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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익사한 남자의 이야기
1부 오늘: 내일과 어제 힙스터리즘(1), 우리의 취향이 막다른 곳에 이르렀을 때 힙스터리즘(2),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힙스터리즘(3),「구모」를 보고 한 생각 힙스터리즘(4), 피치포크의 수정주의적 전환에 관한 메모 플레이리스트, 그것은 나의 즐거움: 취향, 폭력, 짐 오로크-기능 문화비평: 비천함, 실패, 나쁜 것에 관한 정직한 성찰 비평? 라이프 스타일? 우리는 웃고 있다 2022년: 조각난 시네필리아에 관한 메모 2부 내면: 유머와 비극 유머의 보수적 용례: 하이데거가 아니라 놈 맥도널드의 경우 루이 C. K. vs. 강덕구 방 안에 있는 남자(악마): 영혼, 성격, 내면 그래서 무엇보다 사랑에 빠진 기분: 동시대 영화의 형식에 대한 고찰 팝음악에서 말년의 양식이란 무엇인가?: 사라진, 실종된, 은둔한, 그리고 다시 돌아오는 음악 3부 우리: 한국과 한국인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250의 《뽕》 에 관해 「버닝」은 문화의 폭발이다 아프리카TV의 지속 시간: 리얼의 무대화 홍상수에 관한 별 볼 일 없는 생각 정성일-기능에 관해서 혹은 우리가 앓고 있는 질병은 오래된 것이다 4부 추문: 도발과 공격 「살인마 잭의 집」에 관한 12편의 메모 세르주 다네의 「‘카포’의 트래블링」에 대하여 왕빙은 어떤 문제인가? 정전은 오늘부터 내일까지 우리를 괴롭힌다 물질을 불태우고, 타오르는 물질에서 말런 브랜도의 손, 존 웨인의 손: 영화라는 가치 체계 에필로그: 완전한 무정부 사태를 회고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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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의 무의식에서, 당신이 잠자리에서 뒤척거리며 꾸는 꿈속에서, 다시 말해 열광과 욕망이 펄펄 끓는 아수라장에서 예술가들은 영혼의 구원을 꿈꿨다. 예술이 밑바닥에 가라앉은 더러운 것들과 친교를 맺은 것은 구원에 대한 갈망 때문이다. ‘선악과를 먹은 최초의 인간’이라는 비유에는 죄를 짓지 않고선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역설이 담겨 있다. 왜,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라는 용어도 있지 않은가? 더러운 이야기는 우리를 매혹한다. ‘선악과’는 곧 이야기이며, 내가 이야기에 매혹된 이유이기도 하다. 인간사에서 우리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움튼 욕망들은 은유로 표현되어야만 했다. 진실을 회피하고자 하는 욕망, 섹스와 폭력, 더러운 짓거리에 관한 욕망은 항상 이야기라는 거름망을 통과했다.
--- p.13~14 박광성은 내게 이토 준지의 만화 『소용돌이』의 내용을 설명했다. “사람들이 소용돌이에 완전히 집착한다고. 인간이 달팽이로 변하는데…… 또 다른 인간들이 그 달팽이를 먹어.” 주먹코 위에 뿔테 안경을 쓴 박광성이 손짓 발짓을 하면서 소용돌이의 기괴함을 재연했다. 나는『소용돌이』보다 『소용돌이』를 간추려 전달하는 박광성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의 이야기는 이미지보다 더 강렬했다. 이야기를 듣고 난 뒤 한동안 달팽이 인간이 나오는 악몽에 시달렸다. 이것이야말로 비평이 수행할 수 있는 가장 진귀하고 근사한 기능이 아닐까? 박광성은 내가 만난 최초의 비평가였고, 비평가의 꿈을 실현한 마술사 같은 존재였다. --- p.24~25 파베세는 『레우코와의 대화』 첫 장에 “나는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모든 사람에게 용서를 구한다. 