를 편찬하다
43. 세계 최대 규모였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44. 위대한 여걸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사랑
45. 악티움 해전과 클레오파트라의 최후
46. 로마 제국의 속주로 전락한 이집트
47. 아기 예수의 피난길
48. 마가의 복음 전도와 순교
49. 수력을 이용하는 기중기를 발명한 헤로
50. 알렉산드리아에서 일어난 폭동들
51. 로마의 기독교도들에 대한 탄압
52. 예수의 신성론에서 앞장서간 알렉산드리아의 신학파
53. 알렉산드리아의 여성 철학자, 하이페티아
54. 이집트, 비잔틴 제국의 영토가 되다
55. 사막의 배, 낙타

제3장. 이슬람 시대(641년?1798년)

56. 아무르 이븐 알 아스의 아랍·이슬람군, 이집트 정복하다
57. 이집트의 새 수도, 푸스타트의 건설
58. 이슬람 제국의 속주가 된 이집트
59. 아랍인의 이집트 정착과 이집트의 아랍화, 이슬람화
60. 이슬람 국가, 이집트에서의 콥트교도들
61. 독립왕조, 툴룬 조의 성립
62. 장엄한 건축미를 자랑하는 이븐 툴룬 모스크
63. 파티마 조, 이집트를 정복하고 새 수도 카이로를 건설하다
64. 알 아즈하르 사원의 건립과 알 아즈하르 대학의 개원
65. 기인 칼리파 알 하킴
66. 시인 쿠스라우가 본 파티마 조의 번영
67. 십자군을 물리친 무슬림 세계의 영웅, 살라딘
68. 알 카밀과 프레데릭 2세 간의 평화조약
69. 포로가 된 프랑스 왕 루이 9세와 최초의 무슬림 여왕 샤자르 알 두르
70. 노예 출신 술탄들이 통치한 맘루크국의 등장
71. 맘루크 통치에 대한 아랍의 반란
72. 아인 잘루트 전투
73. 맘루크 술탄, 허수아비 칼리파 제를 세우다
74. 알 아즈하르의 융성과 이슬람 문화의 중심지가 된 카이로
75. 맘루크군, 십자군 세력을 시리아에서 몰아내다
76. 몽골의 가잔 칸과 맘루크 술탄 나세르와의 대결
77. 티무르렌의 침입
78. 포르투갈, 맘루크 해군을 격파하고 인도양을 지배하다
79. 오스만 제국의 이집트 정복
80. 알리베이의 반란

제4장. 현대 이집트(1798년?현재)

81. 나폴레옹의 이집트 침입
82. 나폴레옹에 저항한 알 아즈하르의 쉐이크들
83. 로제타 석 발견으로 상형문자 해독되다
84. 근대 이집트의 아버지 무함마드 알리의 등장
85. 무함마드 알리의 개혁과 치적
86. 근대 이집트의 전쟁영웅, 이브라힘 파샤
87. 최초로 바다와 바다를 이은 수에즈 운하 개통
88. 오라비 반란과 민족주의 세력의 등장
89. 이집트와 영국의 수단 공동통치
90. 딘샤와이 마을 사건
91. 영국, 이집트의 독립을 선언하다
92. 엘 알라메인 전투
93. 팔레스타인 전쟁: 제1차 아랍·이스라엘 전쟁
94. 자유장교단의 혁명
95. 수에즈 전쟁: 제2차 아랍·이스라엘 전쟁
96. 6일 전쟁: 제3차 아랍·이스라엘 전쟁
97. 불에 타버린 카이로의 오페라 하우스
98. 10월 전쟁: 제4차 아랍·이스라엘전쟁
99. 캠프 데이비드 협정
100. 사다트의 암살과 무바라크 대통령의 취임

