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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달라도 함께 살 수 있을까?
우리 모두의 해방을 위하여: 비인간 동물과 함께 사는 인간, 〈새벽이생추어리〉의 무모 새벽이와 잔디는 바랭이를 좋아해 기저에 있는 연대의 마음 여기서 새벽이 응가를 푸고 있을 줄이야 도처에 잠재되어 있는 위험 비인간 동물을 온몸으로 만나는 시간 인간과 세계의 단절 서로의 해방을 위한 사이 배제된 자들을 위한 기도: 무지개 기독교인과 함께 사는 기독교인, 〈무지개신학교〉의 오늘 채플에서 무지개 티셔츠를 입다 단절과 박탈 다양한 사람들을 연결하는 언어 당사자로부터 시작되지만 당사자에서 끝나지 않는 다름이 일소되는 공간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장 어제와 함께 사는 오늘 밉든 싫든 지지고 볶으면서: 남성과 함께 사는 여성, 〈들불〉의 구구 들에 번진 불 언니, 이런 게 페미니즘이에요? 콘텐츠를 향유하고 생산하는 여성들 안전한 공간과 시간 타협할 줄 모르는 여자들 언제나 순환이 중요하다 어쨌든 다 이어지니까: 장년과 함께 사는 청년, 〈우주소년〉의 현민 이렇게 살고 싶다 오류를 범하는 우리 선생님들 어른들도 칭찬이 필요해 마을에서 환대받고, 서점에서 환대하기 혼자 살 수는 없잖아요 달라도 어쩔 수 없다 연결될 수 있다는 가능성: 플라스틱과 함께 사는 환경 캠페이너, 〈그린오큐파이〉의 윤지 움직이는 다마스, 움직이는 소분 상점 우연을 빙자한 우연하지 않은 계기 쉽고 재밌고 예쁘고 이상한 지지 통수세미의 위력 감사함과 겸손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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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이야기는 이질적인 존재들과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다. 그래서 생존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는 이들이 가진 지혜가 나의 친구에게, 나의 친구의 친구에게, 누군가의 친구일 누군가에게 보탬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남다름을 부각하기보단, 자신이 처한 현실에서 다른 존재들과 함께 사는 방법을 모색하는 사람들이었다. 스스로를 멋지게 광고하고 브랜딩하는 데 에너지를 쏟기보다, 자신이 이질적인 존재들과 어떤 방식으로 만나고 있는지를 한 번 더 돌아보는 사람들이었다. 즉 울퉁불퉁한 사회의 표면 위에 튀어 오르기보단 그 안으로 침투하는 사람들이었으므로 가까이 가서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발견하기 어려운 사람들이었다. 누군가 이들에게 다가가기까지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생존-지혜는 당장 필요한 것이었으므로, 지금 내가 이들의 이야기를 담아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서문: 달라도 함께 살 수 있을까?, 17쪽」중에서 잔디를 마사지해 주며 가장 먼저 느꼈던 건 내가 살아 있는 돼지의 피부, 근육, 관절, 뼈를 만지고 있다는 놀라움이었다. 그동안 내가 봤던 돼지의 신체는 부위 별 이름이 적힌 돼지고기 그림이었는데, 그 그림 어디에도 돼지가 이렇게 단단한 갑옷이나 말랑이는 근육과 관절을 가지고 있다는 정보는 없었다. 자세히 보면 피부 표면이 잔뜩 갈라져 있다거나 갈색 털 사이에 검은색 털이 한두 개씩 자란다는 사실도 말이다. 그러다 문득 부끄러운 마음이 올라왔다. ‘돼지고기 그림으로 돼지를 알고 있었던 나 같은 인간 앞에서 잔디가 이토록 마음 놓고 자고 있다니.’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겠는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교차했다. ---「비인간 동물과 함께 사는 인간, 〈새벽이생추어리〉의 무모, 25쪽」중에서 고은 : 새벽이와 잔디를 몸으로 만나는 시간이었을 것 같아요. 