됐지? 너무 떠들지 말기를”이라고 썼습니다. 이 글은 파베세의 욕망, 행복을 향한 추구, 비참함, 구원에 대한 열망, 외로움, 자기 파괴, 사랑의 실패, 죽음, 결정적으로는 파베세의 유서에 담긴 저 “너무 떠들지 말기를”을 다룰 예정입니다. 파베세에게는 미안하지만, 또 끔찍하기도 하지만, 우리는 죽음을 가지고 수많은 가십과 루머를 양산합니다. 먼저 사과드립니다. 지금부터는 죽음을 배회하는 시끄러운 말들을 다룰 겁니다. --- p.159 영화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영화와 따뜻하고 안락한 관계를 맺으면 그만인 걸까?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영화에 매혹된 관객은 금세 영화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머릿속에서 영화 장면을 되감을 때마다, 어떻게든 영화에 대한 지식을 회수하려고 할 때마다, 관객이 품은 영화에 대한 사랑은 부식된다. 영화는 물건이 아니므로 소유할 수 없다. 시간이 흐르면 영화를 보았던 기억은 파괴된다. 그럼에도 관객은 영화를 소유하고자 하는 충동을 포기할 수 없다. --- p.239 뽕쟁이 운전기사는 휴게소 주차장에 트럭을 세워두고는 팔에 히로뽕 주사를 놓고 차창 밖으로 환각을 보고 있다. 마침 그가 듣는 노래는 임창정의 〈소주 한잔〉이다. 온몸이 이레즈미로 가득한, 백승우의 사진에 나올 법한 조폭은 느끼한 색소폰 연주를 반주로 깔고서 사랑하는 여자와 부루스를 추고 있다. 이 모든, 한국적인 것, 감정과 정념, 정서는 ‘흥남 철수’때의 미군 군함에서 파고다극장의 기형도와 PC방, 팝콘TV로 번져 나간다. 《뽕》은 ‘민중’이라는 선량한 얼굴의 가면을 썼던 보통 사람의 욕망과 범죄자의 때늦은 후회, 사회 부적응의 대가로 산에 틀어박혀 은둔하고 있는 자연인의 멜랑콜리를 ‘뽕’의 정서로 묶어낸다. 그러한 감정의 풍경은 우리에게 무얼 요구하고 있을까? --- p.309 영화는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는 환상과 현실 바깥에 존재하는 유토피아를 지시한다. 오랜 시간, 영화는 물질을 불태움으로써 의미의 불길을 만들었다. 새로운 미디어가 도래하면 즉각 사라질 것처럼 보이는, 때문에 너무나도 연약해 보이곤 했던, 영화가 가치 체계로서 지속될 수 있게끔 만든 힘은 영화가 물질을 불태우는 방법에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영화의 영광이 끝난 뒤에도 그것은 여전할 것이라고. --- p.4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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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책에서 발견한 것은 비주류 안에서도 주류와 비주류를 다시 나누는 강덕구씨의 조밀하고 집요한 시선이다.” -백민석(소설가)
백민석 소설가의 추천사가 말하고 있듯, 『익사한 남자의 자화상』이 파고드는 예술 중 다수는 오늘날 ‘비주류’로 논해지기 쉬운 것들이다. 그러나 무한한 데이터와 디깅(Digging)의 시대에, 비주류 문화는 분명 전과 다른 위상을 갖고 있다. 인터넷망의 보급과 스마트폰의 대중화 등 기술의 발전은 분명 세계를 뒤흔들어놨고, 이는 문화예술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문화예술의 향유자들은 전과 같은 방식, 즉 실제로 만질 수 있는 무언가를 ‘찾고’ ‘소유하는’ 방식 외에도 예술을 ‘수집하는’ 또 다른 방법을 깨닫게 되었다. 책 본문에서 말하듯 이러한 변화는 “사라진, 실종된, 은둔한” 예술작품들을 “다시 돌아오”게 만들었으며, 비주류라 불렸던 문화는 그 안에서도 착실하게 역사와 계보 그리고 각각의 정전을 쌓아갈 수 있었다. 그렇기에 강덕구가 다루는 계보 속 이름들과 정전은 많은 이에게 낯선 것들이다. 물론 본문 곳곳에서도 이미 잘 알려진 이름들을 발견할 수 있다. 