이집트역사 연표

저자 소개2

한국외국어대학교를 졸업하였다. 이집트 알 아즈하르 대학교 역사와 문명과를 졸업, 문학석사 및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한국이슬람학회 회장, 한국중동학회 회장, 한국외국어대학교 아랍어과 학과장, 동대학원 중동 아프리카 지역 연구학과 주임교수, 중동연구소 소장 역임하였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아랍어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 및 논문으로는 '이슬람 칼리파제사'(민음사, 1997), '이슬람 세계의 정치와 국제관계'(공저, 도서출판 오름, 1999), '중동의 새로운 이해'(도서출판 오름, 1999), '이슬람 사상의 형성과 발전'(공저, 아카넷, 2000), '역사
한국외국어대학교를 졸업하였다. 이집트 알 아즈하르 대학교 역사와 문명과를 졸업, 문학석사 및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한국이슬람학회 회장, 한국중동학회 회장, 한국외국어대학교 아랍어과 학과장, 동대학원 중동 아프리카 지역 연구학과 주임교수, 중동연구소 소장 역임하였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아랍어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 및 논문으로는 '이슬람 칼리파제사'(민음사, 1997), '이슬람 세계의 정치와 국제관계'(공저, 도서출판 오름, 1999), '중동의 새로운 이해'(도서출판 오름, 1999), '이슬람 사상의 형성과 발전'(공저, 아카넷, 2000), '역사상의 국가권력과 종교'(공저, 일조각, 2000), '20세기 중동을 움직인 50인'(공저, 가람기획, 2000), '이슬람, 교리, 사상, 역사' (일조각, 2005), '대 아랍 비밀협정', '이슬람 국가의 정치제도 연구', '이집트의 이슬람 원리주의 운동' 외 다수가 있다.

손주영의 다른 상품

한국외국어대학교 아랍어과 졸업하였다. 이집트 알 아즈하르 대학교 역사와 문명과를 졸업, 석사 및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한국이슬람학회 회장, 조선대학교 외국어대학 아랍어과 학과장, 동대학 부학장을 역임하였다. 현재 조선대학교 외국어대학 아랍어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 및 논문으로는 『중동지역 연구』(조선대학교 출판부, 2000), 『케임브리지 이슬람사』(공동번역, 시공사, 2002), 『고등학교 아랍 문화』(교과서 교육인적자원부, 2003), 「이집트 무슬림 형제단의 성장, 투쟁, 사회적 역할 및 제도권 진입에 관한 연구」 「오만의 이슬람과 그 전망」 「몽골의 동부
한국외국어대학교 아랍어과 졸업하였다. 이집트 알 아즈하르 대학교 역사와 문명과를 졸업, 석사 및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한국이슬람학회 회장, 조선대학교 외국어대학 아랍어과 학과장, 동대학 부학장을 역임하였다. 현재 조선대학교 외국어대학 아랍어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 및 논문으로는 『중동지역 연구』(조선대학교 출판부, 2000), 『케임브리지 이슬람사』(공동번역, 시공사, 2002), 『고등학교 아랍 문화』(교과서 교육인적자원부, 2003), 「이집트 무슬림 형제단의 성장, 투쟁, 사회적 역할 및 제도권 진입에 관한 연구」 「오만의 이슬람과 그 전망」 「몽골의 동부 이슬람 세계의 침입」 「한국의 이슬람사」 「중국의 이슬람」 「기독교와 이슬람의 역사적 관계」 외 다수가 있다.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4월 28일
쪽수, 무게, 크기
384쪽 | 564g | 153*225*18mm
ISBN13
9788984355798

책 속으로

사실상 인류 역사의 수많은 주역들이 이 땅을 밟았고, 그들 중 많은 영웅들이 이곳을 점령하고는 위대한 제국을 세웠다. 이 땅의 주인이었던 파라오들이 세운 고대 이집트 파라오 제국은 물론이거니와 외부에서 침입해 들어온 알렉산더가 그리스 대제국을 세웠고, 뒤를 이은 로마 제국, 비잔틴 제국, 이슬람 제국, 오스만 제국 모두가 그러했다.
---「머리말」중에서

모든 동물은 생존하기 위해 먹으며, 또 생존을 위해서 먹을 것이 풍부한 곳을 찾아다닌다. 인간도 그런 조건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구석기 시대의 이집트인들도 다른 아프리카 사람들처럼 아주 간단한 도구를 가지고 유목생활을 하면서 먹을 것이 풍부한 곳을 찾아다녔다. 그러다 지구의 빙하기가 끝나고, 북아프리카의 건조화가 시작되면서 대부분 지역이 사막화되어 가자 사람들은 나일 계곡으로 몰려들었다. 나일 계곡은 물이 풍부하고 무엇보다 먹을 것이 많았던 것이다.
---「이집트 나일 문명의 태동」중에서

이집트인의 무덤은 그야말로 사자死者의 집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하나의 완벽한 생활 공간이었다. 무덤 안에는 죽은 자를 위해 시중을 들 요리사와 빵 굽는 사람, 이발사 등의 동상이 있었고, 사자가 지루한 시간을 보내는데 쓸만한 온갖 기구와 악기들도 갖추어놓았던 것이다. 죽은 자가 부자일수록 값이 나가는 보석들이 함께 묻혔으며, 심지어 사자를 위해 화장실까지 마련한 경우도 있었다.
---「고대 이집트인의 죽음과 저승세계」중에서