새벽이나 잔디에 대한 생각이나 경험, 감정들이 다른 비인간 동물에게로 확장되기도 하셨나요? 무모 : 아무래도 그렇죠. 저는 새벽이를 만나기 전까지 동물과 단절된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었거든요. 반려동물도 없었고 동물권도 머리로만 생각하고 있었어요. 〈새벽이생추어리〉에서 새벽이, 잔디와 관계를 맺고, 동물을 만난다는 것이 뭔지 조금씩 체화하니까 제가 다른 동물들하고도 잘 지내보려고 하더라고요. 사실 개나 고양이도 그렇게 좋아하진 않았는데 이제 좋아하게 됐어요. ---「비인간 동물과 함께 사는 인간, 〈새벽이생추어리〉의 무모, 50쪽」중에서 오늘 님의 얘기를 계속 듣다 보니 걱정이 좀 됐다. ‘오늘 님을 괜히 귀찮게 한 게 아닐까?’ 잠깐 고민하다가 그냥 인정하기로 했다. 세상에는 자신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 있게 자기 가치를 인정하는 사람도 멋지지만, 겸손하게 자신을 굽히는 사람은 더 멋지다. 어떤 사건을 맞닥뜨렸을 때 자신의 안위와 이윤을 재빨리 고려하는 사람도 대단하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각에 의문을 던짐으로써 그 사건을 성찰의 기회로 삼는 사람은 더 멋지다. 나는 인터뷰를 통해 그런 오늘 님을 굳이 끄집어내어 세상에 드러내고자 했으니 오늘 님을 귀찮게 한 게 맞다. 오늘 님이 가진 성찰의 힘은 인터뷰하는 동안에도 계속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인터뷰하기 전에도, 인터뷰하는 도중에도, 인터뷰가 끝나고 나서도 이런 생각을 했다. ‘이 사람이 목사라면 나도 교회에 다니고 싶다.’ ---「무지개 기독교인과 함께 사는 기독교인, 〈무지개신학교〉의 오늘, 110쪽」중에서 고은 : 신학 공부가 왜 그렇게 좋으세요? 〈무지개신학교〉도 오늘 님이 만들자고 제안하셨잖아요. 오늘 : 처음에 신학 공부는 해야 되니까 하는 거였어요. 근데 교단 내에서 목회자 후보생으로서 지위가 불안정해지는 경험을 하고 나니까 당위적인 이유로 목사를 할 필요가 없어지고, 목사에 대한 제 태도가 달라지면서 신학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어요. 저는 신학이 해석의 전통 위에 있는 학문이라서 좋아요. 기독교 전통과 역사가 오래된 만큼 다양한 해석들이 존재해 왔거든요. 그래서 성경이라는 텍스트를 가지고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 낼 것인지가 관건이에요. 성경 자체가 여러 이야기꾼의 이야기가 모인 작품이고, 신학자도 그런 전통 위에 서 있거든요. 그리고 그런 해석들로 사람들을 연결시킬 수 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도 재밌어요. 저는 신학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그 모습 그대로도 괜찮을 수 있는 장소를 만들 수 있는 언어 같거든요. 그러니까 저를 설명할 수 있는, 그리고 나의 주변 사람들을 설명할 수 있는, 그리고 연결시킬 수 있는 언어인 거죠. 저는 좋은 이야기꾼이 되고 싶어요. ---「무지개 기독교인과 함께 사는 기독교인, 〈무지개신학교〉의 오늘, 88~89쪽」중에서 구구 님이 고양이를 대신 키워 준 건 아니었다. 그는 이 상황에서 한발 물러나 있었지만,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자리에서 옆자리를 지켜 줬다. 나는 그 격려와 응원 덕분에 고양이와 함께 살겠다는 결심을 할 수 있었고, 뚝딱이면서도 그 방법을 찾기 위한 시행착오를 감행할 수 있었다. 이런 일은 종종 또 일어났다. 이 인터뷰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그랬다. 구구 님은 인터뷰 프로젝트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았지만, 이 프로젝트와 잘 어울리는 공모사업을 추천해 주고 응원해 주고 지지해 줬다. 어렴풋이 생각한다. 이런 게 여성들이 모여서 주고받을 수 있는 힘은 아닐까? 서로의 일에 지나치게 관여하는 대신 믿어 주기, 필요할 때 도와주되 망설이지 말기, 옆에 서서 응원의 마음을 보내기. 