국내외로 잘 알려진 영화감독인 이창동, 홍상수나 한때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던 미국의 스탠딩 코미디언 루이스 C.K. 그리고 지금 당장도 활발하게 돌아가고 있을 플랫폼인 ‘아프리카TV’ 등을 사례로 뽑을 수 있겠다. 앞선 예시들만큼 잘 알려져 있진 않더라도 (흔히 말하는)‘시네필’들이나 문화예술에 관심이 깊은 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영화평론가 정성일 또는 마크 피셔, 영화감독 라스 폰 트리에나 왕빙 역시 본문에서 주요한 한 장을 차지한다. 반면 러시아의 전 부총리이자 막후 설계자로 불리던 블라디슬라프 수르코프의 예명인 ‘나탄 두보츠키’나 음악인류학자 해리 스미스 같은 이름들은 대부분 사람에게 생소할 테다. 만일 이 둘의 이름을 아는 독자가 있더라도, 그가 한국의 인터넷 방송인인 커맨더지코와 BJ텐쿵의 이름까지 함께 알고 있을 확률은 낮다. 단순하게 국가와 분야로만 나누더라도, 이 낯선 이름들은 서로 아예 다른 구역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익사한 남자의 자화상』은 이토록 낯선 이름들을 한데 묶어 새로운 맥락을 창조해낸다. 전혀 다른 몸에서 서로 다른 색깔로 흐르던 피를 하나의 혈관에 수혈하는 것이다. 하나의 혈관에 뒤섞인 서로 다른 피는 필연적으로 어떤 병증을 일으킨다. 강덕구는 바로 이 병증에서 벌어지는 변화를 유심히 지켜보고, 이 병증이 어떤 식으로 우리 세계 곳곳에 스며 있는지 논하자고 권한다. 그에게 이 병은 고통을 일으키는 요인일 뿐 아니라, 우리가 지난 세기를 벗어나 다음 시대로 나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진화의 동인이다. 여러 색깔의 피가 흐르는 새로운 몸은 과연 어떻게 움직일 것이며, 어느 세상과 맞닥뜨리게 될까? 강덕구는 이를 알아보기 위해 거침없이 이름들을 배치하며 서로 맞닿게 한다. 그는 인터넷 방송인 커맨더지코의 리얼리티 영상, 그리고 그것을 지탱하는 구조를 아르헨티나의 영화감독 리산드로 알론소의 「자유」와 함께 대조한다. 2023년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음반 《뽕》으로 4관왕에 수상했으며, 프로듀서로 참여한 뉴진스의 앨범 《New Jeans》로 잇따라 2관왕을 수상한 아티스트 250의 앨범을 각 방향에서 살피며 데이비드 린치가 그리는 ‘소도시 풍경’과 맞대기도 한다. 강덕구의 비평에서 이러한 관계 맺기는 무척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그에게 비평이란 낯선 이름들을 소개하고 그에 관해 논설하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이름들과 그 관계를 통해 세계를 바라보며 직조하는 방식을 제안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우리’가 마주하는 세상의 ‘내면’은 어떤 모습인가? 영화와 음악, 예술이라는 거짓말로 마주해내는 ‘추문’과 그 너머 그러므로 강덕구에게는 그가 거론하는 예술작품과 예술가만큼이나, 자신(혹은 세상)과 그것이 연결되는 방식이 중요하다. 그가 책의 1부인 ‘오늘’에서 시네필이나 힙스터, 디거 등으로 불리는 문화예술 향유자를 중심으로 다루는 이유 역시 그러한 방식에 있다. 종종 그가 “덥수룩한 머리, 패딩, 거뭇거뭇한 수염” 등으로 묘사하는 시네필이나 “타투”를 하고 “인스타그래머블”한 공간에 들른다고 말하는 힙스터들은 지금의 문화예술과 밀접한 관련을 맺은 이들이다. 백인 사회에서 흑인 문화를 착취하는 유독성의 존재로 정의되었던 ‘힙스터’들은 한국에 유입되며 ‘멋쟁이’ 유의 의미로 변환되었지만, 그 어원이 문화적 아카이브에서 어떠한 ‘취향’을 발굴해내는 이들이었다는 사실엔 변화가 없다. 백인 힙스터들은 자신들의 네트워크에 새로운 생동감을 불어넣기 위해 흑인 문화와 제3세계의 문화적 타자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규정하고 착취했다. 