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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미리 와 있던 사람들
캐나다 땅을 처음 밟은 사람들 북서해안·고원 지방 원주민 평원·동부삼림 지방 원주민 아북극·북극 지방 원주민 삶의 터전을 잃은 원주민 제2장. 신대륙 발견 유럽 탐험가들의 탐사 카르티에의 도전과 실패 북서통로를 찾아서 다시 찾아온 프랑스인들 제3장. 동부 정착 첫 식민지 아카디아 아카디아와 영·불 간의 갈등 샹플랭과 뉴프랑스 프랑스 탐험가들과 모피상 뉴프랑스의 성장 이로쿼이족의 공격 퀘벡의 서민·상류 사회 뉴프랑스의 농촌생활 허드슨 베이 컴퍼니 영국의 초기 식민지 18세기 노바 스코샤와 뉴펀들랜드 제4장. 대륙 쟁탈 북미대륙의 두 앙숙 영국의 공격과 뉴프랑스의 쇠망 퀘벡의 함락과 뉴프랑스의 멸망 아메리카 혁명의 태동 영국에 대한 저항과 독립 제5장. 낯선 땅에서의 생활 충절파의 이주와 정착 영국 점령하의 퀘벡 시 로어 캐나다 초기 개척자들의 생활 제6장. 전쟁과 반란 1812 전쟁과 캐나다의 승리 전쟁 중 핼리팩스 로어·어퍼 캐나다의 불만과 반란 더럼 보고서 1840년대 킹스턴 제7장. 이민과 팽창 유럽 이민자들의 이주 이민자들의 탐사와 원주민의 분쟁 골드러시 제8장. 연방 캐나다의 태동과 퀘벡 협의회 페니언 신생 캐나다와 수도 오타와 제9장. 바다에서 바다까지 루퍼트 랜드 리엘의 첫 번째 반란 매니토바 주의 탄생 캐나다와 인근 도시의 합병 1870년대 토론토 북서 기마경찰 인디언 조약 철도와 통신 메티스와 인디언의 불만 북서부 반란 루이 리엘의 죽음과 몬트리올 클론다이크 골드러시 제10장. 20세기의 문턱에서 맥도널드와 국가정책 산업발전과 노동운동 아동교육과 미성년자 고용 캐나다 여성의 사회참여 로리에 시대 1895년 위니펙 새로운 이주민과 정착 새로운 도시들의 탄생 브리티시 컬럼비아와 이민자들 19세기 말의 밴쿠버 국제사회와 캐나다의 위상 보어 전쟁 1912년 캘거리 20세기를 향한 캐나다 제11장. 제1차 세계대전 제1차 세계대전과 서부전선 이프르 전투와 비미릿지 전투 공중과 해상작전 전시경제와 징병제도 종전 제12장. 분노의 계절 위니펙 총파업 대공황과 경제정책의 변화 캐나다의 변신 제13장. 제2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의 서막 디에프 기습작전 전시 캐나다 국민 홍콩 전투와 일본계의 수모 후방의 또 다른 전쟁 다시 불거진 징집문제 전쟁의 종식 제14장. 20세기 중반 다시 찾은 평화와 킹 수상 뉴펀들랜드 합병 지하자원의 개발 유엔과 한국전쟁 세인트 로렌스 수로 전후 인구 증가 캐나다의 전후 정치 제15장. 트뤼도에서 크레티앵까지 스타 트뤼도 새로운 이민정책과 다중문화 트뤼도의 개혁과 퇴진 멀로니의 외교정책 자유무역 원주민들의 목소리 엘리자베스 여왕과 캐나다 세기를 넘는 크레티앵 제16장. 퀘벡과 분리주의 뉴프랑스의 후예들 조용한 혁명과 퀘백해방전선 운동 퀘벡의 분리주의 꺼지지 않는 불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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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이 이곳 인디언들의 손에 쥐어지자 손쉽게 들소들을 잡을 수 있었고, 부족들간에 총기를 이용한 싸움이 벌어져 많은 사상자들을 내게 되었다. 특히 18세기와 19세기에는 말을 훔치기 위해 서로 상대방 부족을 습격했으므로 부족들 간의 싸움은 더욱 빈번하게 일어났다.