이건 비단 구구 님과 일대일로 주고받는 무언가만은 아니다. 구구 님이 가운데서 중심을 잡고 있는 〈들불〉이 바로 그런 장이다. 서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주의 깊게 들음으로써 믿어 주는,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 상황이라면 각자가 가진 정보와 해결 방법을 공유하는, 따뜻한 응원의 말로 서로를 북돋우는 그런 장 말이다. ---「남성과 함께 사는 여성, 〈들불〉의 구구, 154쪽」중에서 고은 : 〈들불〉에서 만나는 여자들과 일상에서 혹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만나는 여자들은 차이가 있나요? 구구 : 제가 사회생활 하면서 만난 여자들은 타협을 많이 했어요. 타협이 쉽기 때문이라기보단 그렇게 해야 자기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해서요. 저도 사회생활을 막 시작했을 무렵에 자리를 어떻게든 지켜서 위로 올라가야 뭔가를 할 수 있다고, 그게 맞다고 생각했고요. 근데 〈들불〉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타협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에요. 타협해 낸 사람들은 잘살고 있거든요. 집도 차도 있고 사회적으로 보기에는 성공한 삶을 누리죠. 물론 〈들불〉에 오는 분 중에 사회적으로 성공한 분도 계시겠죠, 제가 다 알 수는 없지만요. 근데 타협할 줄 모르는 성향 때문에 많이 괴로워하고 삶을 영위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많았어요. ---「남성과 함께 사는 여성, 〈들불〉의 구구, 144쪽」중에서 공동체 안에서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서로를 잘 알고 있는 사이에서 잘못해서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혔다간 그 상처가 고스란히 나에게로 돌아 올 수 있다. 게다가 모든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니, 어디를 건드려야 할지 막막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현민은 문제의식을 느낀 뒤 마을을 조용히 떠나는 대신, 단행본을 기획해 한 차례 파도를 일으키기로 마음먹었다. 현민은 마을에서 지내는 걸 힘들어하면서도 왜 마을을 떠나지 않고 계속 남아 있었을까? 마을 사람들을 만나며 울상을 짓기도 웃기도 하던 그 마음은 어땠을까? 그 와중에 마을에 대한 단행본은 왜 내기로 결심했을까? ---「장년과 함께 사는 청년, 〈우주소년〉의 현민, 166쪽」중에서 고은 : 어쩌다가 환대를 중요한 키워드로 삼게 되었는지 궁금해요. 현민 : 제가 이 마을이 항상 편하기만 한 건 아니었지만, 마을에서 환대를 많이 받았다고 생각해요. 특정 사람이 환대해 준 것이기도 하고, 그 사람들이 만든 공간이 환대해 준 것이기도 한데요. 예를 들면 〈느티나무도서관〉이라는 마을 도서관을 처음 갔을 때 엄청 충격받았어요. ‘도서관 안에서 말해도 되고, 소리 내도 된다니.’ 내가 이 마을에서 뭘 해도 되는지 알아 갈 때마다 환대받는다고 느꼈던 것 같아요. 그런 경험을 했을 때 되게 좋았거든요. 그래서 저도 〈우주소년〉에 오는 사람들을 환대하고 싶어졌어요. 방문한 사람들이 저에게 말을 걸어도 된다는 걸 느끼게 해주고 싶어요. ---「장년과 함께 사는 청년, 〈우주소년〉의 현민, 183쪽」중에서 반면 에어컨을 틀지 않고 온몸으로 더위를 맞이하는 건 처음엔 좀 괴롭다. 열기를 내쫓는 대신, 비트 물이나 사과 같은 것들로 열기와 타협을 봐야 한다. …… 그러면 잠시 뒤에 땀에 젖고 더위를 느끼면서도 불쾌하지 않은 순간이 찾아온다. …… 마음에 여유가 생기면서 어떤 이들이 이 더위 때문에 나보다 더 한 고통 속에 머물고 있을지도 생각해 보게 됐다. 바로 인근에만 하더라도 열기가 갇힌 아스팔트 위에 장시간 서 있어야 할 사람이, 환풍이 제대로 되지 않는 공간에서 버텨야 할 사람이 있을 터였다. 