반면 시네필들은 “선생님”들이 세운 만신전에 자신들만의 신화적 우주를 구성하여 특정한 취향을 산출했는데, 이전 세대 시네필리아의 권위에 기댄 취향은 새로운 균열을 내는 대신 기존의 제도를 공고하게 하는 데만 기여하고 있다. 강덕구는 자신이 이 범주에서 벗어난 존재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서울아트시네마 라운지에 모여든” 시네필의 조건에 자신 또한 부합하고 있음을 인정하며, 또한 스스로가 힙스터들이 발굴해낸 수많은 음악의 청취자였음을 밝히고 있다. 그렇기에 그는 이 오래된 취향의 역사, 스노비즘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 제도적 상상력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이 시간대에 균열을 내자고 제안한다. 바로 이 균열에서 강덕구라는 비평가의 태도가 드러난다. 여기서 다시 ‘이름들’로 돌아가보자. 주류와 비주류, 그리고 비주류 안에서 또다시 주류와 비주류를 파고드는 그의 세계에서도 유난히 낯선 이름들이 있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 나란히 등장하는 두 이름, ‘박광성’과 ‘이정상’이 그것이다. 실상 독자들이 이 이름들을 아는 건 불가능하다. 이들은 강덕구의 개인적 삶에서만 등장하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이름이 실명인지 가명인지조차 독자는 가늠할 수 없다. 알 수 있는 것이라곤 박광성과 이정상이 각각의 방식으로 강덕구의 비평적 태도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 뿐이다. 프롤로그에 등장하는 박광성은 강덕구의 삶에 최초로 나타난 비평가다. 그는 2007년 등장하여 강덕구 생애 최고의 이야기꾼으로 자리 잡았다. 박광성은 토피아학원 옆 빌딩 2층 돌계단에 앉아 강덕구에게 이토 준지의 만화 『소용돌이』 줄거리를 간추려 설명했다. 강덕구는 이토 준지가 그려낸 그림보다 더 강력하던 그의 이야기가 자신에게 달팽이 인간들이 나오는 악몽을 선사했다고 회고한다. 강덕구는 이 악몽이야말로 “비평이 수행할 수 있는 가장 진귀하고 근사한 기능”이라고 일컫는다. 이어 그가 이 책에서 펼쳐내는 거짓말이 우리 독자에게 또 다른 악몽을 꾸도록 만들길 기원한다. 박광성이 강덕구의 삶에서 최초로 마술적인 비평을 보여줬던 존재라면, 에필로그의 주인공 이정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희망과 모험을 만들어내는 영웅이다. 그는 자신의 온몸으로, 또한 삶으로 오롯하게 새로운 경로를 펼쳐간다. 그는 울란바토르의 공원에서 니체의 책을 읽다가 불현듯 나타난 흰 조랑말을 바라보는 남자다. 그는 부모가 건네준 대학 입학비로 유럽 여행을 떠난다. 그곳에서 몽골의 ‘캐쉬미어’를 판매하려 하지만 한 푼도 벌지 못한다. 그는 20대 내내 행동주의자로서 각종 실패를 겪는다. 혹은 실패를 만들어낸다. 그는 한국에 주둔한 미군과 싸웠으며, 이명박 정부에 반기를 들어 ‘시적 정의’라고 적힌 표어를 들어올렸다. 학교 도서관에서 훔친 책을 학생회관에 거주하며 읽었다. 이제 새로운 가족을 꾸린 그를 강덕구는 “결코 감기지 않는 눈”으로 부른다. 기존의 비평서에 익숙한 이들이라면 이러한 강덕구의 글쓰기가 영 당혹스럽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그가 마술적인 비평가라 부르는 이들, 혹은 자신의 영웅이자 희망이라 부르는 이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거장들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매혹된 예술적 우주만큼이나 직접 몸담은 현실의 구체적 형상들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한다. 