--- 「3. 평원·동부삼림 지방 원주민 」중에서 처음 유럽인들이 북아메리카에 도착했을 때 캐나다의 원주민들은 수많은 부족으로 나뉘어 있었고, 유럽인들과 만나면서 원주민들의 생활에는 많은 변화가 왔다. 평원족과 같은 부족들은 유럽인들로부터 총과 말을 구하여 한때 번성을 누렸으나, 아북극 지방의 베어툭족과 같은 부족은 멸종하여 이 지구상에 서 영원히 사라졌다. --- 「5. 삶의 터전을 잃은 원주민」중에서 금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이 난 1858년 초만 하더라도 뉴칼레도니아에는 1711,000명도 채 안 되는 유럽인들이 살았지만, 그해 연말에는 이 지역의 인구 가 무려 10배나 증가하여 1만 명에 이르렀다. 그래서 영국은 그해에 밴쿠버 섬 건너에 있는 본토에 새로운 식민지를 세우고 브리티시 컬럼비아라고 불렀다. --- 「37. 골드러시」중에서 그러나 평화는 계속될 수 없었다. 수도 오타와의 연방정부는 정착민들과 인디언들, 그리고 메티스들의 간절한 청원을 묵살했다. 1885년 3월이 되자 그때까지 정부의 적절한 조치를 기다리면서 견뎌오던 그들은 점점 노골적으로 무력폭동에 대한 논란을 하게 되었다. --- 「50. 북서부 반란」중에서 일본계 캐나다인들이 대전 중 겪은 수모와 피해는 대전이 끝나고도 영영 보상받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나 1988년 9월 멀로니 정부가 늦게나마 생존하고 있는 일본계 캐나다인들의 피해를 일부 보상해줌으로써 그들의 억울한 과거는 그나마 달래질 수 있었다 --- 「78. 홍콩 전투와 일본계의 수모」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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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벡 협의와 분리주의로 지속된 캐나다 내부의 충돌다중문화와 이민 정책의 이상 뒤에 남은 분쟁의 역사타협과 갈등이 공존해온 국가, 캐나다
캐나다는 유럽이나 아시아 국가들에 비하면 짧은 역사를 지닌 국가지만, 그 역사는 다른 국가들 못지 않게 복잡하고 굴곡지다. 북아메리카 대륙에 처음 자리를 잡은 원주민마저 아시아에서 이주했기 때문일까, 캐나다와 북아메리카 대륙의 역사는 이민자들의 정착기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북아메리카 원주민, 바이킹, 영국인, 프랑스인, 그 외 21세기에도 다양한 인종의 시민들이 캐나다로 이주해오고 있다. 그로 인해 캐나다의 역사는 타 문화에 대한 갈등과 이해로 이루어져 현재까지도 캐나다 내부 주에서는 독립에 대한 열망과 갈등이 뿜어져 나오고 있다. 최초의 갈등은 북아메리카의 원주민 내부의 갈등이었다. 캐나다를 포함한 북아메리카에는 수많은 원주민 부족들이 존재하였는데, 이들은 채집과 수렵을 통해 번성했고, 타 부족을 약탈하는 것도 꺼리지 않았다. 물론 원주민들 사이에도 통합은 존재했다. 그들은 부족 간의 결혼식이나 대규모 모임을 개최하며 부족의 역사를 전하거나 화합을 꾀하며 살아갔다. 그들의 통합은 유럽인들이 본격적으로 북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기 전까지 이어졌다. 콜롬버스의 항해 이후, 북아메리카 대륙의 존재와 대륙에 존재하는 풍부한 자원을 확인한 유럽 국가, 특히 프랑스와 영국은 당시 열강이던 스페인을 피해 북아메리카 대륙으로 항해할 수 있는 항로와 전초기지 등을 개척한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여러 가지 부족한 물자와 풍토병 등을 치료하기 위해 북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과 협력하거나, 갈등을 빚었다. 