누군가를 탓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내가 손쉽게 틀었던 에어컨이, 편하려고 쓰고 버리기를 반복했던 쓰레기가 급격하게 무너지는 생태계를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척할 수 없었다. 그 사실을 자주 잊어버릴 수는 있어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쩌면 녹색으로 점거한다는 건 그런 게 아닐까? 손쉽게 에어컨을 틀거나 플라스틱을 쓰는 대신, 불편함을 감수하며 다른 방법을 찾는 것. 빠르게 몸을 차갑게 만들며 어떤 문제들을 외면하는 대신, 열기를 몸으로 받아들이며 조금이나마 소화해 보려고 노력하는 것. 그래서 내 삶과 이 세계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즐거이 받아들이게 되는 것. 내 삶을 녹색으로 점거하는 것이 곧 세계를 녹색으로 점거 하는 일이기도 하다는 걸 아는 것. ---「플라스틱과 함께 사는 환경 캠페이너, 〈그린오큐파이〉의 윤지, 235쪽」중에서 고은 : 움직이는 소분 상점에서 사람들이 연결되는 경험을 해볼 수 있기를 바라나요? 윤지 : 〈그린오큐파이〉가 사람들에게 연결점이 되길 바라죠. 움직이는 소분 상점은 그래서 탄생했어요. ‘우연을 빙자한 우연하지 않은 계기를 만드는 게 굉장히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 거예요. 길거리에 가는 이유가 그 때문이죠. 길거리에는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동네에 제로웨이스트숍이 생겨서 거기를 찾아가는 사람들이 저희 타깃은 아니었어요. 그런 사람들은 집에서 한 시간이 걸려도 한 번씩 마음먹고 갈 사람들이니까요. 다만 좀 아쉬운 건 작년에 처음 시작하다 보니까 허허벌판이나 아예 생뚱맞은 곳을 가지는 못했어요. 맨땅에 헤딩하기는 겁도 나고, 아웃풋도 만들 수가 없을 것 같고, 홍보 효과도 만들어 내기가 어려워서요. 결국에는 마포, 은평, 서대문을 떠나지 못했거든요. 그래도 ‘우리가 사는 곳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긴 했죠. 그 지역들이 저희 주거지였어요 ---「플라스틱과 함께 사는 환경 캠페이너, 〈그린오큐파이〉의 윤지, 214쪽」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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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 수 있을까』 지은이 김고은 선생님 인터뷰
1. 『함께 살 수 있을까』의 부제는 ‘타인과 함께 사는 법을 고민하는 청년 인터뷰집’입니다. 이 책에는 함께 살아간다고 하면 ‘조화’보다는 ‘갈등’이 더 떠오르거나, 심지어 함께 살고 있다는 생각조차 하기 힘든 상대와 함께 살아가는 청년 분들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담겨 있습니다. 이 다섯 분과의 인터뷰를 세상에 내보내고 싶으셨던 이유가 있으실 텐데요, 그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이 인터뷰는 제 친구들로부터 시작됐습니다. 어느 날 한 친구가 공황이 생겼다고, 출퇴근 길의 지하철도 타기가 어렵다고 하더라고요. 또 다른 친구는 지나가는 말로 수면제를 잔뜩 먹었는데 깨어나 버렸다고 했습니다. 친구들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큰 충격을 받았죠. 그때 친구들의 아픔에 대해서 생각해 보다가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비슷한 경험을 한 또래의 이야기가 지천에 널려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저도 그런 사람 중 하나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저 역시 삶에 대해 생각 할 때 조화보다 갈등을 먼저 떠올리고, 어떤 존재들과는 함께 살고 있다는 생각조차 하기 힘든 사람이니까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 그런 것 같습니다. 