람세스 2세는 지칠 줄 모르는 정열적인 건설가였다. 그는 스스로 건축가들을 독려해가면서 신전을 세웠다. 그중에서도 가장 완성도가 높은 걸작 중의 걸작은 바로 아부심벨 신전이었다. 이 신전은 오늘날 인류에게 남긴 가장 소중한 문화 유산 중 하나이다. 두 건축물이 나란히 세워진 것은 남성과 여성 등 창조의 근원을 나타내고 있으며, 각각의 건축물마다 나름의 고유한 천재성이 깃들여 있다.
---「위대한 이집트 문명의 건설자 람세스 2세」중에서

그 뒤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을 패배시킨 후 그리스 대제국을 세우자 이집트는 헬레니즘 세계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그 이후 2,0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이집트는 나세르가 군사 혁명을 성공시킬 때(1952년)까지 외부 세력의 지배를 받는다.
---「페르시아의 캄비세스 2세, 이집트를 정복하다」중에서

이런 뛰어난 건축술의 역사적인 모스크가 오늘날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은 사실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모스크는 여러 번 수리되고 개축도 종종 이루어졌지만, 거의 1200년 동안 장엄하고 아름다운 미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븐 툴룬 사원은 카이로에 남아 있는 수많은 이집트 문화유산 중에서도 가장 자랑할 만한 것들 중의 하나이다. 클레오파트라의 죽음 이후 최초의 독립 왕조를 세웠던 툴룬 조가 카이로에 남긴 중세 이집트의 대표적인 건축예술인 것이다.
---「장엄한 건축미를 자랑하는 이븐 툴룬 모스크」중에서

쿠투즈는 몽골군을 아인 잘루트로 유인했다. 유인작전은 바이바르스가 이끈 맘루크 기병대가 맡아 수행했다. 아인 잘루트에서 맞붙은 양군은 결국 쿠투즈의 작전계획대로 맘루크의 승리와 몽골의 대패로 끝났으며, 이 전투는 세계전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 싸움의 승리로 이슬람 세계는 몽골의 파괴와 정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이후에도 훌라구가 세운 일 칸국國은 수차례에 걸쳐 이집트 쪽으로 몽골의 지배 영역을 확장하려고 했지만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아인 잘루트 전투」중에서

한편 십자군 전쟁 이후 기독교와 이슬람 세계 간에는 정치적 긴장상태가 계속됨으로써 지중해권과 인도양권의 무역은 거의 중단되어 있었다. 유독 이집트만이 국제무역을 독점하고 경제적인 호황을 누렸는데, 이렇게 되자 카이로는 자연히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알 아즈하르는 학문과 종교의 전당으로서 이슬람 학문의 센터가 되었다. 맘루크국의 권위가 높아지고 카이로가 융성해지면서 알 아즈하르는 황금기를 다시 맞았다. 이집트에 또 다른 이슬람 종교학교들이 세워졌지만 결코 알 아즈하르의 명성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알 아즈하르의 융성과 이슬람 문화의 중심지가 된 카이로」중에서

사다트의 이스라엘 방문은 극적이었으며, 그는 서방 세계에서 스타가 되었다. 그러면서도 외부관측자들은 그가 반아랍적 행동으로 말미암아 피살당할 가능성을 걱정했다. 대부분의 아랍 국가들은 분노했으며, 그들은 사다트가 아랍에 등을 돌린 배신자라고 생각했다. 특히 팔레스타인인들은 그가 이스라엘을 방문한 것에 대해 극도로 분개하면서 저주를 퍼부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집트 국민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그들은 다소 불안해하면서도 그들의 대통령이 더 이상의 전쟁을 피하고 평화를 이루기 위해 이스라엘을 방문했다는 사실에 긍정적이었다.

---「캠프 데이비드 협정」중에서

출판사 리뷰

문명이 시작된 이집트, 나일 문명은 어떻게 시작됐고,
어떤 시간을 거쳐왔을까?


이집트 문명의 시작은 나일강에서 시작됐다. 나일강의 풍부한 자원에 몰려든 사람들은 나일강 주변에 정착하게 됐으며, 나일강을 활용해 거대한 경작지를 일궈냈다. 경작지 개척을 위한 치수 사업 과정에서 기하학, 천문, 역법 등과 같은 지식을 얻게 되었고, 잉여생산물을 취함으로써, 생활필수품뿐만 아니라, 장식품을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해되지 않았던 자연현상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죽음, 사후 세계, 행복 등 다양한 것들을 생각함으로써, 문명적인 요소를 만들어 냈다. 또한 잉여생산물로 인해, 사회 계급이 생겨났다. 권력자들은 자신의 지휘를 통해 사회를 이끌어 나갔고, 서로 협력해 발전하는 조직사회로 발전시켜 나갔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밤과 낮을 12시간씩 나누기도 했다. 농사를 짓고 있던 이집트 사람들에게 시간과 달(月)은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종교로 나타냈고, 오시리스 신을 비롯한 다양한 역할을 관장하는 신들을 모시고 받들었으며, 지도자인 파라오는 신의 대리인으로서, 이집트를 보호하고, 제사를 지냈다. 또한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 자신의 무덤인 피라미드를 건축했고, 무덤에 수많은 금은보화를 묻고, 벽화를 그려 넣기도 했다.