그 과정에서 캐나다의 유럽인들은 험난한 자연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원주민, 때로는 상대 국가와도 협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캐나다의 타협적인 사고방식은 영미전쟁 이후 더욱 극대화되었는데, 당시 캐나다의 풍부한 자원과 영토를 노리고 전쟁을 시작한 미국을 상대로, 캐나다인들은 원주민과 유럽인들이 단합하여 미국의 공세를 막아내는 전과를 이루었다. 물론 캐나다의 타협적인 모습이 언제나 긍정적인 면모만을 보인 것은 아니다. 전쟁 후, 캐나다는 국력을 위해 근처의 도시들에게 이익을 제공하며 도시들을 합병했고, 이는 캐나다의 문화적, 역사적 갈등을 유발했다. 대표적으로 퀘벡의 경우 캐나다 내부에서의 독립을 희망하며, 시위나 투표를 통해 자신들의 의견을 표출하고 있다. 그 외에도 21세기 후 다른 대륙에서 이주한 이주민들과의 갈등, 북아메리카 원주민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오늘날의 캐나다는 우리가 외부에서 보는 것처럼 평화롭지만은 않은, 문화적 역사적 갈등이 존재하는 국가이다. 『캐나다역사 다이제스트100』에서는 캐나다의 역사 중 가장 핵심적인 100가지 장면을 선정해 도서에 담았다.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은, 외부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캐나다의 역사와 갈등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며, 오늘날의 캐나다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로 인해 어떠한 갈등이 유발되는지, 그리고 해결을 위한 어떤 노력들을 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15세기에 들어와,지구는 둥글다고 생각한 한 유럽인, 이탈리아 항해사 콜럼버스의 실험으로 인해, 본격적으로 유럽인들이 북아메리카 대륙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당시항해사들과 선원들은 아시아로 가는 항로를 찾기 위해 새로운 바닷길을 탐사하고 있었으나 그들이 발견한 것은 북아메리카 대륙의 섬들이었다. 이들은 원래의 목적인 향신료와 새로운 항로 대신, 북아메리카 대륙의 풍부한 어장과 울창한 삼림, 그리고 모피를 발견할 수 있었다. 북아메리카 대륙 탐사에 가장 공을 들인 국가는 영국과 프랑스였다. 당시 식민지 개척과 동양으로 가는 항로를 개척하는 서구 열강 중 아프리카 항로를 관리하는 스페인을 피해, 새로운 항로와 식민지를 개척하려던 두 나라는 북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식민지 도시들을 세우기 시작했다. 당시 영국은 뉴펀들랜드에 정착기지를 두고 황금어장인 그랜드 뱅크에서 대구잡이를 장악했고, 프랑스는 세인트 로렌스 강 유역에 정착기지를 두고 원주민들과의 모피 교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두 나라는 북아메리카의 교두보라 할 수 있는아카디아를 선점하기 위해 100년이 넘는 전쟁을 시작하게 된다. 아카디아 쟁탈전은 단지 두 나라만의 전쟁이 아니었다. 두 나라는 주변 원주민들을 포섭해 본격적인 전쟁을 시작했고, 영국은 이로쿼이 부족동맹과 동맹을 맺었고, 프랑스는 휴런족과 믹맥족과 동맹을 맺게 된다. 이 전쟁에서 생긴 프랑스와 영국의 갈등은 오늘날 캐나다가 안고 있는 영국계와 프랑스계 사이의 갈등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근대의 캐나다는 자신들이 언젠가는 미국에 합병될 것이라는 불안감으로 인해, 적극적으로 주변의 도시들을 끌어들였고, 자신들이 캐나다인이라는 정체성과 자긍심을 확립해 나갔다. 비록 현재까지도 문화적 갈등과 역사적인 갈등이 존재하는 캐나다이지만, 캐나다인들은 이러한 갈등을 제도와 타협을 통해 해결하며, 다문화 사회로서의 캐나다의 첫 발을 내딛어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