고립되거나 단절되기는 쉽지만,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벼리기는 어려운 사회입니다. 친구들이 아프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내 친구들과 같은 또래들이 수두룩하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나 역시 그들 중 하나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먼저 느낀 건 무력감이었습니다. 제가 뭘 할 수 있을까요? 그래도 한가로이 앉아나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뭐든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 싶었어요.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제가 꽤나 멋진 친구들을 알고 있더군요. 인문학 공동체 〈문탁네트워크〉에서 생활하고 공부하며 배운 바에 따르면 연결은 ‘어떻게’의 문제입니다. ‘고립되어 있다’는 선언이나 ‘연결되어야 한다’는 당위로는 부족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일상에서 조우하는 수많은 위험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언제 내게 위협적으로 변할지 모르는 타자와 어떻게 함께 살 것인가?’와 같은 아주 구체적인 지혜이지요. 이 책에 실린 다섯 명의 인터뷰이들은 바로 그와 관련한 지혜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대단히 멋진 말을 뽐내기보단 일상의 언어로 삶을 다지고, 빼어난 솜씨로 이목을 끌기보단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낯선 이들을 꿋꿋이 마주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러면서 실패하고, 미끄러지고, 괴로워하고, 포기하고 싶어 하면서도 타자와의 만남을 끝끝내 외면하지 않지요. 인터뷰이의 이야기들은 결코 완벽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기승전결이 완벽한 성장 스토리나 환상적인 성공담도 아니지요. 실제로 그들은 인터뷰에서 관계를 외면하지 않았던 지난한 시간 속에서 어떻게 괴롭거나 행복했는지, 그로부터 어떤 마음을 갖게 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답니다. 저는 이 사람들이 지난하게 보낸 시간 덕에 얻은 지혜가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적어도 저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꼭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2. 우리는 ‘이질적’이라 하면 불편함부터 느끼지요. 그래서인지 우리 시대는 불편한 사람을 언제든 ‘차단’할 수 있듯이, 불편한 관계들을 피해 혼자 살기에 더 편한 방향으로 변화해 해 온 것 같아요. 이렇게 ‘이질적인 존재’들과 떨어져 살기에 편한 세상에서는 ‘함께 살기’의 필요성을 느끼는 게 어려워지는 것 같은데요,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는 왜 함께 살아야 할까요? 저도 그게 너무 궁금해서 시간상으로 첫 인터뷰이였던 〈우주소년〉의 현민에게 물어봤답니다. 오늘날과 같은 사회에서 이질적인 존재들과 함께 살기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냐고요. 그랬더니 현민은 너무나 의아한 얼굴로 단박에 이렇게 대답하더라고요. “있다, 없다가 아니라… 해야 하지 않아요? 어쩔 수 없지 않아요?” 현민의 대답을 듣고 너무 놀라서 입이 저절로 벌어졌습니다. 저는 함께 사는 것이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현민은 그게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제가 무언가를 놓치고 있었던 거죠. 