이러한 그의 태도를 이해한다면, 그가 왜 자신의 정치적 신념에 따라 특정한 예술작품을 ‘보이콧’하는 평론가를 비판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가 왜 비평가라면 무릇 ‘보이콧’ 대신 윤리적·정치적 기제를 ‘폭로’해야 한다고 말하는지, 거기에 따라오는 행위를 증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지, 마지막으로 왜 그것을 “영화평론가-시민의 직업윤리”라고 부르는지도 알 수 있을 테다. “여전히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그것을 지독하다 싶을 정도로 꼼꼼히 복기하는 이가 여기 있다. 그는 삶을 사랑하는 것을 포기한 것일까?” -조영일(문학평론가) 강덕구의 비평을 읽는 일은 그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며 무엇으로 삶을 지나가야 하는지 고민하는 과정을 함께 보는 것이다. 『익사한 남자의 자화상』에서 그가 ‘익사한 남자’들, 즉 지나간 ‘백인의 세기’ 나 ‘폭력의 시대’를 회고하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맥락에 있다. 그는 자신과 사랑에 빠진 “사악하고 나쁘며 비천한 모든 것”을 부정한 채 넘어가지 않는다. 그는 분명 그것들이 다시 돌아오지 않음을 안다. 더불어 그들이 지녔던(지닌) 약점과 문제점을 인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을 왜 돌아보아야 하는지, 강덕구는 자신의 삶과 거기서 마주친 작품 그리고 작가들을 통해 이야기한다. 실상 그 이유는 단순하다. 오늘은 어제와 내일 사이에(혹은 그 교차점에) 있기 때문이다. 어제를 알지 않는다면 오늘에 머물 수 없다. 오늘에 자리 잡지 못한다면 내일로 넘어갈 수도 없다. 익사한 이의 자화상이란 표현은 그 자체로서는 모순적이되, 우리가 다음으로 넘어가기 위해 바라보아야 할 풍경을 묘사한다는 목적에서는 더없이 적절하다. 그러므로 어제를 보는 그의 시선엔 애정과 회고만큼이나 강력한 공격의 태도가 함께 배어 있다. 그는 오늘날의 계보와 정전을 만든 권위와 기능을 ‘공격!’한다. 그는 선배 평론가를 공격한다. 현대의 거장을 공격한다. 자리를 굳힌 윤리의 태도를 공격한다. 동시에 이들을 그저 조롱하거나 지우려 하는 현재의 세태들 비판한다. 강덕구는 이전의 지침을 소거하는 것만으로는 무엇도 해결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어느 세대건 ‘권위’와 ‘제도’ ‘기능’이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음을 알고 있다. 그가 권위나 제도라는 개념을 지우는 대신 선택하는 건 그것들을 “불태우고” 그리하여 “타오르는 물질”에서 벌어지는 새로운 현상들을 목도하는 일이다. 이는 결국 서로 다른 피를 담은 몸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일과 같은 노선에 있다. 강덕구가 거론하는 익사한 이들, 또한 그들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여러 면모에서 도발적이다. 때로는 의도적인 모순을 띠고 있기도 하다. 그는 홍상수의 작품이 지닌 걸출함을 말하면서도 그가 세태에 보이는 예술가적 태도를 비판하고, 정성일의 기능이 오늘날 시네필 사회에 끼친 영향력을 신랄하게 비판하다가도 그가 보여준 대화의 의지에 감사를 보낸다. 그는 공격하고 또 싸우려 하지만, 그것은 누군가를 해치기 위해서가 아니다. 강덕구의 글은 싸움을 통하여 더 넓고 다채로운 세계를 열어젖힌다. 그곳에는 한국인만이 가진 더럽고도 아름다운 전통, 타자를 착취하는 자들이 발견했던 빛나는 음악들,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자들의 지워지지 않는 유산들이 남아 있다. 이 세계야말로 강덕구가 우리에게 권하고자 하는, 또 그가 합류하고자 하는 ‘악몽과 거짓말’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