영원할 것 같던 파라오의 시대에도 혼돈의 시기가 있었다. 힉소스족의 침입으로 지배를 받기도 했고, 해양민족이라 불리는 집단에게 침략을 당해 국력이 기울기도 했으며, 아시리아, 페르시아 등의 나라에 지배받기도 했다. 결국 클레오파트라 7세를 마지막으로 3000여 년 넘게 이어지던 고대 이집트 왕조는 문을 닫고, 로마 제국의 숙주가 된다.

3000여 년이 넘는 고대 이집트의 화려한 문명은 여전히 남아있다. 피라미드를 비롯해, 다양한 벽화와 비석들, 아부심벨 신전이나, 왕가의 계곡 같은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아 우리에게 많은 영감과 경의를 주고 있다.

이집트의 역사를 읽는 것이
세계사를 읽는 것이다.


『이집트역사 다이제스트100』의 본문에는 이런 문구가 등장한다.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을 패배시킨 후 그리스 대제국을 세우자, 이집트는 헬레니즘 세계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그 이후 20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이집트는 나세르가 군사 혁명을 성공시킬 때까지 외부 세력의 지배를 받는다.”

찬란한 문명과 문화를 꽃피운 고대 이집트 시기를 거쳤지만, 이후 이집트는 세계의 흐름에 따라 다양한 제국의 속주가 되거나, 일부분에 그치고 만다. 책에서는 이런 순간들을 하나하나 집어가며, 이집트가 겪은 고난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로마 제국의 속주가 된 이후 이집트는 다양한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로마 제국의 분열과 멸망으로 뒤를 이은 비잔틴 제국의 영토이기도 했으며, 이슬람 제국의 속주가 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아랍인이 이집트로 들어왔고, 이집트는 이때부터 아랍화, 이슬람화되기 시작했다. 그 후 다양한 왕조를 거쳐간 이집트는 다양한 종교와 문화, 민족이 들어왔으며, 이둔 툴룬 모스크와 같은 이슬람 양식의 건축물이 건축됐으며, 현재 이집트의 수도인 카이로가 지어지기도 했다. 맘루크 왕조는 강한 해상력을 바탕으로 몽고를 비롯한 다양한 외부 민족과의 대결에서 승리했으나, 종국에는 오스만 제국에게 패배하며, 이집트는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 됐으며, 이집트 근대의 아버지 무함마드 알리의 등장 이전까지 이집트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이후 이집트는 영국의 보호령이 되어, 경제·정치적으로 간섭을 받았고, 1922년 이집트 왕국이 공식적으로 독립을 이뤄냈다.

그러나 무함마드 알리 역시, 이집트가 아닌 오스만 제국 출신의 인물이었기에, 1952년 나세르가 자유장교단의 혁명을 통해 이집트 공화국을 세울 때까지, 이집트는 20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외부의 지배를 받아왔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역사의 고난 뒤에는 이집트가 매우 중요한 위치와 풍부한 자원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기도 하다. 패권을 차지하려는 유럽과 아랍의 제국들은 제국을 키우기 위한 교두보로 항상 이집트를 노려왔다. 로마 제국은 이집트를 속주로 삼은 뒤, 이집트의 풍부한 농작물을 바탕으로 제국을 키워갔으며, 이슬람 제국에서도 이집트는 중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또한 십자군 전쟁에서도 이집트를 두고 유럽 세력과 아랍 세력이 맞붙는 결전의 장소가 되기도 했다. 또한 현대에 들어서는 이스라엘과 아랍 세계의 대결에서 맹주국을 자처하는 것이 이집트이기도 하다. 이스라엘과 치열한 전쟁을 치르기도 하고, 사다트 대통령이 수교를 맺으며 우호 관계가 되기도 했지만, 여전히 아랍 세계에서 이집트가 가지는 위상은 무시하기 어렵다.

이집트의 역사를 읽는 것은 세계 패권이 부딪히는 역사를 읽는 것인 동시에, 우리에게 아직은 낯선 아랍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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