우리가 이미 함께 살고 있다는 것, 연결되어 존재하고 있다는 감각 같은 것을요. 이미 연결되어 있다는 걸 느끼며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왜?’ 같은 질문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함께 살지 않는 삶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싫든 좋든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 몸의 구성만 봐도 그렇잖아요. 얼마나 많은 균들 덕분에 우리 몸이 살아 움직이던가요. 그런데 습관적으로 균을 나쁜 것이라고 혹은 만나면 어찌 될지 모르니 두려운 것이라고 상정해서 그들과의 관계를 없애려고만 하죠.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러니까 오늘날은 함께 살기 어려운 사회가 아니라,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 어려운 사회라고 해야 맞을 것 같습니다. 3. 〈새벽이생추어리〉에서 돼지인 잔디를 마사지 해 주시면서 고기를 먹지 못하는 몸으로 바뀌었다고 하셨지요. 〈새벽이생추어리〉에서 새벽이·잔디와 연결감을 강하게 느끼셨고, 행동의 변화까지 이어진 고은 선생님의 이야기가 인상 깊었는데요. 동시에 우리 일상에서는 비인간 동물과 연결감을 느낄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이러한 상황에 있는 우리들은 어떻게 비인간 동물과 연결감을 느낄 수 있을까요? 작년 가을에 아기 고양이를 구조해서 함께 살게 됐어요. 제가 이 동네에 20년 가까이 살았는데요. 고양이랑 같이 살고 나서야 동네에 길고양이가 엄청 많다는 걸 알게 됐어요. 놀랍게도 그전까지는 동네에서 고양이를 본 기억이 거의 없었답니다. 비인간동물은 어디에나 있지요. 지구에 인간만 사는 건 아니니까요. 그런데 그들과 연결되기는 정말 쉽지 않아요. 지구에 인간만 있는 것처럼 사는 데 익숙하니까요. 그래서 반드시 어떤 사건들이 필요합니다. 제가 우연히 SNS 피드에서 새벽이 사진을 본 것 같은, 혹은 길고양이를 어쩔 수 없이 구조하게 된 것 같은 사건들이요. 그런 사건들은 어떤 기척도 없이, 갑자기 문을 벌컥 열고 들이닥쳤습니다. 제가 손 쓸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래도 다행히 할 수 있는 일이 있기는 한 것 같습니다. 내가 어떤 상황을 사건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면적을 넓혀보는 건 가능합니다. 저 같은 경우는 공부가 그 역할을 했습니다. 공장식 축산업을 공부했기 때문에 SNS에서 새벽이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고, 길고양이에 대해 공부했기 때문에 눈앞에 등장했을 때 구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비인간동물과 연결되고 싶은 분이 계시다면 평소에 준비를 소홀히 하지 마셔요. 그리고 언젠가 어떤 비인간동물이 내 마음을 비집고 들어온다면, 그 기회를 놓치지 마시고 꼭 사건으로 만드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4. 이질적인 존재와 함께 사는 인터뷰이들의 ‘함께 살기’의 태도와 방법이 멋지고 흥미롭다고 느껴졌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인터뷰이들의 함께 사는 태도나 방법 중 특히 기억에 남으시는 것이 있으신지요? 혹은 독자분들에게 소개해주시고 싶은 ‘함께 살기 팁’이 있으시다면? 여성 독서 커뮤니티 〈들불〉을 운영하시는 구구 님의 팁을 소개해 드리고 싶네요. 구구 님은 때때로 남성들과 일을 하거나 대화하다가 무례한 말을 듣게 되면 가볍게 되받아친다고 하시더라고요. 예를 들면 “헐, 대박 무례해” 이렇게요. 가볍게 던진 말이니까 상대가 반박은 못 하는데 신경은 쓰게 되고, 구구 님 스스로는 훨씬 가볍게 흘려보낼 수 있게 된다고 하셨어요. 살면서 무례한 사람을 만날 일이 많잖아요. 그런 말들에 감정이 많이 상하기도 하고요. 그럴 땐 그 말을 붙잡기보단 흘려보내는 것도 좋은 방법인 것 같아요. 그런데 흘려보내는 건 혼자 하기 어렵거든요. 그러니까 그 상황을 만든 상대를 초대하는 거죠. ‘내가 당신에게 어떤 부정적인 감정을 느꼈는데, 그것을 간직하며 당신을 미워하고 싶지는 않으려 한다’면서요. 초대를 잘 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엇?’, ‘아차?’하며 다시 생각을 해볼 테고, 그게 아니더라도 그 사람의 무의식 어딘가에는 흔적을 남길 수 있을 거예요. 이런 방식으로 이런 사람을 대하면 어떤 반응이 돌아오는구나, 하고요. 그런 일이 반복되다보면 그 사람의 무의식도 꿈틀하게 되지 않을까요? 혹은 내게 그 말을 한 사람의 반응이 돌아와서 또 다른 관계의 장을 만나게 될 수도 있고요. 어쩌면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은 조금이라도 연결되는 일이 아닐까 싶기도 해요. 무례한 말을 한 사람과 아무런 영향을 주고받을 수 없다면, 그래서 정말 그 사람과 연결되지 못한다면, 그건 모두에게 좋지 않을 테니까요. 무례한 말을 들은 사람만 불행한 게 아니지 않을까요? 무례한 건지 몰랐던 사람은 계속 모르는 상태로 누군가에게 상처 입히게 될 테고, 남을 무시했던 사람은 영영 다른 이들과 단절된 세상 속에서 고립된 채 살 테니까요. 5. 고은 선생님은 인문학공동체인 〈문탁네트워크〉와 청년인문학스타트업 〈길드다〉 등에서 공부하며 20대를 보내셨는데요. 선생님이 이런 공동체의 경험에서 배우고 터득한 ‘나와 다른 존재’들과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을 공유해 주셔요. 제게는 20대를 함께 보낸 친구들이 있습니다. 5년 동안 〈문탁네트워크〉에서 함께 공부하고, 그 뒤로 5년 동안 〈길드다〉에서 함께 일한 이들이지요. 이 친구들과 10년 동안 함께 살기가 정말 쉽지 않았어요. 만약 청년이 귀한 이곳에서 만나지 않았다면, 그러니까 더 많은 친구를 물색할 수 있는 곳에서 마주쳤다면 결코 친구가 되지 않았을 만큼 달랐는데요. 저는 그 친구들과 함께 살면서 기다릴 줄 알게 되었어요. 기다리는 건 참는 거랑은 좀 달라요. 참는 건 내 마음을 억누르고 억지로 양보하는 느낌이라면, 기다릴 때는 무작정 참지는 않습니다. 기다리며 화를 내거나 실망하고, 또 울 수도 있습니다. 다만 그러면서도 장기적으로 보고, 언젠가 어떤 날이 올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뭐가 올지는 정확하게 모릅니다. 만약 기다리는 게 정확하게 있다면 그건 분명 내가 원하는 것일 테고, 그게 바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면 마음을 억누르는 느낌이 들어서 괴로울 겁니다. 기다리는 건 언젠가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걸 믿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방향일지는 모르지만 상대가 변할 것이라고, 마찬가지로 나도 변할 것이라고 믿는 거예요. 물론 드라마틱한 변화 같은 걸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변하는데 30년, 40년이 걸릴지도 모르고, 그 변화가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작고 사소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이미 그러고 있다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무작정 믿는 겁니다. 지금은 그 친구들과 함께하고 있지 않은데요. 그래도 여전히 친구들을 믿고 있습니다. 왜냐면 가끔씩 그 친구들과 함께했던 순간들이 떠오르거든요. 친구들이 잘못했다고 믿고 있었던 그때 나는 얼마나 친구들을 몰아붙였는가, 하는 생각을 하며 이제라도 조금 덜 깐깐하게 굴게 됩니다. 아마 친구들, 혹은 제가 만난 다른 누군가들도 그러지 않을까요? 무의식 중에라도요. 우리가 서로의 세포에 흔적을 남기는 존재라는 걸 생각하면 사람들을 기다리게 됩니다. 그때의 제가 언제 어디서 그들을 만날지 모르고, 그들 또한 언제 어떻게 변하게 될지 모르니까요. 그러면 10만큼 미워할 것도 5만큼 미워할 수 있게 되고, 10만큼 괴로울 것도 2만큼 괴로울 수 있게 되더라고요. |